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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갈라디아서 강해/제 8 강 또한 내게 역사하사 (갈2:6-10)

제 8 강 또한 내게 역사하사 (갈2:6-10)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갈라디아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부흥하고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언제나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단은 교회의 성장을 막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 한 가지 방법이 알곡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는 것입니다. 가라지들이 많이 생기면 곡식들은 절로 손상을 입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더더욱 나쁜 것은 이 가라지들은 주제파악을 제대로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치 자기들이 밭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알곡들을 밭에서 몰아내려고 합니다.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에도 똑같은 현상이 생겼습니다. 이곳에 율법주의자들이 가만히 들어왔습니다. 저들은 사단의 하수인으로서 곡식을 해치는 가라지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복음이 아닌 이단 사상으로 순진한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기 위해서 바울의 사도직을 부인하며 바울의 가르침도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이유는 이러합니다. 예수님의 사도가 되려면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직접 받아야 하는데, 바울은 예수님을 따라다닌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사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가 전한 내용들도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는 계속적으로 그의 사도권과 그가 전한 복음의 신적 기원을 밝혔습니다. 그런 후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 들어와서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포함한 예루살렘 공의회가 그가 전한 복음을 그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바울과 함께 간 헬라인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도록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서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대로 할례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분명히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연속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6절). 

둘째,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의 사도권도 인정을 했습니다(7-9절).

셋째,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에게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10절).

이제 말씀을 차례대로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의 복음을 그대로 인정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살펴봅니다(6절). 


6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유명하다는 이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9절 상반부에 있는 말씀은 그들을 또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유명하다는 이들”은 또 다른 말로는 “기둥 같이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여기에 그들의 이름들이 구체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 등 세 명입니다.

아마도 여기에 사용된 용어들, 곧 “유명하다는 이들”이라든지 또는 “기둥 같이 여기는 자들”이라는 용어들은 율법주의자들이 주로 사용하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유명한 자들이요, 기둥 같이 여기는 자들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에 비해 바울은 무명한 자요, 보잘것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그들이 사용하던 용어를 그대로 빌려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그렇게나 대단하게 여기고 있던 예루살렘의 사도들, 소위 말하는 “유명하다는 이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서 어떠한 결론을 내렸습니까? 6절 끝 부분을 보겠습니다.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무슨 뜻입니까? 아마도 율법주의자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이렇게 말해주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바울 선생! 물론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맞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율법을 무시하면 되겠소? 그러니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시키시오. 그리고 율법도 지키라고 말하시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의 복음에 아무 것도 더하여 준 것이 없었습니다. 할례를 더하지도 않았고, 율법을 더하지도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나 자기들이 전하는 복음이나 전혀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준 셈입니다. 결국 바울의 가르침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가르침과는 같지 않다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거짓으로 판명이 난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을 보면, 괄호 속에 이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바울은 여기서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자기에게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무시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을 존경했습니다. 그러기에 갈2:2 말씀에 있는 대로, 그는 계시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가서 그들에게 사사로이 그가 이방 가운데 전파하는 복음을 제출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주의자들이 자기와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비교하면서 차별을 두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강하게 변호하기 위해서, 본래 어떤 이들도 자기에게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명한 자들에 의해서 사도로 임명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셨던 것처럼 그를 사도로 세우신 분도 역시 하나님이셨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들에게서 복음을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받은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루살렘의 사도들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람에게라도 자기의 사도직이나 사역에 대해서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바울은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라고 말하는 것이지, 예루살렘 사도들을 무시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원리가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늘 명심하면서 살아가야 할 참으로 귀중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베드로는 세 번에 걸친 환상을 보고, 또 고넬료의 가정에서 되어진 일을 보고서야 이 같은 사실을 깨달았던 것을 보게됩니다. 행10:34-35입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주의자들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사람의 외모를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례와 무할례를 따졌습니다. 또 유명한 자와 무명한 자를 따졌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사람의 외모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코 할례와 같은 외모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못박았던 것입니다. 아울러 그는 사람의 외모를 보고 유명과 무명을 따지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이들이든지 외모와 상관없이 동등하게 대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겸손한 자세로 충성을 다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나 다 귀하게 쓰십니다. 야고보는 야고보대로 귀하게 쓰시며,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귀하게 쓰시고, 요한은 요한대로 귀하게 쓰시며, 바울은 바울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귀하게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엑스트라가 없습니다, 모두가 주인공들입니다.

예컨대 집에는 금 그릇도 있지만 토기그릇도 있습니다. 외모로 보면 금 그릇이 토기그릇보다 더 귀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금 그릇보다는 토기그릇의 용도가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금 그릇이야 이따금만 사용되지만, 토기그릇은 언제든지 편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외모가 어떠하든지 간에, 예컨대 우리가 배웠든지 배우지를 못했든지, 또는 우리가 가졌든지 가지지를 못했든지 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고자 할 때 우리는 그저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외모를 취하려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외모를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보다 나은 사람 앞에서는 비굴해지기가 쉽습니다. 반대로 우리 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는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 무시하면, 우리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서 똑같이 무시당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두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려 들지 말고,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주께 대하는 심정으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자기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에 더하여 준 것이 없이 그대로 인정했음을 밝혔습니다. 바울은 이제 7-9절에서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둘째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한 사실에 대해서 살펴봅니다(7-9절).


7절입니다.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이 바울에게서 분명하게 보게 된 사실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처럼, 바울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할례자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고, 무할례자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방 지방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당시 세계의 공용어였던 헬라어를 잘 했습니다. 이방 문화에도 익숙했습니다. 게다가 그에게는 로마의 시민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 있던 중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제대로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이방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면 통역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자연히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적합한 인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비록 그들이 사역을 하는 지역과 대상은 서로 다르더라도,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전혀 다르지 않고 똑같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함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보았겠습니까? 몇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갈1:23입니다.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그들은 바울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자기들이 전하는 복음과 똑같은 복음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갈2:2입니다.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또한 그들은 바울이 자기들에게 제출한 복음과 그의 사역에 대한 보고를 들으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바울에게서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는 간증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서 예루살렘 사도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택함을 받은 사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8절 말씀은 7절과 9절 사이에 삽입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7절은 문맥상 9절과 연결이 되고, 8절은 바울이 7절에서 9절로 넘어가기에 앞서 잠시 자신의 확신을 피력하고 있는 말씀으로 보면 이해하기가 더 쉽습니다. 7절과 9절을 연결하고 그 다음에 8절을 놓아서 제가 본문 말씀을 다시 읽어봅니다.


7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7절 끝에 보면 “보고”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9절 상반부에는 “알므로”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보기도 하고, 알기도 함으로서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아울러 8절에서는 바울 자신도 그 사실에 대한 강한 믿음과 확신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맥의 편의를 위해 9절 말씀부터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9절입니다.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하나님이 바울에게 베푸신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바울이 180도로 완전히 변화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는 본시 유대교에 열심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잔해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전에 핍박하던 그 믿음을 도리어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여러 곳에 교회도 세워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이 바울에게 베푸신 은혜로 되어진 일들이었습니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과 같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7절에 기록된 바대로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함을 맡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8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바울의 삶과 사역에 베푸신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자연스러운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했습니다. 요즘도 중요한 회담이 끝나면 서로 간에 합의서를 교환하고 굳은 악수를 나누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예루살렘 공의회가 끝난 뒤에,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협력하는 동역자의 관계인 것을 확인하는 의미로 굳은 악수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그들 사이에 한 가지 합의된 사항이 있었음을 바울은 9절 하반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바울과 바나바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로 가고,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자들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에게로 가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사역할 대상과 장소를 서로 간에 구별하기로 합의를 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음 전파에 효율적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서 복음을 전하든지 그 내용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맡겨주신 분도, 그들에게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분도,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도 같은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들이 교제의 악수를 함으로서,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그 대부분인 21권을 기록한 사람들이 서로 굳게 손을 잡은 셈이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신약성경 야고보서를 기록했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후서를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일이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13권의 신약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21권입니다.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그 대부분인 21권을 기록한 사람들이 함께 손을 굳게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 후에 단 한번도 그들은 교리적인 문제로 바울과 논쟁을 벌인 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뒤에 베드로는 벧후3:15-16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여기서 베드로는 바울을 사랑하는 형제로, 지혜로운 형제로 높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쓴 편지들을 다른 성경들과 같은 위치에 놓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명한 자들 가운데 대표자인 베드로가 그의 서신 속에서 바울의 사도권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로서 바울은 사도가 아니요, 그의 가르침은 잘못이라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들어 나고 만 것입니다.  

이제 다시금 8절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이는 바울의 강한 확신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베드로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것처럼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로서 바울은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은 자기에게도 역시 역사하신 것을 들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예컨대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갈리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살아가던 어부로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베드로였지만, 그가 한번 설교를 함으로서 유대인들이 삼천 명이나 회개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니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또한 병도 고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리게 하셨습니다. 행9:40-42입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하나님의 역사는 베드로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도 똑같이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들도 많이 세워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병든 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았습니다. 그 또한 죽은 자도 다시 살렸습니다. 행20:9-12입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하나님, 바울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귀한 사명을 맡기실 때는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도 반드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우리의 순종이요, 우리의 헌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작은 일에 충성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일을 맡기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아울러 그 일을 감당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도 풍성하게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6절에서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자신의 복음을 그대로 인정했음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7-9절에서는 그들이 바울의 사도됨을 인정하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마지막 10절에서는 그들이 바울에게 오직 한 가지를 부탁했는데, 그것은 전혀 교리와는 상관이 없는 실천적인 문제였습니다.


셋째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부탁했던 것에 대해서 살펴봅니다(10절).


오늘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비롯한 예루살렘 공의회는 바울의 복음과 그의 사도권을 인정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서로 간에 합의된 사항은 사역지를 서로 다르게 구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로 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무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로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서로 간에 합의한 사항이 한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는 합의라기보다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부탁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에 힘써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 나타난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예루살렘 교회는 급속히 부흥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있었던 120여명의 성도들에 의해서 복음전파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수는 3천명으로, 또 5천명으로, 그 이상으로 계속해서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유대교의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신앙 때문에 마땅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들의 경제를 책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행2:44-45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그러나 믿는 이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니까, 아무래도 예루살렘 교회의 재정도 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사도들은 비교적 넉넉한 이방교회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 바울과 바나바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줄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교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실천적인 문제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서도 바울의 입장은 어떠했습니까?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그들의 부탁이 따로 없더라도 바울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구제하는 일은 본래부터 힘써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자기가 예루살렘 공의회와는 교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까지도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던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행11:27-30 말씀을 읽어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이때는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기 이전이었습니다.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부탁하기도 전에, 이미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구제헌금을 전달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후에도 구제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그의 서신에는 구제에 대한 교훈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몇 구절만 찾아봅니다. 롬12:13과 엡4:28, 그리고 딤전6:18을 차례로 찾아서 읽어봅니다.


롬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엡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딤전6: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특별히 바울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그에게 부탁한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롬15:25-27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또 고전16:1-4입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바울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힘써 행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형편이 되는대로 이웃을 돕는 일에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10월 29일은 총동원 전도주일입니다. 한 성도가 5명 이상씩 초청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일을 이루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에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셨던 것처럼, 바울에게 역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필히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은 똑같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온 천하보다도 소중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길과 산울 가로 가서, 저는 자도 눈먼 자도 다 데리고 와서 “내 집을 채우라”고 명하셨습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힘써 전도하고 초청해서 우리 모두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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