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강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갈2:15-17)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이른바 안디옥 에피소드(the Antioch episode), 곧 안디옥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공의회를 마치고 안디옥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바울의 사도권과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을 그대로 인정을 했습니다. 그 하나의 증거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그 누구도 바울이 데리고 갔던 헬라인 디도에게 할례 받을 것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복음의 진리가 확고하게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던 중 베드로가 바울이 목회를 하고 있던 안디옥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귀한 손님이 왔다고 자신들의 정성을 다해서 베드로를 융숭하게 대접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베드로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서 식사대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따금씩 율법에 먹지 못하도록 규정된 음식들이 식탁에 올라올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막7:18-19에서 예수님이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환상, 곧 그가 고넬료의 가정을 방문하기 전에 받았던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은 결코 이방인들과의 식탁의 교제를 금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이 베드로를 초청할 때마다, 전연 거리낌없이 그들의 초청에 응해서 그들과 식탁의 교제를 함께 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율법주의자들이 안디옥에 오고 나서부터는 이 베드로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베드로는 율법주의자들이 자기에 대해서 비판하며 공격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때부터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을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율법주의자들 앞에서 마치 자기가 이방인들과는 식탁의 교제를 하지 않은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있는 다른 유대인들도 베드로의 외식적인 모습을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심지어는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 공의회에 가서 복음의 진리를 옹호했던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외식에 물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않음을 보고서, 모든 이들 앞에서 베드로를 단호하게 책망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복음의 진리에 바로 서야 할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않음으로, 다른 사람들도 그를 따라서 행동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안디옥에서 있었던 이 일을 계기로 해서, 오늘 본문에서 그는 우리에게 복음의 진리를 다시 한번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욥25:4에서 욥의 친구 빌닷은 이런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받은 계시에 따라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차례대로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언제나 복음의 진리 위에 굳게 서며,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바로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5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여기서의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먼저 책망을 하는 바울과 그리고 책망을 받는 베드로, 또 그 자리에 함께 있을 바나바를 위시한 다른 유대인들을 총망라해서 일컫는 말일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본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시는 이방인들이었는데, 할례를 받고 개종해서 유대인이 된 자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방인들을 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을 무시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단지 바울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이방인들을 죄인처럼 대하고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인용해서 습관적으로 말씀하고 있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도덕적, 윤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의 눈에는 이방인들이 멸망할 죄인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유대인들의 습관적인 발언을 인용하고 있는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자기들이 본래 유대인들이었기에 율법을 가졌다는 특권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인들을 죄인으로 취급해서 그들을 무시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바울은 율법을 가졌다는 특권이 복음의 진리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밝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런 뜻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솔로몬이 세상 부귀 영화에 대해서 다 헛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처럼 실제로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린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까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처럼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별반 설득력이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가진 순수한 유대인들이 율법의 무능에 대해서 역설하면, 그 주장은 강력합니다. 반대로 율법을 가지지 못한 이방인들이 율법의 무용함을 주장하면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질 수박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들이 본래 유대인인 것을 먼저 밝혔던 것입니다. 바울의 논지는 이렇습니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인 우리도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알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느냐? 유대인들인 우리도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하물며 어찌 율법이 없는 이방 죄인들이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바울은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도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들어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당연히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은 오늘 본문 16절에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세 번에 걸쳐 각기 다른 각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사도적 권위로서 일반적인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 상반부 말씀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둘째,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 중반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셋째, 바울은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해서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16절 하반부입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제 말씀을 차례대로 읽어가면서 간단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사도적 권위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기본 진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여기에서의 사람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구별이 없이 이 원리는 누구에게나 해당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먼저 부정적인 말로 그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그러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은 이번에는 긍정적인 말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아는고로.” 그렇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믿음으로 말미암은 길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일 우리가 생각해보았던 요3:14-17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시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복잡하지도, 까다롭지도 않습니다. 단 한 가지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믿음입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았을 때,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먹고 고개만 돌리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일단 쳐다본 사람들은 다 살았습니다. 비록 그가 원망을 주도했던 사람이더라도, 마음에 의심하는 생각이 들었더라도 일단 쳐다보기만 하면 다 살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도덕적인 수양이나 선행을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과학적인 연구를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신 독생자 예수님을 믿으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리 악독한 죄의 병에 걸린 자라 하더라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에 의해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16절 중반부에서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이 사실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16절 중반부 말씀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율법의 의를 구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그는 이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빌3:5-9 말씀을 읽어봅니다.
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이전에 그가 자랑하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것들로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전에 자랑하던 것들을 기꺼이 버렸습니다. 그 대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서 난 의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16절 하반부에서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16절 하반부입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예컨대 시143:2 말씀입니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사실 우리는 세상법도 제대로 다 지키지를 못하면서 삽니다. 예컨대 운전을 할 때를 생각해봅시다. 알게 모르게 속도를 위반할 때가 얼마나 많으며, 주차위반을 해서 범칙금을 낼 때도 부지기수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어떻게 다 지켜서 그것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겠습니까?
설사 율법의 규정들을 다 지켰다고 합시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의 외모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우리 인간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온전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컨대 예수님이 마5:22에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봅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설사 우리가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적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사람을 미워하면 이는 내적으로 살인한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누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규정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있겠습니까? 또 예수님은 마5:2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비록 우리가 육체적으로는 간음을 하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예수님, 율법의 수여자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 말씀에 대해서 아니라고 반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 누가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의 규정에 또한 자유로울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원리를 잘 보여주는 예수님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른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입니다. 눅18:9-14입니다.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바리새인의 외모를 귀히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세리의 회개하는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리새인보다는 오히려 세리를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의 행위는 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내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마음을 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고 오직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마지막 17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베드로는 바울에게서 이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그는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아무런 거리낌없이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율법주의자들이 오니까 그들이 무서워서 더 이상 이방인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 자기가 율법을 어기는 죄인으로 나타나게 될까봐 우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예수님은 막7:18-19에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분명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동안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서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율법주의자들 때문에 마치 자기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 죄인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는 셈입니까? 예수님이 베드로를 죄짓게 만든 셈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죄를 짓게 한 책임이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아주 강한 부정입니다. 바울은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어떤 경우를 설명할 때, 일부러 먼저 그 경우를 가정하여 설명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예컨대 갈3:21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실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결코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행한 행동을 13절에서는 외식이라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더니 17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행동이라고까지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않았다가 너무너무 혼이 난 것입니다.
그래도 바울은 여기서 베드로를 많이 생각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를 가리키며 “네가”라는 단도직입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만일 우리가”하면서 빙 둘러서 완곡한 표현을 써서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직접적으로 겨냥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이 사실이 적용되도록 돌려서 말씀을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무엇으로 말미암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게 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후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이 벗은 줄 알고서 어떻게 했습니까? 창3:7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러나 무화과나무 잎으로는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 창3:21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수치스럽고 죄 된 모습을 가리워주시기 위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러한 일을 통해서 아담과 하와는 무엇을 깨달았겠습니까? 자신들의 죄 된 몸을 가리기 위해서는 스스로 만든 옷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주신 옷을 입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죄를 덮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자신들의 죄를 덮기 위해서 짐승이 피를 흘리면서 죽어야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에게 죄 사함을 받기 위한 제사를 드릴 때는 피 흘림의 제사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었던 가인과 아벨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렸습니까? 창4:3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이 요구하신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릴 것을 요구하셨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인은 하나님이 요구하신 제사가 아니라, 자기식으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의 제사는 한 마디로 불순종의 제사요, 비신앙적인 제사였습니다. 이 때 드려진 가인의 제사는 자기의 의, 인간적인 의를 내세운 최초의 고의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달랐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양을 잡아서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가 행위의 의를 대변한 것이라면, 아벨의 제사는 믿음의 의를 대변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아벨은 믿음으로 시간을 뛰어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든든히 붙들었던 셈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인간적인 의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 이후, 인간의 종교 생활에는 언제나 이 두 가지 다른 양상이 나타났습니다. 가인의 방식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의를 강조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 바울 당시의 율법주의자들은 다 가인의 방식에 따라서 인간의 의를 주장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요, 사단의 속삭임에 미혹을 받은 결과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행위로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식으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늘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추천 설교 > 박상훈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갈라디아서 강해/제 12 강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3:1-5) (0) | 2016.12.01 |
---|---|
[스크랩] 갈라디아서 강해/제 11 강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18-21) (0) | 2016.11.17 |
[스크랩] 갈라디아서 강해/제 9 강 복음의 진리를 따라 (갈2:11-14) (0) | 2016.11.17 |
[스크랩] 갈라디아서 강해/제 8 강 또한 내게 역사하사 (갈2:6-10) (0) | 2016.11.17 |
[스크랩] 갈라디아서 강해/제 7 강 복음의 진리로 (갈2:1-5) (0) | 2016.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