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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 23. 동방박사 마태복음2:1-12, 막14:3-9

12. 12. 23.              동방박사       마태복음2:1-12, 막14:3-9



그 어느 해보다 시끄러웠던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정치계엔 총선과 대선이 함께 있던 2012년 이었습니다. 두 선거를 치루며 분열, 갈등의 골이 깊어져만 갔습니다. 지역 간, 세대간, 좌우이념 간 갈등을 확인하는 격이 되었습니다. 야당을 지지했던 젊은이들은 꿈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여당을 지지했던 어버이들은 국가의 정체성, 안보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고 안보의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승리로 열광하는 사람들도 실패로 낙망하는 사람들도 모두 치유 받아야 할 시간입니다. 국민들은 곧 새정부에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해 줄 정부도, 정치가도 없습니다.


2012년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심한 공격을 받아 깊은 상처를 남긴 한해였습니다. 희망과 빛, 민족의 길이 되어야 할 연합기관의 지도자들은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타종교와 이단, 엔타이져들, 심지어 언론의 비판과 공격은 극에 달했던 한해였습니다.


차제에 한국교회는 주님의 심장 속에 있는 교회, 성경적인 교회, 본질적인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외침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적으로는 자신감을 잃어버렸고 밖으로부터는 신뢰감을 잃어버렸습니다.


저희교단에서는 ‘작은이들의 벗’이 되어서 우리가 세상을 외면하면 세상이 우리를 외면할 것이다. 우리가 낮은 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희망이 되어보자. 다시 희망이 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세습이라고 일컬어지는 담임목사직, 대물림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고 “리더”들이 먼저 달라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아픔의 땅에 오신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성탄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성탄절 날 천사들은 노래했습니다.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 그 어느 때 보다 평화, 화평, 치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오직 경배받으실 분은 예수님 한분 그분을 경배하는 크리스마스, 성탄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I. 대림의 마음


해마다 12월 25일이 되면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작년에도 12월 25일은 성탄절이었습니다. 금년에도 12월 25일은 성탄절입니다. 아마 내년에도 틀림없이 12월 25일은 성탄절이 될 겁니다. 그리고 성탄절 맞이하고 한주일쯤 지나면 새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도 해마다 같은 사실입니다. 성탄절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고백을 분명히하고 ‘예수님 내곁에 계시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구나’ 이 사실을 확인하고 또 다른 새해를 맞이할 수 있게 된 것, 그리스도인들에겐 멋진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그 예배가 내 생애 마지막 성탄절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가 여러분 생애의 마지막 성탄절이라고 하면 어떤 자세, 어떤 마음의 각오로 이 예배를 드리시렵니까? 


젊은이들에게 크리스마스(X-mas) 이것과 연상되는 단어를 써보시오 그랬더니 리, 카드, 선물교환, 파티, 백화점... 수많은 단어들이 열거되었습니다만 아기예수께 경배, 영광스러운 예배, 임재... 이런 단어를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가 무엇입니까? 종종 영어로 X-mas 적어놓고 무식한 사람들이 엑마스(X-mas) 라고 읽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 X는 영어의 X가 아닙니다. 그것은 헬라어의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약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과 미사라는 말이 합쳐서 된 말인데 예수님께 예배한다 미사드린다 경배한다 그 얘기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경배하는 날, 예수 그분이 우리의 그리스도이심을 백하고 예배하는 날이 크리스마스인 것입니다. 백화점이야 엑스 마스겠지요. 군지 모르지만 엑스 그 양반 때문에 돈 많이 벌어서 기분 좋다. 그러면 엑스 마스가 될 수 있는 거지요. 크리스마스!  예수 그분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고 한번의 성탄절에 생명을 걸었던 동방박사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 성탄절 아침 나신 그분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십니다. 내 자신에게 한번 정직하물어보십시다. “내게는 정직한 구도자의 열정이 있는가? 어떤 대가와 위험을 무릅쓰고 그분에게 경배해야 되겠다는 내 마음속에 뜨거운 불타는 열정이 있는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천사가 나타나 물었습니다. 토마스 그대 소원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대의 소원을 뭐든지 들어주기로 작정하셨다네.  토마스는 울면서 얘기합니다. “오 주님!  주님 한분 만으로 나는 만족합니다. 주님이 내게 계신데 내가 무엇을 소원하리이까? 주님 한분만으로 나는 만족합니다.”


일찍이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


여러분 생애에 오늘 이 시간부터 일주일이 여러분의 마지막 남은 시간이라고 한다면 그 일주일을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데 시간을 보내시겠습니까? 먼길 여행을 떠나시겠습니까? 만나지 못했던 친지들을 만나시겠습니까?


내 생애 마지막 일주일이 내게 주어진다고 하면, 우리는 예수 그분을 만나는 일에, 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에, 내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정말 하나님나와 함께 계셨던가? 내 속에 예수님이 계신가? 내가 살게 될 영원한 천국이 준비되어 있는가? 이것을 위하여 내 생애를 헌신하고 바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 만나는 이 일은 우리가 해야될 많은 여러 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II. 메시야를 기다리던 동방의 박사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가 경배한 사람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마태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경배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낮은 자에게 임하는 복음을 소개하고 싶었던 것 같요. 마태는 상당히 의도적으로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 동방에서 온 박사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복음의 빛이 모든 민족, 온 열방으로 퍼져갈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모든 민족을 구원하여 제자로 삼으라는 마태 결론의 안경을 얻어와서 마태복음 1장 2장을 보아야 마태복음이 보입니다.


오늘 본문만 열린마음으로 차분하게 관찰해 보더라도 여기 동방박사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를 사모하고 기다리던 사람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의 현존왕 헤롯대왕 앞에서 당돌하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가 어디 계시뇨?”라고 묻습니다. 메시야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3장 5절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오실 메시야를 왕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9장 9절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보라! 하나님의 개입, 하나이 간섭해서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실 때에 그 분의 모습이 왕으로 오실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메시야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메시야를 연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를 대망하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 이 한마디만 보다라도 성경을 모르는 인물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연구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생명을 걸고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을 별을 보고 점을 치던 점술가, 무당 전도로 이해했단 말이지요.

No. 점술가는 메시야가 태어났다는 사실에 대하여 목숨을 걸고 달려오겠습니까? 있을 수 없습니다. “그의 별을 보았다” 메시야의 별을 보았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평상시에 늘 보던 별이 아니라 징조로 나타난 별을 본 것입니다.


민수기 24장 17절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니라” 성령의 인도에도 민감한 사람들입니다. 메시야 사상에 대한 깊은 연구하는, 동방의 어느 학파에 속한 인물들이 아닌가?


동방박사들은 징조로 나타난 별의 인도를 따라 동방에서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별따라 왔도다.

별을 따라 왔기 때문에 낮에는 놀아야 됩니다.

밤에 묵상하는 마음으로 별을 바라보고 달려왔어요.


예루살렘까지 도착했어요. 왕이 태어나면 왕궁에서 태어나야 되지요. 예루살렘에 도착하니 왕궁이 보입니다. 밤에 다시 별이 나타날때까지 기다려야 되는데 흥분도 되고 긴장도 풀리고 조급한 마음도 생겼습니다. 순간 잘못된 판단으로 유대인의 왕을 찾아 왔으면 왕궁으로 가보자! 간 곳이 어디로 갔어요? 헤롯 왕궁으로 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좋았는데 이 한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엄청난 어린이 살육극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왔으면 끝까지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순간 사람의 인도를 구해보고자 한 것이 이토록 큰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로 헤롯 궁엔 큰 소동이 일어납니다. 여기 왕이 계신데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니?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묻었더니 기서 유대인의 왕은 바로 그리스도 메시야가 되신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넘어갑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유대인의 왕이 그리스도라면 의심할바 없이 “베들레헴”이다.

미가 5:2 예언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이때 아차 싶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메시야를 연구하던 사람들이 정도를 몰랐을리 없습니다. 몰랐다면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태어날까요?” 장소를 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은 지금 “왕이 어디 계시냐”라고 묻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다시 한번 놀랐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이방인으로서 메시야 탄생에 이만큼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갈망하다가 유대인의 왕을 찾아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달려왔어요. 정작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구약을 줄줄 외우고 있던 사람인데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마태가 본 예수님의 탄생 사건입니다.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이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에 생명을 걸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은 오랜세월 메시야를 기다려 왔지만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관심합니다. 결국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왕궁에서 나와 베들레헴으로 가고 있을 때 9절 그 별이 인도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에게 실망하자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사람의 도움을 포기하자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9절 10절 인도하던 별이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선지라.

“환호하고 별이 멈추어 섰다”고 소리지릅니다. 이때 동방박사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성경은 강조어를 세 번 쓰고 있습니다. 매우 기뻐했다. 크게 기뻐했다. 기뻐하고 기뻐했다. 반복적인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아기 예수님의 별을 보고 2년정도 찾았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네겐 예수 만난 기쁨 이런 기쁨이 있느냐?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동방박사들의 환희와 감격과 기쁨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너는 매우 기뻐하고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고 내가 말씀을 만났을 때에 이런 큰 환희와 감격이 있느냐 하는 것을 암시적으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III. 아기께 경배하고


1. 동방 박사들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가족도 남겨두고, 하던 일 접어두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낮엔 쉬고 밤에 기도하며 걸어 오는 것입니다. 철야기도가 여기서 시작한 것입니다. 한번의 예배에 인생을 걸었던 인물들, 아기예수 한번의 만남에 생명을 걸었던 인물들이 동방의 박사들이었습니다.


2. 한번의 예배에 인생을 걸었던 사람들


초대교회에 크리소스톰 교부가 있습니다. 한 농촌마을에 가서 복음을 전하자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사제가 턱없이 부족하던 때였기 때문에 먼저 예수를 믿은 평신도 한 사람에게 성경을 간단히 가르치고 예배 인도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파송될때까지 예배를 인도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얼마 후에 크리소스톰이 이곳을 방문을 합니다. 놀랍게도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좁은 공간에 모여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농촌마을의 농부들은 토요일 밤이 깊어가는 시간까지 비지땀을 흘리며 일을 했습니다. 한 주간 동안 거두어들인 농산물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예배당 앞에 태산처럼 쌓아놓았습니다. 남루한 옷이지만 그들 집에 있는 가장 좋은 옷을 깨끗하게 빨아 입고 모여 있습니다. 예배 한 시간 전에 모든 사람이 모여서 주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농부 사제의 예배집례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은혜의 물결, 놀라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이 예배가 마쳐진 후 농부사제에게 묻습니다.

“어찌 이토록 은혜스러운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이토록 감격스러운 예배를 본 적이 없다네. 나도 당신과 같은 예배를 드리고 싶으니 내게 안수하게나.”

농부 사제가 말합니다.

“목사님 이런 예배 말고 또 다른 예배가 있습니까?”

“목사님 온 생명을 걸고 준비하는 예배 말고 또 다른 예배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있는 이 예배 말고 또 다른 예배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기록하며 상당히 재미있는 기록을 남깁니다.

11절 전반부에 보면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집에 들어가 보니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걸 보았어요.

그러나 경배는 두 분께가 아니라 아기 예수님께만 경배를 했습니다.


성탄절에 이 세상 인류역사상 가장 존경받아 마땅한 마리아마저도 경배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참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분입니다. 그러나 경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기도의 대상은 아닙니다. 예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마리아를 성모 마리아로 경배하고 그에게 기도하고 찬송한다면 그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때 묻은 신앙의 찌꺼기들을 걷어내야 하는 것이 성탄절입니다. 그 무엇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고 그 무엇도 우리의 소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 계시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예수님이면 모든 것입니다.


IV. 보배합을 열어


11절 후반절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귀하고 비싼 예물을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준비한 예물의 성격, 의미가 놀랍다는 것이지요. 동방박사들은 메시야 신앙이 분명하던 대신학자요 위대한 신앙인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상상의 날개를 펴서 연구해 보니까,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포로로 잡혀 있었어요. 돌아왔음에도 더 많은 디아스포라들이 바벨론과 페르시아에 남아 있었습니다. 남아 있으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부터 메시야 복음, 메시야 약속의 말씀에 관하여 듣고 공부하고 메시야 사상을 연구하던 학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황금은 왕을 상징하는 예물입니다.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 신앙고백입니다. 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황금을 드렸다는 것은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 고백과 함께 경배를 드린 것입니다.


유향을 드렸다는 것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올라가는 향을 얘기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의 감사를 받으시고 우리 전 존재를 받으셔야 될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주인입니다는 고백입니다.


몰약은 장례를 치를 때 방부제겸 향기로 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비하며 니고데모가 예수님 장례를 치를 때 몰약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당신은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실 분이십니다. 동방박사들이 아무런 생각없이 황금 유향 몰약을 가지고 왔을까요? 아닙니다. 메시야가 어떤 분인가에 대한 깊은 연구가 아니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 않았으면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가지고 올 수 없는 것입니다. 바벨론이나 페르시야에서 흔히 쓰던 화폐를 바꿔 달러로 가지고 왔겠지요.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화폐로 바꿔 가는 것은 상식입니다.


시골할아버지가 외국 여행을 가기 위해서 인천공항에 갔습니다.

환전을 하기 위해서 환전소 앞에 서 있는데 환전 해 주는 아가씨가 경상도 아가씨였는가 봅니다.

할아버지 딸라 드릴까 예.

할아버지 당황하셨습니다. 예끼 아가씨.

할아버지 애나 드릴까요?

할아버지 얼굴이 더 빨개지셨습니다. 에이 그러면 못쓰지.

할아버지 원화시잖아요? 그러더랍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와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동방박사들의 깊은 연구와 묵상과 기도와 결정이 아니면 가지고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에 드리는 예물 중 십일조는 황금에 속한다. 당신은 우리의 왕입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감사예물은 성도의 향기입니다. 감사만큼 성도의 아름다운 기도 향기는 없거든요. 유향예물입니다. 몰약은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짤라서 드리는 것입니다. 피가 묻은 예물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예물입니다. 구제헌금, 선교헌금, 건축헌금 등이 있습니다.


예물이 크냐 적으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자원하여 드리느냐? 기쁨의 예물이냐? 어떤 자세, 어떤 의미를 가지고 드리느냐? 빈손들고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은혜의 분량에 따라서 소를 드릴 사람과 양을 드릴 사람과 정히 가난한 과부들은 비둘기를 드려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셨습니다. 내가 주일마다 리는 예물이 빈손의 예물이 아니라 정말 기쁨의 예물, 자원의 예물, 감사의 물, 내 분량에 맞는 예물을 드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배합을 열은 가장 아름다운 사건은 마리아가 향유옥합을 깨고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사건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척이도 기뻐하셨지요. 왜요? 예수님께서는 향유 애호가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향유 냄새를 좋아하신 것이었을까요? 아니요. 그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그의 마음을 그의 헌신을 받으신 것이었죠. 


마리아는 예수믿고 얻은 유익이 무엇일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 주님 그분을 위한 길이라고 하면 나는 어떤 희생도 어떤 대가도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있다. 어리석은 가롯유다는 하늘의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땅의 눈을 가지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면 좋을 뻔 하였다 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이 땅에 가난한 자들과 비교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드릴 수 있는 헌신 가운데 최고의 헌신은 날 위해 피흘려 죽으신 예수 그분을 위한 헌신입니다.


경배후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12절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다른 길을 살았던 사람들, 다른 길로 돌아갔던 사람으로 동방박사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탄절을 기다리며 성탄절을 준비하며 성탄예배를 드리며 한국교회에 요청하는 주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다른 길을 가야 한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본문이 요청합니다. 다른 길로 가라. 다른 삶을 살아라. 지금까지 드려보지 못한 다른 예배를 드려 보아라. 다른 길을 가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세종문화회관에서 「밥퍼 - 밥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 뮤지컬이 공연되어지고 있습니다. 세종문화회관이 기획했습니다. 성탄절에 한국 뮤지컬을 만들어 보자. 기획을 하다 보니 최일도 목사님의 「밥퍼」라는 책을 읽고 불신자의 눈으로 기획했던 사람들도 많은 출연진들도 모두 불신자들입니다. 수녀와 개신교 전도사님의 러브스토리로 이어져 갑니다. 그러나 마지막 청량리 「밥퍼」사역이 소개되어집니다. 「밥퍼」사역을 하는 가운데 절망했던 최일도 목사님의 동지가 나타납니다. 거지왕초가 나타나서 이 사역을 돕습니다. 변화되는 줄 알고 좋아했는데 거지왕초는 술독에 빠져버립니다. 그리고 은혜받고 새로운 삶을 살기위해 도망갔던 윤락녀들이 개처럼 끌려와 목사님 앞에서 몽둥이에 맞아 다리가 부러집니다. 장애인이 됩니다. 밥퍼 공동체는 불에 타고 이 사역은 산산히 부서지기 시작합니다. 사모님과 최목사님은 절망합니다. 몹시도 낙망합니다. 사모님과 목사님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노숙자처럼 길거리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울고 있을때 한 할아버지가 다가옵니다. “이보게 젊은이들 배가 많이 고픈가봐. 잘 곳이 없어? 어쩌다 노숙자가 되었어? 청량리로 가봐. 거기 최일도란 목사님을 만나. 밥 줄 거여. 잠 재워 줄 거여.” 그러며 할아버지가 지나가십니다. 자신들은 절망하고 있는데 이 노숙자들에게 할아버지가 얘기하십니다. 그래서 돌아가자. 목사님과 사모님이 「밥퍼」공동체로 다시 돌아와서 600만 그릇의 밥을 나누는 사역으로 이어진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이번 성탄절, 이제는 갈등의 골이 깊어졌던 모든 것을 치유하고, 세대간 지역간의 모든 갈등들이 평화로 치유되어지고 한국교회 모든 상처가 아물어지고 2013년 새 길을 걸어가는 다른 길을 걸어가는 동방박사의 예배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