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20. 하나님 우리 아버지 누가복음15:11-32
I. 아버지 이야기
어린시절 여러분의 아버지가 집에 오면 행복과 웃음이 가득했습니까?
아니면 웃음이 사라지고 집안의 분위기가 험악하기만 했습니까?
어떤 아버지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과 신앙생활은 대단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 잘 만난 복은 결코 작은 복이 아닙니다.
영철이 친구가 영철이네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영철이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거기 영철이네 집이지요?” “아니다. 내 집이다.”
이런 아빠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집은 곧 내 집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모든 자원, 권세, 축복, 능력... 이 모든 것이 내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가질 수 있는 기적적 축복 중 하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아버지로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역으로, 인간이 가진 저주 가운데 가장 큰 저주는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알면서도 자녀된 권세를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Paul Vitz(폴비츠)의 책 중에 「무신론의 심리학」이란 책이 있습니다.
원제목은 “아버지 부재와 무신론 신앙”인데 부제와 원제목을 바꾸어
“무신론의 심리학”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인류역사상 독한 무신론자들 밑바닥에 “아버지 상처”가 있고 훌륭한 신앙인들의 삶의 바닥엔 아버지 사랑 혹은 아버지를 용서한 치유의 경험이 있더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성경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14번 정도 등장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엔 민족적 차원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한 것이지 개인적 호칭으로 부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엔 4복음서에서만 175회 정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신약에서는 대부분 개인적 호칭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건 혁명적 신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을 불경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단지 아버지가 아니라 “아빠”라고 부르도록 가르칩니다.
이 말은 재미있게도 우리말의 “아빠”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말입니다.
그들의 신(神)을 아빠라고 부르는 경우는 세계 어느 민족 어느 종교에도 없는
우리기독교에만 있는 하나님의 친밀성입니다.
캔트 휴즈 같은 신학자는 예수님께서 일찍이 어린시절 지상의 아버지 요셉을 부르며 따르던 바로 그 “아빠”라는 말로 하나님을 가르쳐 준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빠 아버지라고 할 때 어떤 그림이 머릿속에 지나가십니까?
한자어 어버이 친(親)자는 나무목(木)에 설립(立)을 붙이고 볼견(見)을 옆에 붙이면 어버이 친(親)자가 됩니다. 자녀를 찾기 위해서, 자녀를 보살피기 위해서, 나무 위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고 있는 모습 - 그것이 어버지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 집나간 자식을 기다리며 지붕위에 올라가 긴 목을 뽑아 멀리 살피는 한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가장 긴 비유, 가장 많이 알려진 비유,
듣는 이들에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비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 탕자의 비유로 회개와 전도 메시지를 위해 집나간 자식에게 초점을 맞춰볼 수는 있지만 성경의 본래 의도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리기 위한 비유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본문은 사복음서 가운데 누가에만 기록된 특수 자료입니다. 누가 신학 전체틀에서 본문을 이해해야 합니다. 누가복음의 주제는 “작은 자의 벗되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누가복음 어디에도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죄인을 일컬어 “탕자”라 부른 말이 없습니다. “The Lost” 잃은 자입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이 땅의 죄인들을 향한 아버지 마음이 어떠한가에 대해 알려줍니다. 이 땅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특별히 공동체의 리더들이 어떤 마음으로 교회와 지체들을 섬겨야 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작은 자의 벗으로 살아라, 아버지의 마음으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일컫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일컬어 교장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교회는 학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일컬어 사장님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교회는 회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사는 존재가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축복의 통로가 아버지입니다.
프로이드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떠한가? 내 삶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신관이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루터 신학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진노의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프랑스 역사상 69명의 왕이 집권하는 동안 특별히 백성들로부터 존경받은 세 명의 왕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세 왕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친부모 밑에서 사랑받고 자란 왕이란 것입니다. 그들의 통치 스타일은 한결같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섬기고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무서운 저주가 있다면 아버지 마음을 잃은 사람들이 많아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의 부모가 못나보여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고 느끼시는 분이 있습니까? 가난한 부모를 만났으니 나는 지독히도 불행한 사람이라고 느끼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런 부모 일수록 여러분을 더욱 사랑했을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이철환 씨의 <연탄길>이란 책이 있습니다.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작은 이야기들을 묶은 책입니다. 읽는 이들에게 짠~ 하는 감동을 주는 책인데, 그 가운데 “아버지의 우산”이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린 시절 달동네에 살던 사람이 어른이 되어 회상하는 글입니다.
「아버지는 고물장사를 하며 고생했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푸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철사조각, 유리조각 줍고 신문지나 모아오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마냥 창피하게 여겨졌습니다. 아버지는 다행히 돈을 조금 모아 식당을 차렸지요. 그런데 실패하고 맙니다. 어머니와 우유 배달을 하다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로 부상당해 깁스를 하고 집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천둥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었습니다.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물이 툭툭 튀며 공부를 방해합니다.
짜증스러웠습니다. 물방울을 양동이로 받아도 방바닥엔 물방울이 튑니다. 그때 아버지는 화가 났는지 휑하니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났는데도 아프신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이 골목 저 골목을 찾다가 돌아오는데 지붕위에 시커먼 물체를 발견합니다. 허덕대며 우산을 쓰고 그 아들을 위해서 지붕을 수리하고 우산을 받쳐들고 있는 아버지, 비를 맞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합니다.
그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이는 눈물을 짖습니다.
이게 아빠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II. 아버지 상처
저는 어른이 되어서 내게 아버지가 없었다는 것이 제 인생에 얼마나 커다란 손실이었는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또 제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늘 계셨다는 것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를 알고 한없이 감사를 했습니다. 또 제 주변에 여러 사람들을 보면서 아버지가 없는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잘못된 아버지를 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육신의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데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늘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교회에 충성을 하는 것도 은혜에 감사 해서가 아니라 버림받지 않기 위해 하는 율법이 됩니다. 여러분 중에 “너 자꾸 그러면 갖다 버린다”는 부모의 협박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린시절 어둡고 무서운 바깥에 혼자 버림받아 서 있던 기억이 있습니까? 아마 그 상처는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데 커다란 방해의 기억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찌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들이 그뿐이겠습니까? 이 땅의 가정과 사람이 다양하듯 상처 또한 각양 각색 다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얻고 싶다면 그 육신의 아버지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도 할아버지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고 축복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한번도 “아들아, 사랑한다, 딸아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데 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날마다 나를 향해 “사랑한다, 사랑스럽다” 말씀하십니다. 오늘 육신의 아버지를 용서하고 아버지 상처를 치료받고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기는 복을 모두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빠 아버지이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용납해 주지 않아도,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아도, 사람들이 나를 위로해 주지 않아도 우리에겐 부족함이 없습니다. 왜요? 나는 가장 넉넉한 위로를 받고 살며, 가장 넉넉한 이해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남이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해 주는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왜요? 이미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 삶의 전환점이 옵니다. 이것이 아버지 마음을 얻은 복입니다.
한 학교에 말버릇이 좋지 않은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말끝마다 “제기랄”이 붙어다닙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학생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대뜸 어머니하는 말 “제기랄, 그놈이 무슨 짓을 했어요?”
그래서 심리학자 셀(Sell)은 “우리 몸은 우리 부모 곁을 떠나지만 우리의 부모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고,
사티어(Satir)라는 사람은 “가정은 사람을 만드는 공장이다.
건강한 가정에서 자존감 높은 건강한 자녀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본 대로 살아간다는 거지요. 그가 어릴 때 자라면서 어떤 말을 들었느냐 하는 것이 그 인생의 미래를 열어 가더라는 것입니다.
일찌기 시인 워즈워드는 “모든 아이는 어른들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왔던 삶의 스타일은 자녀들에게 그대로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우리가 경험했던 모든 삶의 영향력은 어른이 되더라도 쉽게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세 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영향력을 가리켜서 심리학자들은 “성인 아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휴 미실다인(Hugh Missildine)이라는 사람이 「몸에 밴 어린 시절」이란 책에서 처음 사용함으로 이제는 보편적인 용어가 되었습니다.
창조적이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가장 소중한 열쇠가 있다면 불행한 과거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내 속에 잠재하고 있는 성인 아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고 받아 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찍 아버지를 여윈 저는, 할머니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할머니의 막내 아드님이셨고, 그 막내아들이 6.25의 상처로 일찍 당신 곁을 떠나자 불쌍하게 이 세상에 남게 된 내가 가여워서였든지 예뻐서였든지 할머니의 많은 손자 손녀들 가운데 내게 정말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명절날 생선의 가운데 토막을 뚝 짤라 당신의 몫이라고 챙겨두었다가 나를 몰래 할머니 방으로 불러 먹여 주시곤 했습니다.
더구나 내 어머니에게 있어서 “나”라는 존재는 어머니의 전부였습니다.
단 한 번도 내 요구를 거절하신 적이 없고, 나를 나무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이에 나는 철없는 아이가 되어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남들에게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 만이 내 마음은 평안해졌습니다. 이것이 나의 못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성인 아이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면서 나를 많이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도 늘 나는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었고, 교회에서도 교역자들과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초등학교 한 담임 선생님만은 나를 평범하게 대했습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동안 나는 그 분을 나쁜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고 살았고, 어른이 된 나중까지 용서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혼생활에서도 나의 이 성인 아이는 때로 나를 괴롭혀 왔습니다.
한 번은 생선찌개를 끓였는데 아내는 아이들에게 먼저 퍼 주는 것이었습니다.
차마 입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이 얘기를 기억하는 것을 보면 그때 적잖은 충격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어느덧 중년이 되었고, 이제는 어디가나 씨니어로서의 대우를 받고,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갖기보다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또 많은 교우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2등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기도를 해야 했으며, 우주의 중심이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아 가기까지는 퍽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눈물의 기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요즘 자라는 자녀들 가운데 이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인 아이의 얼굴을 하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독자는 독자라는 것 하나만으로 정신병자다”하는 심리학의 말이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너무 귀하다 보니 이기적인 성인아이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는 얘기지요. 특별히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III. 아버지 상처 치유
1. 과거를 치유해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내 몸에 밴 잘못된 성품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성인아이를 치료하고 진정한 아버지로, 성숙한 성품으로, 아버지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요? 먼저 과거를 치유해야 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과거를 괴로워한다고 과거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 아니라고 하는 것이지요. 용서하는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조금씩 배워가야 할 필요가 있고, 우리가 온전히 배우기까지는 많은 갈등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용서를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미워하다 보면 옛날의 상처를 자꾸 생각하다 그 상처가 쓴 뿌리가 되어서, 낮이나 밤이나 먹을 때나 일할 때나 놀 때나 꿈속에서까지 나를 괴롭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우리는 친구를 위해서는 시간을 내지 못하면서도 원수를 묵상하고 상처를 기억하고 더듬는 시간에는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고 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 과거의 상처를 깨끗이 처리해 버렸습니까? 여러분 속에 있는 부정적인 영향력을 깨끗이 처리해 버리고 아버지 마음을 회복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당신으로부터 아버지마음을 빼앗아간 모든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면서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내 부모가 의도적으로 내게 상처를 준 것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무지해서 내게 쌓아왔던 저주의 흔적들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2. 지금 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 들이십시오.
오늘의 내가 이렇게 상처를 안고 못난 성인 아이의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 부모의 영향인 것만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내가 잘못 처리하고, 잘못 수용하고, 잘못 반응했던 내 책임과 죄를 주님 앞에 인정하고 고백하십시요.
예레미야 31:29-30에 보면 퍽 재미있는 성경 구절이 나옵니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말라”
즉, 내 이가 시린 것은 아버지가 먹었던 신 포도를 나도 먹었기 때문에 신 것이지, 나는 안 먹고 아버지만 먹었는데 자동적으로 내 이도 시린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부모의 영향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 이대로를 주님 앞에 인정하고 나의 잘못과 책임을 고백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자리잡게 된 것 여기에는 내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3. 내가 받은 상처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성숙의 기회로 삼으십시오.
실패나 상처는 내 인생에 커다란 재산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연약한 존재이고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주님은 나에게 더 가까이 오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병든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상처난 사람을 부르러 왔다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막2:17)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약점을 내 인생의 승리의 디딤돌로 삼고 살아가라는 얘기지요.
4. 예수님을 묵상함으로 예수님을 닮고,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성인아이를 치유하고 극복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한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그 사람과 똑같아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면 거기에 집중의 힘이 쏠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자꾸 미워하는 사람을 묵상하게 되면 나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그 사람에게 자꾸 빼앗깁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자꾸 흡수하게 되는 것이지요. 계속 그 사람을 생각하고 묵상하게 되다보면 아침부터 밤까지 그 사람의 영상에서부터 자유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그 사람만 생각나고 주야로 그 사람만 묵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때문에 이제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나를 위해서 내게 상처를 준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특별히 여러분 주변에 가까운 사람, 배우자와 여러분의 부모와 자녀를 용서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조상과 여러분의 목회자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여러분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원수를 생각하던 시간에 예수님을 묵상하십시오. 용서할 수 없는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가지고 예수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예수가 누구입니까? 우리의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아픔과 상처를 짊어지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느니라.”(베드로전서 2:24)
이제 예수 이름의 권세로 성인 아이뿐만 아니고 모든 저주가 물러갔음을 선포하십시오. 주의 보혈의 능력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 하리라. 할렐루야!
과거에 묶여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미 주님께서 여러분의 죄의 짐을 다 짊어지셨고, 여러분의 상처를, 모든 저주의 짐을 주님께서 짊어지셨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미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해방을 선언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묶어 놓고 살아가면 하늘에서도 묶여진 상태로 있으리라. 그러나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이 모든 저주의 짐들이 풀어지게 될 것이라.
첫 얘기를 낳아 길러본 얘기 엄마들이 친정 어머니에게 전화 걸어 하는 말이 있지요? “엄마, 내가 애낳아 길러 보니 엄마 맘 알겠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요. 아버지 마음을 배우고 나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자식 키우는 부모를 보십시요. 그토록 손해보는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그 많은 시간, 그 많은 정성, 그 많은 돈을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보상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마음입니다.
들은 얘기입니다.
이북에서 피난 나와서 알뜰하게 재산을 모아 자수 성가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권사님은 큰 빌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있는 자식이 성장하면서 사업을 한다고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합니다. 몇 번 어머니가 안된다고 해도 빌딩이 있는 것을 아니까 막무가내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할 수 없이 사업 자금을 만들어 주었는데 사업이 잘못되어서 마침내 빌딩까지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그 자식이 하는 사업이 안될 것 모르셨습니까?” “알았지요.” “그런데 왜 돈을 만들어 주셨습니까?” “왜 빌딩 팔도록 허락해 주었습니까?” “줘야지요. 안 주면 원수가 되니까요. 망할 것 알면서도, 망해서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 보면 그 자식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그 자식은 나를 빌딩 주인으로밖에 안 보였습니다. 돈 많은 과부로 밖에 안 보였습니다.
그런데 빌딩 다 팔아 치우고 나니 이제는 그 자식이 아들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그 아들 나를 어머니로 받아 준 것입니다. 나는 재산 잃고 아들을 얻었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이요 하늘이 준 마음 아니겠습니까?
IV. 아버지 마음 : 영혼의 안식처
저는 어릴때 개구장이였습니다. 소 먹이러 산에 올라갔다가 기마전을 합니다. 제가 대왕마를 타고 올라서서 기마전을 하다가 땅에 굴러 떨어졌습니다. 팔이 뚝 부러졌지요. 울고 집에 내려왔는데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래야 쑥쑥 자란다. 팔 부러지고 나면 더 튼튼해 진다.” 어머니가 얼마나 잔인하게 여겨졌는지. 치료를 마치고 그날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어머니는 내 팔 붙들고 흐느껴 웁니다. 조용히 눈을 뜨고 보니 어머니는 벽을 향하여 나 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내 어머니의 마음이요 내 아버지 마음이었습니다.
우리 아빠 하나님은 우리가 아파하는 그 자리, 울고 있는 그 자리에 계십니다.
오래전 “가이드 포스트”라는 작은 잡지에 실린 얘기입니다.
전쟁포로로 잡힌 남편이 고통스런 처지를 편지에 담아 집으로 보내왔습니다. 8살 아들이 가정을 그려오라는 숙제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는 아빠를 그렸습니다. 엄마는 이 그림을 보고 왈칵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때 8살 아들이 말합니다.
“엄마, 왜 울어. 잘 봐. 아빠곁에 하나님이 계시잖아?”
울고 있는 당신 곁에 오늘도 아빠 아버지 우리 하나님이 계십니다.
왜 우세요? 당신 곁에 아빠 아버지가 계신데.
왜 힘들어 하세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빠인데.
하나님 우리 아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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