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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유영모목사

13. 2. 10. 나의 하나님, 내가 하나님? 출 20:1-6

13. 2. 10.         나의 하나님, 내가 하나님?      출 20:1-6


힌두교 한 승려가 조그마한 개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얼음은 겨울이었습니다. 첫 발을 내디디자 발이 쭉 미끄러집니다. 엄마를 찾았습니다. 가운데 쯤 왔을 때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껴졌습니다. 아버지를 찾더랍니다. 얼음이 왕창 깨지면서 강물에 풍덩빠지니까 아이쿠 하나님 그러더랍니다.


인간에겐 하나님을 찾는 본능이 있습니다. 전도서 3장 11절에 “...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얘기합니다. 배고픈 아이가 밥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말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밥을 훔쳐 먹어서는 안된다.’ 하는 것이 법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짝퉁 하나님을 찾아서는 안된다. 그러면 그것이 우상숭배다.’ 그런 뜻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나의 하나님 내가 하나님?」 궁하면 나의 하나님 부하면 내가 하나님. 필요하면 나의 하나님 필요가 없어지면 내가 하나님 아닌가? 하는 겁니다.


지난달 11일 AFP통신이 퓨리쳐치센터가 전 세계 종교인구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인들이 22억 32%에 달합니다. 그리고 16억 명의 신도를 가지고 있는 이슬람이 두 번째 많습니다. 인도를 중심으로 힌두교신자가 약10억 명 정도입니다. 불교신자는 5억,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1,400만 정도 됩니다. 전 세계 토속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10억 정도 되는 것으로 발표되어졌습니다. 우리기독교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지요.


포스트모던시대 종교다원주의 시대는 서로 종교를 특별히 다른 종교를 기독교가 인정해야 된다는 사상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종교로 인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좋은데, 그 종교의 신을 인정해야 된다는 것이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많은 종교 연구가들이 지금까지 기독교를 이끌어 왔던 유일신 패러다임의 효과가 끝났다고 말합니다.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의 유일성이 설득력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책을 보니까 이런 얘기가 있더라구요.

한 주인이 종을 데리고 밤 낚시를 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피곤해서 종에게 저 별을 향하여 계속해서 노를 저어가거라. 북극성이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주인을 깨웁니다.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께서 가르쳐 주신 별을 지났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됩니까?

우스갯소리입니다. 거짓말입니다.


바다에서 아무리 영원토록 노를 저어가도 별은 우리 앞에 있습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변하지 않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섬겨야 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신구약 66권 말씀은 영원히 변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십계명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이란 말은 없습니다. 그냥 십계 혹은 열 마디 말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이 십계명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말씀입니다. 직접 돌판에 기록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존중히 여기고 지키면 천대 만대에 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짓밟고 거역하고 살면 저주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두 번째 취임식을 마쳤습니다. 취임식에 아브라함이 읽던 성경책, 마틴루터 킹 목사님이 읽던 성경책을 펼쳐놓고 그 위에 손을 얹어 선서를 했습니다. 미국의 화폐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대법원 법정에는 모세의 십계명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미국이 아직도 초강대국, 최대 일류 국가로 살아남은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기독교 안에 율법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이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율법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이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애굽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지켜야 될 말씀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구속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류는 이미 율법을 파괴한 범법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반대로 율법은 필요 없는 것이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무율법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잘못된 신학사상입니다.


심지어 복음주의자들 가운들에서도 구약은 율법이요 신약은 복음이라고 구분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 얻는 율법신앙이요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야 구원 얻는 복음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또한 율법을 지켜서 출애굽을 경험하고 구속 얻은 것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책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울타리와 같은 것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우리는 죄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구나. 예수 외에는 우리가 구원 얻을 수 있는 어떤 길이 없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율법 중에 율법, 대왕의 계명은 첫 번째 계명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

히브리말로 “나 외에는” 알파나이. 알 - 내 앞에서, 파나이 - 얼굴입니다. 알파나이 - 내 얼굴 앞에서입니다. 라틴어 번역에서는 코람메오. 내 앞에서라고 번역을 했고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는 프랜에무 - 나를 제외하고서 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너희가 구원 얻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너와 나 사이, 내 면전에 우리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간음이다.’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짝퉁과 진품 가방을 구별하는 법을 아시지요. 여성분들은 다 압니다.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집니다. 가방을 머리에 이면 짝퉁입니다. 가방을 숨으면 진품인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더 중요한 것,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보다 우선되는 것이 있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 피하는 짝퉁 정도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한 지성인이 퍽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섬긴다!’ 하나님은 경배의 대상이고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내 축복의 수단으로 안고 살아가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해야 되는데 하나님을 자기 구미에 맞게끔 자기 필요에 맞게끔 조종하면서 살려고 하는 것 – 그것은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모시고 산다는 역설적인 얘기는 진리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상” 그랬을 때에 징그러운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상”은 매력이 있고 달콤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목민이었습니다. 유목민 생활이라는 게 뻔한 것입니다. 풀 뜯어 먹고 양젖 짜먹고 사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광야를 여행 할 때는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매일 만나입니다. 만나로 요리해도 만나밥, 만나죽, 만나칼국수, 만나빵, 만나생식... 만나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고기에 포도주를 곁들여 올리브와 먹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동안 옷 한 벌로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니 이 백성들은 비단옷을 입고 사는 겁니다. 광야에서 여행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율법 공부하고 양 잡아서 제사 드리는 게 전부였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더니 똑같은 제사인데 차원이 다릅니다. 술이 있고 춤이 있고 노래가 있고 여사제들이 제사지내는 남정네들과 밤새도록 놀아줍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태워서 진멸해 버리라는 겁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꾀를 냅니다. 주일날은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를 드립니다. 평상시에는 바알신을 섬깁니다. 재미있거든요. 정착민으로 농사를 지어야 되는데 바알우상 앞에 농사짓는 기술까지 있습니다. 성공하려고 하면 바알신을 섬기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인데 저것들보다 잘 살아야지, 더 재미있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언뜩 지나갑니다. 혼합주의 신앙이 되고 만 것입니다.


주일엔 예배를 잘 드립니다. 그런데 밖에 나가서 장사하고 사업하고 직장생활하고 친구 만날 때는 세상 사람하고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똑같이 살아갑니다. 바알신을 섬기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일날에만 만나면 됩니다. 이게 바알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금년에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새로운 만남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였습니까? 천지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였습니다. 그분은 엘샤다이 전능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사랑방에 갇혀 나와는 상관없는 분이 아니고 아빠 아버지이셨습니다. 그분은 생명과 시간과 물질과 은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오늘 말씀이 무슨 말씀일까요? 바로 그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우선되는 것 없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엇이 끼어들어도 안된다. 우리가 하나님 외에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겠다. 이 말씀이 오늘 나의 하나님이라는 설교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오늘 신앙인들의 바알이 무엇일까요? 우상숭배가 무엇일까요?


세속도시의 저자 하비 콕스가 저희들 신학교 다닐 때에 한국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 당시는 공산권과 자유진영이 이데올로기 전쟁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분의 얘기가 “지금은 이데올로기가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신이지만 깜짝 놀라만한 시간에 이데올로기는 끝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신이 지구촌을 뒤덮게 될 것인데 바로 경제신, 물질신이 지구촌을 덮게 될 것이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분이 한국을 떠나고 난 다음에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공산주의 종주국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돈, 경제, 시장논리가 지구촌의 신으로 바뀌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경제적 이익이 생기면 어제의 적도 오늘의 친구가 됩니다. 경제적 이익이 없으면 어제의 친구도 오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경제적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됩니다.


국가 간 전쟁은 지금은 경제 전쟁, 돈 전쟁만 남아 있습니다. 돈이 주는 가치가 무엇일까요? 편리라는 가치입니다. 안일, 안락이라는 신입니다. 모든 과학의 개발은 좀 더 편리, 좀 더 안일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힙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는데 술맡은 관원장, 떡맡은 관원장을 만납니다. 요셉이 가지고 있는 학위가 하나 있었습니다. 해몽학 박사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두 장관이 꿈을 꾸고 요셉의 인도를 따라 떡맡은 관원장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술맡은 관원장은 풀려납니다.  이때 요셉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밖에 나가면 나를 기억해 달라고. 죄없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는 불쌍한 청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달라고. 그런데 그가 나가자 마자 요셉을 잊었더라.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창40:23)

이렇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안일과 편리가 최고의 가치라면 하나님은 아니 계신 것입니다.

요셉은 한없이 억울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좀 더 긴 시간동안 감옥에서 고생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왜요? 요셉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고생을 해야 합니다. 바로가 꿈을 꾸어서 바로의 멘토로 총리대신으로 부름을 받을 때까지 고난을 겪는 것입니다. 목적을 이룰 때까지 비전을 이룰 때까지 때로는 고난과 시련이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가치입니다.


만약에 술 맡은 관원장이 이것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면 임금과 술상을 마주하는 자리에서 임금께 그렇게 얘기했겠지요. 폐하 제가 감옥에 있을 때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젊은이 하나가 있었는데 요셉이란 젊은이입니다. 그를 좀 살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임금이 뭐라 했을까요? 아 그건 장관이 알아서 해. 그럼 그 다음날 가서 요셉을 끄집어내 주었겠지요. 요셉아 네 소원이 무엇이냐?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것이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싶습니다.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요셉에게 나귀에 쌀 좀 실어서 보냈을 것입니다.

“쌀 싣고 아버지한테 돌아오면 뭐하노?” “기분 좋다고 쌀 밥 해먹었겠지.”

“쌀 밥만 해 먹으면 뭐하노?” “기분 좋다고 소고기 구워서 먹었겠지.”

여러분 기분 좋다고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편리가 우상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기 원하면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대로 살기 원하면 때로 손해 보는 것을 각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부를 누리려면 건강의 신이 있어야 됩니다. 건강은 귀중한 것이고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지만 건강 챙긴다고 주일 예배 빼먹고 골프장 들락거리고 웰빙음식 찾아서 만난 음식 찾아서 삼천리를 헤매면서도 셀모임은 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 치고 건강한 사람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경제가 주는 또 다른 가치가 있습니다. 재미가 있습니다. 쾌락의 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기쁨을 누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전도서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너의 가족 안에서 자녀들과 부모와 아내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라’입니다.

쾌락의 신을 섬기고 살아가는 사람은, 마치 목마른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더 깊은 갈증을 느끼는 것처럼 더 깊은 자극에 빠져들 뿐입니다.


지금 오늘 이 시대에 최고의 무신론자는 리처드 도킨슨이라는 사람입니다. 그의 무신론 운동이 영국을 뛰어 넘어서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과 캐나다까지 온 서구 사회에 번져가고 있습니다. 서구 사회에 달리는 버스에 한결 같이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아마 하나님은 아니 계신 것 같다. 걱정을 멈추어라. 그리고 네 마음껏 네 인생을 즐겨라.’


이 캣츠프레이즈 속에는 무서운 것이 숨어 있습니다. 죄를 지으며 하나님 때문에 불안해하는 무신론자들의 마음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 없이 죄지으며 즐기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쾌락의 신을 섬기는 서구사회의 문화가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인기의 신을 섬깁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지요. 사랑받고 살아가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뭐라고 얘기했나가 아니라 ‘의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니...’ 시편23편입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입니다.


세상의 인기라고 하는 것은 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허망한 것입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어떤 직종보다도 인기를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살율이 가장 높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하나님의 명령, 보이지 않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너와 나 사이에 우상이 있어서는 안된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원시인들은 원시인처럼 우상을 만듭니다. 지성인들은 현대인들은 지성인처럼 현대인처럼 우상을 만들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기듯이 놋뱀을 섬기듯이 부적이 너를 보호하고 구원해 주고 치료해 주고 성공해 줄 것처럼 또 조상님들이 복을 주는 줄 알고 조상을 귀신으로 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상은 귀신이 아닙니다. 조상을 조상으로 섬겨야 됩니다. 귀신으로 섬기는 것은 가장 나쁜 불효입니다.


이 말이 상징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상징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들마다 십자가가 세워져 있습니다. 또한 건물의 십자가 세워지면 아 예배당이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저기에 모이는 구나. 세상에 알리는 겁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에 물로 세례를 줍니다. 물이 좋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 가운데 가장 눈에 보이는 말씀이 성찬예식입니다. 그리고 세례예식입니다. 물을 쓰지만 물이 좋아서 구원받는 것 아니거든요. 빵이 맛있어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포도주가 좋아야 되는 것 아닙니다. 거기에 약속이 있고 그 속에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상징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상징을 섬기면 그것이 우상이 됩니다. 목에 십자가를 장식물로 가지고 다니면서 우리가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목에 가지고 다녀야만 교통사고도 안 나고 병도 안 걸리고 세상에 다니면서 성공한다. 그래서 목에 달고 다니면 그 십자가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목에 십자가를 가지고 다니길래 그 십자가는 목에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고 등에 짊어 지는 거야. 그랬더니 목사님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뛰어 다니면 십자가가 등 뒤로 가요. 그러더랍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살겠다는 결단.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 하나님이나 신앙을 주제로 한 그림 조각 영화 건축 등 예술작품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술, 문화를 소중히 여깁니다.


출애굽기 3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 예술적인 기능을 주십니다. 성령을 부어주셔서 음악을 잘하는 사람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 조각을 잘 하는 사람들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그런 재능을 받으신 분이 계시면 위축되지 마시고 여러분의 재능을 통하여 그림과 조각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독교적인 가치를 마음껏 표현하면서 인생을 풍요롭게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훌륭한 분들의 업적을 새기기 위해서 동상을 세우는 일들은 갈림길입니다. 뜻을 기리기 위해서 동상을 세우는 것은 얼마든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동상이 복을 주는 줄 알고 섬기기 위해서 상을 만든다면 없애버려야 될 우상입니다.


광화문에 세종대왕 우상이 있다. 이순신 우상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요. 장로회신학대학교에 마펫 우상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기철 우상이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거기에 복을 빌고 있다면 그것은 우상으로 이미 전락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경직된 제사관이 오늘 한국 사회 속에서 선교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라고 주장하며 제사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날 가족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조상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모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중한 자녀들을 우리 가정에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을 주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가문에 흘러내려오는 가훈이나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주고 싶은 교훈을 되새김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부모님께 절을 하는 것입니다. 세배입니다.

온 가족이 행복하게 식사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명절에 가지는 추도예식의 대략적인 순서입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섬기면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면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5-6) 오늘 결론 5-6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어서 어떤 분들은 예수를 믿어도 조상의 죄가 삼사 대를 흐르는 가계의 저주가 있으니 가계의 저주를 끊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가정에 조금 어려움이 있으면 아버지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에게도 그런 이상한 징조가 있으면 저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불안에 떨고 있는 것입니다.


욥기서를 공부하면서 새벽 월삭예배 때에 보응론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지은 죄를 회개합니다. 회개했지만 죄 값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응론이지요. 죄 짓고 회개한 사람들이 혹시 저주받은 것이 아닌가? 두려움에 떨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 어디를 보아도 어떤 신학사상을 모아도 단언적으로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계의 저주 없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옮겨졌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회개한 사람들이 죄 값을 받는 것 보응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계의 저주 없습니다. 보응 떠났습니다.


이 말씀에 진정한 뜻은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있는 것입니다. 삼 사대와 천대를 대비 시켜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잘못하고 실수하여 큰 경제적인 손실을 입었을 때에 그 자식들과 손자까지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잘 섬긴 복, 하나님께 충성하고 헌신했던 복, 예수 잘 믿은 복, 천대까지 무궁하게 풍성하게 흘러 흘러 갈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풍성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천대까지 자손들이 복을 받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결단하십시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불순물 끼어들지 않게 할 것이다.

하나님만이 오직 살아계신 신이시다. 나는 그분만을 믿는다.


원정하 선교사의 9월 9일을 기억하라는 명강의를 기억하십니까?

북한 땅에 공산당이 들어선 9월 9일, 북한 땅에는 모든 교회들이 문을 닫고 불타고 없어진 9월 9일을 기억하라. 이 아픔의 시작이 1938년 9월 9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민족사 신앙사에 씻을 수 없는 우상숭배를 한 결정이었습니다. 전국의 목사 장로 193명의 총대들이 모여서 97명의 일제사복경찰관들의 협박아래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처럼 국가의 예식에 불과한 것이라고 결정을 내리고 모두다 그들이 신사에 나가서 절을 했던 사건입니다. 우리 사회 속에 한국교회에 아직도 우상숭배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9월 9일은 저희교회에서 본 교단 101회 총회가 열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로 잘 준비하고 진행하는 27차 9월 9일일 평양 땅에서 있었던 수치스러웠던 결과가 2013년 101차 본 교단 총회 한소망총회에서 순결하게 거룩하게 씻겨져 한국교회가 새로워지는 은혜가 바로 이 자리에서 있기를 축복하고 기대하고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기철목사님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감옥에 갇힙니다. 온갖 고난과 핍박을 당합니다. 몇 날 며칠 밥 한끼 입에 넣지 못하도록 굶기고 난 다음에 두 손을 등 뒤로 묶었습니다. 조그마하고 나지막한 상에 만난 식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먹으라고 갖다 줍니다. 입으로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먹으려고 보니까 상 앞에 보자기로 덮여 있습니다. 발로 걷어보았더니 신사가 그 속에 숨어 있습니다. 밥을 먹기 위해서 고개를 숙였다가는 신사에 절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고픈 배를 움켜쥐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모든 성도들을 경찰서 마당으로 끌고 나와 무릎을 꿇게 하고 주기철 목사님을 끌고 나왔습니다. 앞에는 널빤지 길이 널려 있었고 크고 작은 못들이 송판에 박혀있었습니다. 거기에 모인 성도들을 협박합니다. 여기 있는 신사에 절하지 않으면 너희 목사가 이 송판 못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어떡하겠느냐? 주기철 목사님이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 목사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하나님을 배신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신사에 절을 하고 나를 살리는 길은 나를 돕는 길이 아니라 나를 죽이는 길입니다. 한국교회 죽이는 일입니다. 제가 걷지요. 걷지요. 맨발로 못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한발을 내딛자 못이 푸욱 발을 찔러 오르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 발을 디디자 못이 빠지지 않습니다. 겨우 흔들흔들 못을 빼자 핏줄기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송판 길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이 성도들은 하늘을 향하여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손에 손을 붙들고 어깨동무를 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 서쪽하늘 붉은 노을 영문밖에 비치누나

연약하온 두 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


한발 자욱 두발 자욱 걸어가신 자욱마다

뜨거운 눈물 붉은 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눈물 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우리는 하나님 만 섬기겠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겠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