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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사는 사람 창세기 6장 5~12절

고형진 목사 / 강남동산교회 담임


본문 : 창세기 6장 5~12절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 9.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 10.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 11.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 12.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우리는 서커스하면 옛날에 보았던 서커스를 기억한다. 동네 비어있는 공터에 천막을 치고 앞에 코끼리와 원숭이를 전시하고 천막 안에 그네를 타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아슬아슬한 서커스를 기억한다. 그래서 서커스하면 조금 지저분하고 떠돌이들이 하는 서커스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 서커스가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사양길로 들어선다. 이때에 기 라리베르테라는 사람이 서커스에 스토리를 집어넣고 세련미와 예술성을 감미해서 일명 <태양의 서커스>를 새롭게 탄생시켰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서커스의 개념을 확실하게 바꾼 차별화의 전략이었다. 태양의 서커스는 엄청난 수익을 올렸고 가는 곳마다 공연이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게 우리나라의 동춘 서커스보다 조금 더 잘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실력이 월등한 것이 아니라 차원이 다르다. 다시 말하면 차별화가 된다는 말이다. 핸드폰이 극점에 달랐을 때에 아이폰이라고 하는 스마트폰의 등장은 지금까지의 핸드폰과는 질적으로 다른 폰이었다.

우리는 지금 하던 것을 조금 더 열심히 하면 잘될 것이라고 하는 낙관적인 사고는 이제 버려야 한다. 그 정도해서는 결코 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성공하거나 승리할 수는 없다.
달라야 한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선한 사람도 있지만 악한 사람도 많아지게 되었다.그런데 늘 그런 것 이지만 악한 사람들이 점점 득세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악한 사람으로 세상이 가득 차게 되었다.

오늘 5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죄가 세상에 가득 차 있다는말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악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다. 생각이 악함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아무리 선한 것을 주어도, 사랑의 말을 주어도 선함으로,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대화하다가 꽉 막힌 사람을 만나보지 않았는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소리만 높이고 자기주장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어떤가? 화도 나고 한번 쥐어박고 싶지 않은가? 그리고 속으로 그러다가 한번 된통 당해봐라고 하는 속마음이 있지 않은가? 이게 우리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악으로 가득차고 교만한 인간들을 보면서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의 자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저주하지도 말고, 욕도 하지 말고 그 사람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래야 도리어 내가 행복하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세 가지 마음의 자세’
여러분들이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세 가지의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나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이 마음이 조금 더 성숙하면 사랑하는 마음이 된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갖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또 다른 마음은 무관심하려는 마음이다.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미워하는 사람에게 사랑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무심한 척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혜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사람을 용서하게 해달라고 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의 자세여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누가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공격하고, 자기를 음해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무심하게 대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똑 같지는 않다. 분명히 다른 사람들도 있다.

오래전에 우리교회 청년이 자신이 경험한 것을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것을 읽어 보았다.
지금은 결혼한 우리 하임교회 청년이 비싼 빨강버스를 탔는데 지갑도 없고 카드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그런데 이 순간에 회사원 오빠정도로 보이는 분이 선뜻 차비를 내어주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감동스러운 것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며 오천원까지 주고 가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폰번호나 청년의 폰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는 작업도 전혀 없이 바람처럼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이 내용을 읽고 많은 댓글이 있었다.
“감동이다, 세상은 아름답구나 등..”
나는 이 글을 읽고 이런 댓글을 달았다.
“너가 받은 것을 그 누군가에게 하렴... 그게 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 같아... 너무 기분좋은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오늘 본문은 세상이 다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라고 표현하였다. 심지어는 마음도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라고 하였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세상에 가득 찬 것은 죄악이고 모든 계획은 악한 것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은 통곡하셨다. 타락해가는 인류의 죄악을 보고 그리고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찬 우리들의 생각을 보시고 하나님은 마음아파하시고 통곡을 하셨다.

죄 밖에 없는 세상! 이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가?
우리가 핸드폰이 계속해서 버벅거리면 초기화를 하거나 리셋을 한다. 무슨 이야기냐면 컴퓨터가 바이러스를 먹거나 속도가 느려지면 새롭게 초기화를 하여 처음상태로 돌리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지금까지의 내용을 다 지우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악이라고 하는 악은, 악의 모양도 모두 죽여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위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셨고 모든 인간들과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겠다고 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7절.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기서 역사는 끝났어야 했다. 모든 육축(소, 말, 양, 돼지, 개, 닭)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모두 전멸되어진 역사여야 했다.

그럼 이 상황에서 희망은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절대절망인가?
그렇지 않다. 8절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인류의 절대절망 가운데에서 노아를 찾아내셨다.
우리 인류의 역사는, 우리교회의 역사는, 우리가정의 역사는 여기서 끝났어야 했다.
그런데 아직 우리 민족이, 우리 교회가, 우리 가정이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바로 창세기 6:8의 “그러나” 때문입니다.
이 “그러나”가 없었다면 우리는 끝이 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그러나”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당시에 타락한 세상, 타락한 양심들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나”가 있었다.
바로 노아라는 “그러나”의 인물이 있었다.

오늘 본문은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런데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몇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지 않았다는 말인가?
아담 이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럴리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이후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그런데 왜 굳이 오늘 본문에서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만 되어 있을까?

사랑하는 여러분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있다. 자녀들에게 물어보라.
아빠, 엄마가 사랑하는 것 알지?
그럼 애들이 그럼 알지라고 말하는 애들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아이들은 부모가 돈을 줄 때만 사랑하는 것을 안다.
명절 때 어떤 분이 이런 카톡을 보내주셨다.
깨와 소금을 섞으면 깨소금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깨와 설탕을 섞으면 무엇이 될까요?
정답은 “깨달음”이다.

오랫동안 청소년과 청년사역을 하다보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을 발견한다.
청소년기에 열등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성적에 대한 열등감과 또 하나는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다.
그런데 성적에 대한 열등감은 점수가 나오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리고 성적은 또 내가 하면 바꾸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변수가 있다. 그래서 공부는 못하면서도 아이들은 늘 이런 마음은 먹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공부하기로 마음만 먹으면 반에서 5등 안에는 충분히 들 수 있다”라고 하는 자신감이 다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졸업할 때 까지 “공부하기로 마음을 안 먹는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성적에 대한 열등감보다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다. 특히 남자보다 여자들은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아주 심하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그런데 내가 청소년 사역을 하면서 깨닫는 것은 상대방이 느끼는 것보다 스스로 자신의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더 높다라고 하는 것이다. 분명히 내가 볼때에는 귀엽기도 하고 이쁜데 본인은 늘 자신이 못생겼다, 매력이 없다. 싼티난다라고 생각을 하는 청소년들이 아주 많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자신이 못생겼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래서 열등감이 있는 친구들이 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게 진실이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누가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알게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아무리 은혜를 주어도, 사랑을 주어도 상대방이 깨닫지 않으면 그것이 사랑인지, 은혜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도 깨닫지 못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노아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어떻게 죄악이 가득 찬 세상, 불법이 가득 찬 세상에서 어떻게 다르게 살 수 있는가?
그것은 제일 먼저 “내가 은혜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자녀들에게 늘 부모들은 최상의 것으로 해주고 싶어한다. 그런데 문제는 자녀들이 그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들은 조금 부족하게 입고 먹어도 자녀들에게는 늘 잘해준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것을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들은 부모들에게 감사하고 고맙기는 하지만 그렇게 감동하면서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자녀들에게 부모님들이 이렇게 해주는 것 고맙지 않니라고 물으면 자녀들은 “네 당연히 고맙지요, 감사하고요~”라고 대답을 하지만 그들안에 진심으로 고맙거나 감동하는 것 같지는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기숙사생활을 하거나 아니면 군대에 가보면 그때에 당연한 것이 아니라 부모님들이 참 나에게 잘해주셨구나라는 느끼게 된다. 여자들은 결혼을 하고 시집을 가서 아! 우리 부모님들이 정말 나에게 잘해주셨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은혜를 받아도 모르는 사람은 끝까지 모른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것을 아는 사람은 삶이 달라진다.

결국 이 세상에서 누가 다르게 살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와 깨달은 자”가 다르게 살 수 있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과 탕자가 있다.
아마 큰 아들은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 그러나 거기까지 였을 것이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집에 돌아온 이후부터는 “열심히”가 아니라 “다르게”살았을 것이다.
왜? 은혜를 입었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 모든 사람들이 다 타락하고 죄를 짓는 그 상황에서 노아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9절.
어떻게 노아가 이렇게 의인으로,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살 수 있었을까?
그것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은혜를 입은자만이 “그러나”를 말하면서 “다르게” 살 수 있다.
은혜를 입지 않은 자들이 그러나를 외쳐본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그러나가 아니다.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그러나이다. 반대를 위한 그러나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은 은혜를 받은 ‘그러나’이다.

<커쇼의 어라이즈>라는 책을 읽었다.
그 책에서 그는 자신을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우연히 야구선수가 되었을 뿐이에요 기독교인이 먼저이지 야구가 먼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클레이튼 커쇼- 커쇼라고 하면 미국의 LA 다저스 선발투수이다. 그는 2011년에 사이영상을 수상했다. 근는 2011년에 투수부분 3관왕에 오른 최고의 투수이다. 2014년도 7년 연장계약을 했는데 총연봉은 한화로 약 2284억원이라고 한다. 연봉이 300억이 되는 것이다. 최고의 투수이다. 우리는 운동선수이면 돈도 많이 벌고 술도 많이 먹고 대충 생각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다.
어떤 사람인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커쇼는 삼진을 잡을 때마다 500달러를 기부했고, 2012년도에 6억원을 잠비아에 기부했고 각종 시상으로 받은 상의 80%를 아프리카에 기부했다. 또한 나아가서 이번 2014년도 연장계약을하고 파티를 하였다. 보통 사람들은 2000억이 넘는 계약을 하면 아내에게 보석을 사주거나 좋은 집을 짓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커쇼는 계약이 마친후에 몇 몇 친구들을 초대해 타구를 치고 그릴에 햄버거 몇개를 구워 먹고 파티를 마쳤다.
커쇼는 자신의 늘어난 연봉과 계약금으로 벌써 다양한 사회 환원을 계획 중이다. 아내와 함께 운영 중인 비영리 단체 '커쇼의 도전(Kershaw's Challenge)' 및 다양한 자선 단체와 연계해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기부하고 환원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 중이다.
그는 "나는 이번 계약으로 받을 돈이 엄청난 축복이고 그에 따른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안다. 엘렌과 나는 이 돈으로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많은 걸 할 수 있다는 걸 안다.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많은 돈을 받고 살아가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렇게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