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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서강해/제22강 환난중에서 즐거워하나니(5:3-4)

제22강 환난중에서 즐거워하나니(5:3-4)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난 주일 우리들에게 세 가지로 일깨워주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으로 더불어서 화평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난 뒤에 그 관계가 완전히 바뀌어 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 다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으로 더불어서 화평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에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에 쫒겨났습니다. 마찬가지로 과거에 우리 인류는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매일매일 오늘도 내일도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롬 3:23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모든 사람의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과거에 우리는 죄 때문에 감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장차 우리들에게 나타날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영광을 소망 가운데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저와 여러분이 매일매일 주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들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이 세 가지의 복을 이야기하고 난 뒤에 오늘 본문 3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3절에 무슨 말씀으로 시작을 합니까? "다만 이뿐 아니라." 무슨 말씀이겠어요? 또 할 말이 더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사도 바울이 앞으로 하고자 하는 말이 더 절실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환난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해서 우리 앞에 있는 환난이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새로운 종류의 환난과 핍박이 우리 앞에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환경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환난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뀌어지는지 한번 보십시다. 다시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두려워하나니? 환난 중에도 고통스러워 하다니? 괴로워하나니?라고 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환난 자체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환난이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괴롭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환난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이런 변화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예수 믿는 재미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꼭 붙드시고,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 어떠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를 깨닫고 바울처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높은 신앙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가 어떻게 환난 속에서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까?

방금 말씀드렸지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환난 그 자체만 바라봅니다. 그러니 괴로워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보세요. 3∼4절 말씀을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마지막 부분에 이루는 줄 뭐함이로다라고 했습니까? "앎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아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의 의미를 압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환난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환난이 주는 유익을 알지 못합니다. 환난 그 자체를 바라보지만,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들은 환난 너머에 있는 소망을 바라봅니다. 환난 넘어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다.
자 보세요. 환난은 무엇을 낳는다고 했습니까? 인내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의 경주장에서 달음박질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군병들입니다. 십자가의 군사들입니다. 싸우는 군사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인내가 아닙니까? 인내 없는 사람 무슨 짝에 쓸모가 있겠습니까? 그저 적은 일에도 쉽게 주저앉아 버리는 사람은 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용사 된 우리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여자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군대에 가면 남자들 얼마나 혹독하게 훈련을 받는지 모릅니다. 인내심을 기르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제가 어디 출신입니까? 해병대 출신입니다. 저는 소위 계급장을 달기 위해서 18주 동안 아주 강인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18주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훈련받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길고 지루한지 모릅니다. 그때 제게 한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딱 한 가지의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든지 제가 죽지만 않고 살아남게 해주시옵소서." 저는 죽을 줄 알았어요. 그 정도로 심하게 훈련을 시킵니다.
해병대 훈련을 제가 다 여기서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요약을 해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안 먹이는 것입니다. 둘째는 재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우선 먹이지 않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식탁에 다 앉습니다. 그리고 훈련시키는 구대장이 "식사 시작!"하고 구령을 겁니다. 그러면 모두가 있는 소리, 없는 소리 악을 바락바락 쓰면서 구호를 외쳐야 합니다. 무슨 구호를 외치느냐 하면 "감사히 먹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소리가 작으면 그 구대장이 너희들은 소리가 적기 때문에 밥먹을 가치조차 없는 존재라고 하면서 밥을 못 먹게 합니다. 그러니까 밥 한숟갈 떠먹기 위해서 "감사히 먹겠습니다"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그런데 구호와 동시에 숟가락으로 밥을 딱 뜨면 구대장이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든지 "식사 끝!"이라고 합니다. 한 숟갈도 못 먹는 거에요. 밥 먹을 때 눈초리가 밑으로 떨어지면, 밑을 쳐다보면 밥먹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직각으로 식사를 해야 하는데 조금 비뚤어졌던지 하면 무조건 식사 끝입니다. 그러면 밥을 먹으려고 하다가도 놓아야 합니다. 안 놓으면 얻어 터지니까요. 한 숟가락도 못 먹고 나서놓고는 또 무엇이라고 구호를 외치는 줄 아세요? "감사히 먹었습니다." 한 숟갈도 못 먹고 감사히 먹었다고 외쳐야 합니다. 그것이 해병대 훈련입니다. 그 18주 중간에 지옥주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지옥과 같은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밥 한 숟갈 못 먹고 견디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잠 안재우는 훈련입니다. 낮에는 책가방을 끼고서 점잖게 교실에 가서 강의를 듣습니다. 전술학도 배우고 참 신사적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밤에 이루어닙니다. 밤에 잠이 들려고 하면, 하루도 빠짐이 없어요. 18주 동안 계속되는 것입니다. "비상!" 그래서 팬티 바람으로 나와서 그 추운 날 맨발로 연병장 자갈 위를 뛰어다니고, 옷 벗은 몸으로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릅니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그런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훈련은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야구방망이를 가지고 밤마다 팹니다. 패는 이유가 있어요. 그래야 다른 잡생각을 하지 않고, 또 장교가 그와같은 강인한 훈련을 받아야 나중에 사병들의 군기를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맞은 만큼 나중에 장교생활하면서 다 갚았습니다. 얼마나 두들겨 팼는지 몰라요. 제가 겉으로는 순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제가 살아남기 위해서 그때는 안 그러면 안되었습니다. 그때는 훈련시키는 구대장들이 얼마나 미웠는지 몰라요. "야 저게 도대체 인간들이야. 도대체 우리와 무슨 철천지 원수를 졌다고 우리를 이렇게 죽이려고 하나?" 그런 원망이 들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생각하니까 저희들을 훈련시켜 준 그 구대장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내가 그때 좀더 센 훈련을 받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 뒤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또 신학을 하고, 목회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이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때 생각을 합니다. "그때는 내가 인간 이하의 모욕을 받으면서도 다 참았는데."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 하는 고생은 다 참을 수 있는 고생들입니다. 그때는 정말 참기 어려운 고생도 다 참았습니다. 그때 생각하면서 다 참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환난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 같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인내심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때로는 환난을 허락하실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인내는 무엇을 낳는다고 했습니까? 연단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쇠붙이를 단련할 때 보세요. 불 속에 집어넣지 않습니까? 벌겋게 달구워집니다. 그것으로 끝이 납니까? 그것을 꺼내서 쇠망치로 이리 치고 저리 치고 자꾸 두들겨 팹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 쇠붙이 속에 있는 찌꺼기가 다 제거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구멍이라든지 흠이 다 메꾸어지는 것 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인내를 통해서 연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정금보다도 더 보배로운 믿음으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까닭없이 우리의 마음 아프게 하고, 이리 치고 저리 치는 못된 사람들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과 우리의 인격을 연마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 우리에게 다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마음 아프게 하는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그 다음 마지막으로 연단은 무엇으로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까?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 이룬다는 것입니다.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환난, 인내, 연단, 이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이루게 하는 하나의 징검다리요. 디딤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당하는 환난만 바라보지 마세요. 환난은 우리에게 인내를 배양하게 하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또 우리의 연단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이루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의 환난 너머에 있는 소망,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면서 환난 가운데 즐거워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본문의 말씀을 사도 바울의 삶에 조명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과연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했느냐는 것입니다. 대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제가 예를 들어서 두 가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안질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가 다메섹에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때 아주 강한 빛이 그의 눈을 비추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은 사흘 동안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다 벗겨진 난 뒤에야 비로소 바울이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너무나도 강한 빛을 보았기 때문에 그 뒤로 시력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편지를 쓸 때도 다른 사람이 대필해주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바울 사도의 사명이 무엇이었습니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시력 때문에 바울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격었겠습니까? 그래서 고리도후서 12장에 보면 자기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세 번이나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오 주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내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주시옵소서."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거기에 대해서 응답을 해주지 아니하셨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주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응답하셨습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것이 주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응답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음성을 통해서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육체의 가시, 당하는 환난으로 인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더 크게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바울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고 오히려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귀신들린 여종도 고쳐주었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조차도 살려주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유두고라고 하는 청년이 창틀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굴러떨어졌습니다. 죽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기도해서 그 청년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울이 이와 같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려주었는데 자기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이것을 바라보면서 무엇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아하, 바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바울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로구나. 때를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이구나." 이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병을 고칠 때마다 사람들은 바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울 배후에서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병을 고친다 할지라도 바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오히려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자기 육체의 약함을 자랑할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유명한 권사님 한 분이 계십니다. 제가 이름을 대면 여러분도 다 아는 권사님입니다. 이 권사님의 신유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명예가 높아졌습니다. 돈을 많이 모았습니다. 이 권사님이 하루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천국에 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쫓아가서 인사를 했습니다.
"예수님, 저 ○○○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께서 아는 척을 안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님, 저 ○○○ 권사입니다. 저 모르시겠어요? 제가 예수님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습니까?"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제서야 슬픈 눈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을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위해서 일했다고? 네가 언제 나를 위해서 일했니? 지금까지 너 자신을 위해서 일했지, 언제 나를 위해서 일했느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해놓고 나 위해서 일했다고 하면 안되지."
얼마나 충격받았겠습니까?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깨어보니까 꿈이었습니다. 깊은 깨달음이 왔습니다. 눈물 흘리면서, 가슴을 치면서 철저하게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동안 모아놓았던 수억의 재산 한 푼도 남김없이 북한 선교를 위해서 다 헌납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주신 능력을 자기에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지 아니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가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당하는 환난 속에서도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로마에 갈 때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의 수도라고 불리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소원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 어떠한 신분으로 갔습니까? 죄수의 몸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왕이면 하나님이 좀더 좋은 신분으로 바울을 보내셨다면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더 유익했을 텐데." 그것은 인간적인 시각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사도 바울만큼 확실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밖에 있었을 때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본래 바리새파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생각에 예수는 이단 중에 괴수라고 생각했습니다. 멀쩡한 인간이 나타나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과 동등시하니까 신성모독도 그런 신성모독이 없습니다. 당연히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 뿐만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다 잡아죽여야 한다고 바울을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다메섹에 숨여 살고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그 사람들도 모조리 다 잡아죽이는 것이 자기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상의 공문을 받아들고 다메섹에 갑니다.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비로소 사도 바울은 바뀌었습니다. 예수야 말로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바울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바울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일평생 동안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주변에는 아직도 과거의 바울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졌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혈안이 되어서 바울을 찾았습니다. 심지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물도 마시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이 40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바울이 가장 안전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면 그 장소가 어디겠습니까? 바로 감옥아니겠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공짜로 먹여줘, 재워줘, 주야로 보초가 교대로 호위합니다. 얼마나 안전하고 든든한 장소겠습니까?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사도 바울처럼 비참하고 곤고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본다면 사도 바울은 가장 안전하고 든든하게 지켜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바울이 로마에 끌려갈 때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같이 갔어요. 로마의 백부장이 같이 갔습니다. 백명의 군사들이 같이 갔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호송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세요. 그만큼 철두철미하게 어떻게 바울을 지켜줄 수가 있겠습니까?
바울이 왜 로마에 갔습니까? 바울이 누구에게 상소했습니까?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했습니다. 바울에게는 로마의 시민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 판가름해달라고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앞에 바울이 섰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높은 사람 만나기가 그렇게 쉬워요? 여러분, 김영삼 대통령 한번 만나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아직도 못 만나 보았습니다. 청와대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앞에 섰습니다. 그것도 수많은 원로원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바울이 거기서 무엇을 했을 것 같습니까? "형제들이여, 내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예수라고 하는 인물 때문에 섰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누구냐?" 얼마나 멋있게 전도했겠습니까? 여러분, 전도하기가 쉽던가요? 쉽지 않습니다. 누구 하나 전도하려면 밥 사줘야지요, 차비줘야지요. 그리고 또 성경책까지 사줘야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온갖 비유를 다 맞춰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로마의 황제 가이사와 수많은 원로원 앞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졸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지금 바울이 자기 자신을 위해 말하는 변론을 듣고 나서 바울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가름해야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졸 수가 있겠어요? 얼마나 신나게 바울이 복음을 전했겠습니까? 바울은 복음을 다 전하고 나서 이렇게 끝맺음을 했을 것입니다. "여러 형제들이여, 내가 지금 이렇게 매인 것을 제외하고서는 여기에 있는 모든 형제들이 나처럼 예수 믿고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그때 뿌린 복음의 씨앗이 결국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습니다. 얼마가지 아니해서 대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을 우리가 역사적으로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환난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소망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가 있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세번째로, 그러면 우리의 삶이 과연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어떤 육체의 가시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마세요. 좌절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오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까? 내가 잘나서 그렇습니까? 내게 무슨 공로가 있어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보내주지 아니하셨습니까? 생각해보세요.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아낌없이 보내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이 부족해서 지금 우리로 하여금 환난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부족해서 우리를 고통 가운데 그대로 방치해 두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환난은 우리의 인내를 길러주고, 인내는 연단을 낳게 하고, 연단은 우리의 소망을 이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주여, 내게서 이 환난을 물리쳐주시옵소서"라고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여, 우리의 눈을 활짝 열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이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선하신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를 밝히 알게 해 주시옵소서." 이와 같은 기도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이 환난을 통해서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게 해주시고, 우리가 당한 이 환난을 통하여 우리가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갈 수 있게 주시고 사도 바울 처럼 믿음으로 승리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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