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 : 요한복음 20:11~18
구레네 시몬은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우연히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 들이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역사 속에서 이 구레네 시몬의 가정은 모두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충성하는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1907년 100년 전 평양 대부흥 운동이 일어 났는데 그 때 모인 사람들이 모두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회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에 일본군 순사들이 반정부 인사를 체포하기 위해 참여했습니다. 길선주 장로님이 일어나서 자기가 저지른 죄를 회개할 때 일본 순사의 마음속에도 말씀이 꽂혔습니다. 일본 순사가 일어나서 말하길 “내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고백하는 기적같은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죽으신지 삼일 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 우리가 주님을 만나면 누구든지 변화되는 귀한 역사가 일어남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남달리 많은 사랑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죽으셨음에도 그 크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자기가 보살피는 것이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요한복음 20장 1절 “새벽 미명에”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 누우셨던 무덤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이 옮겨졌고 무덤 안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될 것이 있습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잘 섬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일날 새벽에 무덤에 간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을 만나러 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에게 누누이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수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도 이것을 들었습니다. 만약에 막달라 마리아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있었다면 죽은 시신을 보러 가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무덤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 잊어버렸고 죽은 시신을 보러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늘 이 시간 2007년 4월 8일에 역사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예배, 이 시간에 여러분들 그냥 2천년 전 죽었다가 살아난 성경책에 있는 예수님, 우리 기억속에 있는 예수님을 보려고 왔느냐 아니면 이 시간 부활하셔서 이 자리에 계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시는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 뵈러 왔느냐 우리 스스로 한번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추억 속에 있는 예수님, 자기를 사랑하시고, 자기 병을 고쳐주시고, 자기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신 추억 속에 있는 예수님을 보살피러 왔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여, 동산에서 뭘 찾느냐?” 이 여자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우리 주님의 시신을 어디에 갖다 놓았는지 말해주시오. 내가 가져가겠습니다.” 끝까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은 시신을 찾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십니다. 그 음성은 바로 며칠 전에 자기를 불러주신 예수님의 음성이고 그 음성을 듣자마자 마리아는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는 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 슬픔의 역사가 끝나고 기쁨의 역사, 절망의 역사가 끝나고 새로운 소망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이 어떤 이유로 나왔는지 모릅니다. 목사님이 etc 교인까지도 오늘 나오라고 했으니까 부활절이니까 할 수 없이 끌려나온 분들도 않을 것입니다. 어떤 동기로 나왔든 오늘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오늘의 절망이 변해서 소망으로, 죽음이 변해서 생명을 얻는 귀한 역사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사도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그러면서 말씀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를 엄습해오는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것이 바로 참된 부활 신앙입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시신을 동굴에 갖다 놓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큰 돌로 입구를 막았습니다. 인봉까지 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을 무덤 앞에 세워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막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똑같은 돌이 있습니다. 실직이라는 무서운 돌, 실패라는 돌, 이별이라는 돌, 이런 걱정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주일날 문을 닫으면 완전히 가게 망하는 줄 알고 주일날 문 절대로 못 닫습니다. 어떤 분들은 주일날 그 사람하고 골프 안치면 자기 사업 안되는 줄 알고 교회는 빠져도 그 사람 비위를 맞추려고 골프를 칩니다. 우리에게 이런 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의 사람들을 더 의지하는 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길 “네 독자 이삭을 바쳐라.” 아브라함에게 있어 독자 이삭은 그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모리아 산에 올라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쳤으나 하나님이 막았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을 믿고 이삭을 바쳤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그가 생명처럼 아끼는 이삭도 바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허락해 주었던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돌들, 그리고 빌라도의 봉인, 로마 군인들 다 무너뜨리고 우리를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 앞에 있는 믿음의 장애들을 물리치고 부활의 주님과 함께 승리의 삶, 그리고 부활의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삶, 이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오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신앙을 소유하시는 한신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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