제 7 강 사랑의 영원성! (고전13:8)
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어떤 젊은 수도사가 자기의 스승을 찾아와서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미 경건의 훈련을 쌓은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하나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대체 저는 어디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노스승은 대뜸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자네 옆에 계시는구먼."
그 말을 듣고 젊은 수도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두리번거리면서 좌우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어디에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젊은 수도사는 자기의 스승에게 되물었습니다.
"선생님, 어찌해서 저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스승은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자네는 술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기만 할 뿐 왜 자기의 집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지 아는가? 정신이 맑지 않아서 그런 걸세. 자네도 지금 곁에 계신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는 지금 자네가 무엇에 취해 있는지 그것을 깨달아서 거기서 깨어나야 할걸세."
그렇습니다. 우리가 육에 취하고 세상일에 취하게 되면 우리의 영은 어두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저 세상일에 푹 파묻혀서 정신 없이 살아가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매사에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펴 볼 엄두도 내지를 못했습니다. 기도도 그저 하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찬송은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 한두 곡 부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구제와 같이 사랑을 실천하는 일도 그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에게도 마지막 순간은 찾아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습니다. 예수님의 손에는 생명책이 들려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책을 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너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구나. 나도 한 때는 너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려고 생각했었지. 그러나 너무 바빠서 미처 기록을 못했구나."
물론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뼈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선과 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것보다는 일시적인 것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온전한 것보다 부분적인 것에 더 치중했습니다. 성숙한 것보다도 유치하고 초보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런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은 그들이 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만이 영원하고 사랑만이 온전하고 사랑만이 성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벧전4:8의 말씀을 우리가 잘 압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죄는 사랑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사랑만 있으면 모든 죄는 덮여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죄가 되살아납니다. 기를 씁니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왜 생겼겠습니까? 한 마디로 그들에게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의 발을 씻겨주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더 커 보이는 은사들을 사모하면서 그것을 갈구하기에 급급했습니다. 물론 은사는 소중합니다. 귀중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은사를 구하는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덕을 세우고 사랑으로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은사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남에게 뻐기고 과시하고 싶어서 은사를 구했던 것입니다.
이런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은 그들이 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어야 할 것은 은사가 아니고 사랑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사랑과 은사를 비교했습니다. 첫째로, 사랑은 영원하지만 은사는 일시적입니다. 8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둘째로, 사랑은 온전하지만 은사는 부분적입니다. 9∼10절의 말씀입니다. 셋째로, 사랑은 성숙한 것이지만 은사는 초보적인 것입니다.
오늘은 이 세 가지 가운데 첫 번째 해당하는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세 가지 동사가 쓰였습니다. 첫째로,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예언과 지식은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셋째로, 방언은 그친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 사랑의 영원성을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우리 모두 사랑의 열매를 맺는 일에 더욱더 힘쓰고 언제까지라도 떨어지지 아니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의 영원성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너를 위해서 나를 기꺼이 희생하는 참된 사랑을 가리킵니다.
하루는 어떤 자매가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저 아니면 죽고 못사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 청년은 저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제가 만일 그와 결혼해 주지 않으면 그는 당장 죽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목사님은 일언지하에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지금 그 청년은 자매를 결코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청년은 지금 자기만을 아는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매를 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냥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세요."
아가페의 사랑은 너를 위해서 나를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지 나 자신을 위해서 너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아가페의 사랑을 4∼7에서 열다섯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이미 우리가 열다섯 가지를 차례대로 살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7절 말씀만 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 어디에서나,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디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견디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아들이 집을 떠날 때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반드시 출세하리라. 돈 많이 벌어서 좀 으스대면서 집으로 돌아오리라."
그러나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는 나쁜 친구들을 사귀었습니다. 이국 땅에서 허랑방탕하는 가운데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렸습니다. 거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굶어죽게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돌아오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면 이렇게 말씀을 드려야지. 아버지, 저는 아버지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품꾼의 하나로만 써 주시옵소서."
그가 집에 돌아와서 무릎을 꿇고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들은 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너무 기뻐서 종들에게 외쳤습니다.
"얘들아, 내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 입혀라! 손에 가락지를 끼워라! 발에 신을 신겨라! 살찐 송아지를 잡자. 우리가 함께 잔치를 베풀고 즐거워하자!"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계속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아마 아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를 떠났으니까 아버지도 나를 버리셨겠지? 아마 호적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리셨는지도 몰라."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이 죄악 가운데 방황할 때도 아버지는 아들을 변함 없이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할 때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못할 때도 변함 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합니다.
요13:1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이미 받았습니다. 이 사랑 속에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죄악 가운데 그 동안 방황하셨습니까? 죄를 많이 지으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합니다. 실패하셨습니까? 병드셨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남보다도 더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에 대한 보답이 무엇입니까? 사랑에 대한 보답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요일4:11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에 대한 보답은 사랑뿐입니다. 요13:34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한 것처럼 우리의 사랑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향한 우리의 사랑도,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참된 사랑은 낙심이 없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언과 지식은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은사는 사랑처럼 영원하지 못합니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영원한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예언이라고 하니까 그 내용은 미래적이라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예언은 그 내용이 미래적일 수도 있고, 과거적일 수도 있고, 현재적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고 공간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언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고전14:3을 보십시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이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언뿐만 아니라 모든 은사의 목적은 교회에서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 전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곧 봉사하며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둘째, 권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도록 말씀으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셋째, 안위입니다. 누군가 힘든 일이나 슬픔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예언의 목적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에는 지식의 은사가 나옵니다. 물론 세상적인 지식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지식,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고전12:8에 보면 "지식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지식과 말씀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식은 내가 깨달은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말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은 선지자와 연결이 되고, 지식은 교사와 연결이 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예언은 설교하는 것에 가깝고, 지식은 신학교에서 교수님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나 또는 주일학교에서 교사가 어린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예언도 폐하고 지식도 폐한다고 했습니다. 원문에 보면 "폐한다"는 동사가 수동태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폐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의하여 폐하여 진다는 것입니까? 해답이 9∼10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예언과 지식은 온전한 것에 의해서 폐하여 진다고 했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 것이 폐하여 진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 모두가 온전해 집니다. 그때는 누가 설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교를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필요도 없고 가르침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온전해 지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뵈옵게 될 것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뵈옵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것입니다. 누가 중간에 나서서 가르치고 설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다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빛과 사랑이 충만한데 무슨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까지는 예언과 지식은 계속해서 필요합니다. 이 땅에서 예언의 은사와 지식의 은사는 소중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고린도 교인들은 교회에서 덕을 세우기 위해 이러한 은사를 구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은사를 구한 동기가 불순했습니다. 그들은 은사로 자신을 남에게 과시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그런 심리가 없습니까? 만일 사도 바울이 오늘날의 교회를 향해서 외친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했을지 이렇게 생각을 해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장로직도 폐하고 권사직도 폐하고 부서의 임원직은 그치리라."
은사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직분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 폐하여지고 맙니다. 그런데도 그것 때문에 마음에 시험을 받고 상처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죽어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에서는 그 목사님을 위해서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열렸습니다. 그러자 천국에 간 평신도들이 예수님께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불공평합니다. 목사님이 오셨다고 이렇게 대대적인 행사를 펼치시면 어떻게 합니까? 아니, 천국에서도 차별대우를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목사는 하도 오랜만에 천국에 왔기 때문에 내가 너무 기뻐서 대대적인 행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우스개 이야기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있는 줄 압니다. 은사와 직분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섬기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은사도 직분도 결국은 폐하여질 뿐입니다. 천국까지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어떠한 직분을 맡기셨든지 간에 사랑으로 섬기십시다. 그것만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을 뿐입니다. 은사나 직분은 온전한 것이 올 때는 폐하여질 뿐입니다.
셋째로, 방언은 그친다고 했습니다.
우선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절대로 군더더기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단어 하나 하나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예언과 지식과 비교해서 방언을 설명할 때는 중요한 차이점을 우리가 세 가지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다른 단어를 썼습니다. 예언과 지식은 "폐한다"는 말을 썼습니다. 그러나 방언은 "그친다"는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둘째, "폐한다"는 말은 수동태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친다"는 말은 중간태를 썼습니다. 헬라어에서 "middle voice"는 자기 스스로 동작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예언과 지식은 온전한 것에 의해서 폐해지는 것이고, 방언은 자기 스스로 그쳤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의해서 중단된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중단했습니다.
셋째, 9∼10절에 보면 방언은 언급이 빠졌습니다. 지식과 예언에 대해서만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9∼10절을 보십시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방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중요한 세 가지 차이점에서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방언은 예언과 지식과는 다른 시점에서 스스로 그쳤다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가 언제 그쳤습니까? 장로교의 정통적인 교리에서는 방언은 이미 사도시대때 그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비롯해서 13권의 성경을 썼습니다. 그런데 방언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본서 고린도전서 밖에 없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도 방언에 대한 언급이 일체 없습니다. 그러니 고린도후서를 기록할 때는 이미 방언의 문제가 고린도 교회에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등에서는 일체 방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뿐만 아니고 그 외에 성경을 기록한 다른 사도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유다도 방언에 대한 언급을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방언은 사도시대에 이미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시대 이후에 교회사적으로는 교부시대로 넘어갑니다. 교부들도 많은 문헌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교부들도 방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컨대 주후 95년에 로마의 크레멘트라는 교부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가 기록된 것이 주후 55년경이니까 40년 뒤에 로마의 크레멘트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한 셈입니다. 그는 그의 편지에서 고린도 교회가 당시에 가지고 있었던 영적인 문제들을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방언은 언급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방언은 더 이상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시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뒤에 20세기까지 1700∼1800년 동안 방언은 일체 언급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따금씩 간헐적으로 방언의 은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모두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너희들에게 없는 것이 우리들에게 있다. 우리는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 그러니 우리가 진짜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자신들을 옹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정통 기독교에 이상하게 다시금 방언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방언이 스스로 그쳤으면 영원히 그친 것이지 그 뒤에 다시금 되살아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아예 그친 것이 아닙니다. 방언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나만의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 방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남들이 알지 못하는 자기만의 언어로 기도하라고 가르친 곳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신구약 66권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런 가르침은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남들이 알지 못하는 혼자만의 언어로 기도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마6:7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 당시 이방인들은 자기들의 신전에서 "랄랄랄랄 따따따따…"하는 소리를 계속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랄랄랄랄"하는 것이 무슨 방언입니까? 방언은 말 그대로 나라의 언어(language)입니다. "랄랄랄랄"하는데 거기에 무슨 주어가 있고 동사가 있고 목적어가 있습니까? 그런 것은 방언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신전에서 자기들 신에게 외칠 때 그냥 계속해서 뜻없는 말을 중언부언으로 반복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이런 이교도적인 요소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그대로 도입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방언은 심판의 표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고전14:21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하나님은 본시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신에 대한 심판의 표적으로 장차 언젠가는 다른 방언으로 그들에게 말씀을 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표적으로 주신 것이 바로 방언입니다. 다음 절 14:22을 보시기 바랍니다. 더욱 분명해 집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방언은 누구를 위한 표적으로 주셨다고 했습니까?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으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은 이것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그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신비한 어떤 말을 가지고 기도하면 그것이 제일인 줄 알고, 이방인들이 하는 흉내를 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14:2을 보십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은사의 목적이 변질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은사는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은사를 통해서 남들을 섬기라고 주신 것인데, 고린도 교인들은 이방인들의 흉내를 내면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쓰이는 것이 방언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사의 목적이 변질된 것입니다. 잘못 이해를 한 것입니다.
몰몬교의 창시자였던 조셉 스미스는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일어서세요. 그리고 혀를 구부리면서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세요. 그러면 주께서 그것을 방언으로 바꾸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정통적인 기독교에 그런 이단적인 모습을 흉내내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은사는 내가 노력해서 내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교회에 덕을 끼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인본주의적으로 얻는 것이 은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지 말고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 자신이 겪었던 어떤 체험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는 강단에서 성경을 바르게 가르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은사나 직분은 일시적일 뿐입니다. 그런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마십시다.
왜 요즘 사람들이 방언의 은사를 구하려고 합니까? 따지고 보면 고린도 교인들이 가졌던 심리가 그들에게 깔려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남들에게 없는 것이 자기한테는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어떠한 직분을 주셨든지 그것에 구애받지 말고 우리는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한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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