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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서강해/제24강 하나님 안에서의 즐거움(5:9-11)

제24강 하나님 안에서의 즐거움(5:9-11)  


흔히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소유형의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존재형의 사람입니다. To have의 사람과 to be의 사람으로 구분을 합니다.
소유형의 사람은 삶의 가치와 목적을 소유의 넉넉함에 두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소유형의 사람에게는 하나의 맹점이 있습니다. 소유형의 사람들은 바로 자기 자신이 중요한 존재임을 생각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로서 자기의 가치를 대신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멋진 집에서 산다. 나는 이렇게 좋은 차를 타고 다닌다."
그는 자기 자신이 그러한 것들보다도 훨씬 귀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참모습을 감추고, 그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을 대신 내세우면서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존재형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존재형의 사람은 삶의 가치와 목적을 소유의 넉넉함에 두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잘 깨달아 알기 때문에 관심의 초점을 다른 것에 두면서 살아갑니다.
"내가 과연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내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마땅한가?"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소유형의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존재형의 사람입니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소유형의 사람이 되어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가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유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30평짜리의 아파트에 살면 50평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구입니다. 돈이 1억이 있으면 2억을 갖고 싶고, 또 2억이 있으면 5억을 갖고 싶은 것이 바로 인간의 본능입니다. 소유형의 사람은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 결과 그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존재형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송명희 시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뇌성마비로 인한 불구의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 몸을 비틀어야 겨우 몇 마디 정도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송명희가 자신은 행복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행복한 이유는"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내가 행복한 이유는
내게 재물이 많은 이유 아니요
주 내게 분깃된 이유 때문에

내가 행복한 이유는
내게 친구 많은 이유 아니요
주 내게 친구된 이유 때문에

내가 행복한 이유는
내게 영광이 많은 이유 아니요
주 내게 기쁨된 이유 때문에."

왜 송명희가 행복합니까? 재물이 많기 때문입니까? 친구가 많기 때문입니까? 세상 영광이 많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시각에서 보면 송명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이 있습니다. 소유의 복은 받지 못했지만 존재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온 우주 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이 그의 분깃이 되어주시고, 그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그의 기쁨과 영광이 되어주심을 그는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세상에 그것보다도 더 마음 든든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송명희는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얼마나 귀중한 신분인지를 바로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가 가진 것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귀중한 신분으로 삼아주셨는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진정으로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편의상 세 대지로 나누어서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귀중한 신분으로 삼아주셨는지 살펴봅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우리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우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거에 어떠했습니까? 6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는 과거에 연약했습니다. 경건치 못했습니다. 어디 그것뿐이었습니까? 8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또 10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연약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경건하게 살지를 못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철저하게 우리가 다른 신분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달라진 신분을 오늘 본문 속에서 두 가지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9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인하여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현재의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신분입니다.
또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엄청난 변화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잘나서, 내게 무슨 공로가 있어서 그렇게 변화한 것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나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몸이 찢기시며 우리를 위해서 흘려주신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 것입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
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또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습니다. 알기 쉽게 설명해 봅니다. 여기 한 쪽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또 여기 다른 쪽에 우리가 있습니다. 본시 하나님과 우리는 원수된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 아들의 죽으심이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된 관계가 화목된 관계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된 것입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기 위해서 누가 죽으셨다고 했습니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을 들으실 때 눈시울이 뜨거워 오지 않습니까? 가슴이 저려오지 않습니까?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를 위해 몇 만원 정도는 거저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돈이 많으면 백만원 정도도 거저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천만원 정도도 거저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이 남을 사랑한다고 해서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처형시키면서까지 남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의 아들,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감동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좀 더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된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장해 주신 것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 말씀 뒤에 "더욱"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앞의 것을 이루어주셨으면 뒤의 것도 역시 이루어주신다는 뜻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불가능한 일도 하나님이 이루어 주셨는데, 왜 그것보다 쉬운 일을 이루어주지 아니하시겠습니까? 9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더욱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지 못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원수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된 지금이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실수하여 실족하고 넘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 하나님은 진노의 손에서 우리를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아마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9절 말씀을 기록하면서,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를 마음 속에 연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은 죽음의 사자를 애굽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지나갈 때, 애굽의 모든 장자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집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아니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집의 문설주에는 어린 양의 피가 칠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설주에 칠해져 있는 어린 양의 피를 보면서 죽음의 사자는 "이 집에는 이미 죽음이 있었구나!"라고 여기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를 그냥 스쳐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얼굴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칠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셨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그의 살으심으로 인해 우리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한 손으로 하나님의 손을 잡으시고, 또 한 손으로는 우리의 손을 잡으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우리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 날도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임마누엘 해 주시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변호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두 손을 높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승리하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9∼10절에서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더욱.... 구원을 얻을 것이니.... 더욱...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궁극적인 구원이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확실하고도 분명한 것입니다. 한 번 따라해 봅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한 번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사실을 꼭 명심합시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멸망의 자식이 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진노의 자식이 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저주의 자식이 될 수 없습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고, 한 번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멋진 말을 우리의 마음 속에 꼭 새기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살펴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엄청난 일들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인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기대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뿐 아니라."

할 말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피로 인해서 우리를 의롭게 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보장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뿐 아니라 이제."

과거는 지나가고,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11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귀한 자녀들에게 선물을 주면서 아버지가 기대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받는 자녀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행복한 모습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귀한 선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듯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엄청나게 귀한 선물, 곧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놀라운 일들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땅히 보여주어야 하는 반응은 어떠해야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즐겁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아낌없이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처형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영원한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잇게 해 주셨습니다. 궁극적인 구원을 우리에게 보장해 주셨습니다. 그 엄청난 것들로도 아직은 부족하십니까? 하나님으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선지자 하박국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든지 무성치 못하든지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다. 포도나무의 열매가 있든지 없든지 지나치게 신경쓰지 마십시다. 소유형의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귀중하게 여기시는지, 아버지 하나님이 내게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베풀어 주셨는지 그것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까? 나에 대해서 생각하지 마십시다. 내가 과거에 무슨 일을 했고, 무슨 일을 하지 못했는지 그것을 너무 깊이 따지지 마십시다. 그러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변화하기 쉬운 주변의 환경을 너무 바라보지 맙시다. 오직 하나님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을 베풀어 주셨는지 그것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마음이 절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하루는 노예시장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마침 한 젊은 흑인 여인이 경매에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증오의 시선을 가지고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너희가 지금까지 나를 얼마나 짓밟았느냐? 너희가 나를 짐승처럼 얼마나 학대했느냐? 그것도 부족해서 나를 이와 같이 굴욕적으로 대하고 있단 말이냐?"
그것을 바라보는 링컨은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경매에 입찰을 했습니다. 최고의 액수를 제시했습니다. 결국 그 여인은 에이브라함 링컨에게 낙찰되었습니다. 그 때 그 여인은 링컨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나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링컨이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자유를 주려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여인이 되물었습니다.
"내게 자유를 주신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것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링컨은 또 답변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당신을 자유롭게 해 주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제야 그 여인이 경계의 눈을 좀 누그러뜨리면서 말했습니다.
"내게 정말로 자유를 주시겠다구요?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겠다구요?"
링컨은 아무 말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때 그 여인의 눈에는 뜨거운 감격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링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부터 당신이 가는 곳마다 당신을 따라다니겠습니다."
링컨이 그 여인을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었을 때, 그는 링컨의 사랑에 탄복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링컨을 억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따라가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제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마땅하겠습니까? 이제는 억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자발적으로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나를 생각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변의 환경을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합시다. 하나님이 보잘 것 없는 나를 위해서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베풀어 주셨는가를 깊이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해 주셨습니다. 내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나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임마누엘 하시면서 내 발걸음을 인도해 주십니다. 여호와 이레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십니다.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더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으로 충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이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충만하게 차고 넘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성전에 오를 수 있는 즐거움을 저희들에게 베풀어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 숙여 경배하면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귀한 신분으로 삼아주셨고 우리에게 보장해 주신 바가 무엇이며,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신 바가 무엇인지 일깨워주심을 감사합니다. 살아가면서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일들, 엄청난 역사들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 저희들의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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