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강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26-30)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난 주간 우리에게 현재의 고난에 대해서 말씀해 주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장래의 영광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현재 겪는 고난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쉽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확신하면 그만큼 현재의 고난은 쉽게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 살던 인디언들 가운데 아파치라는 유명한 부족이 있었습니다. 미국 남서부 지방에 주로 살던 인디언들로서 대단히 강한 부족이었습니다. 그들과 백인들 사이에 있었던 아파치 전쟁은 미국의 서부개척사에 있어서 가장 치열했던 전쟁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 부족에게는 하나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절대로 추장직은 세습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그 부족 가운데 가장 강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언제나 추장으로 추대를 받았습니다.
한 번은 어느 추장이 나이가 많아서 은퇴를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를 뒤이어서 추장직에 오르고 싶어하는 여러 사람들이 후보자로 나섰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을 추장으로 세우기 위해 여러 가지 시합이 벌어졌습니다. 말타기, 창던지기, 활쏘기 시합도 있었습니다. 이제 많은 후보자들 가운데 세 명으로 추려지게 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뽑기 위해서 마지막 시합이 벌어졌습니다. 추장은 세 사람에게 멀리 바라보이는 산꼭대기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너희는 저 산꼭대기에 올라갔다 내려와라. 그리고 내려올 때는 너희가 정상까지 올라갔다는 증표를 하나씩 가져오도록 해라."
대단히 가파르고 험한 산이었습니다. 아무도 올라가 본적이 없는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추장이 되겠다는 일념 하에 죽을 각오를 하고서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습니다. 이제 부족 앞에서 자기들이 가지고 온 증표를 보일 차례가 되었습니다. 첫째 사람은 산꼭대기에서만 자라는 특별한 풀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그것을 추장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꼭대기에 올라갔더니 이런 특별한 풀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둘째 사람의 손에는 돌멩이 하나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산꼭대기에는 이렇게 매끈매끈한 돌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셋째 사람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추장은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 물었습니다.
"아니, 너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증표를 하나 가져오라는 내 말을 듣지 못했느냐?"
셋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분명히 그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우리 마을의 반대 방향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멀리 아주 크고도 아름다운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주변의 땅은 너무나도 비옥했습니다. 그곳을 바라보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우리 부족의 거주지는 즉시 그곳으로 옮겨야 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산꼭대기에 올라간 증표로서 그 비옥한 땅을 제 마음에 품고 돌아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던 추장은 그 즉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선언했습니다.
"나 다음의 추장은 바로 너다!"
왜 그랬겠습니까?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 마음에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부족의 추장으로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스코틀랜드의 선교사였고 탐험가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1841년 흑암의 대륙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복음을 전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말년에 나일강의 근원지를 밝히기 위해서 잠비아의 깊은 밀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그에게서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생사를 알지 못해서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1871년 헨리 스탠리라는 탐험가가 탐험대를 조직해서 리빙스턴을 찾아내기 위해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1년 동안 강행군을 했습니다. 겨우 밀림 속에서 병들어 앓고 있는 리빙스턴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는 식료품과 의약품이 거의 다 떨어진 채 심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탠리는 오랫동안 그와 함께 머물면서 극진히 그를 간호했습니다. 드디어 리빙스턴은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스탠리는 떠나기 전에 그에게 간절히 권면했습니다.
"선교사님, 아프리카의 복음사역을 위해서 30년 간 헌신해 오셨으니까 이제 그만 하시고 저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듣던 리빙스턴은 아주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게 있어서 아프리카의 선교사역은 헌신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큰 특권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이 영광스러운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스탠리는 홀로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난 1873년 5월 1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리빙스턴은 침대 곁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깍지낀 채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으로 고요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은 현재의 고난을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든지 현재의 고난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마지못해서 고난 당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으로 생각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얼마나 놀랍고 확실한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장래의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과거형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얼마나 확실한 것인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편의상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계십니다.
고난을 겪고 계십니까? 외롭지 않습니다. 나 홀로 고난을 겪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계십니다. 26∼27절 말씀입니다. 26절을 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께서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늘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육적으로도 약하지만 영적으로도 얼마나 약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지만 영적으로 한없이 연약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연약합니까? 바울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한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돌이 떡인 줄 알고 돌을 달하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뱀이 생선인 줄 알고 뱀을 달라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한 번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를 모시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절하면서 무엇인가 구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뇨?"
살로메는 나서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고린도후서 12장에 있는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세째 하늘인 낙원에 이끌려 갔습니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을 그곳에서 보았습니다. 지극히 신비로운 체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그것 때문에 자고하면 안되니까 그의 육체에 찌르는 가시를 허락하셨습니다. 질병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 육체에서 가시가 없어지기를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응답하셨습니까? 고후12:9의 말씀입니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사도 바울과 같이 영적인 사람도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라고 하면서 "우리"라는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그 가운데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연약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건강하면 좋은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건강하기 때문에 범죄하는 자리에 이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그저 돈벌고 출세하면 다 좋은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영혼이 병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연약합니다.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26절 하반부입니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연약하지만 성령께서는 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물론 우리는 그 간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그 시간까지 끊임없이 계속해서 성령은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십니다. 어떻게 간구하십니까? 2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100%일치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기도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서툴고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것을 고쳐 간구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늘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보좌로 끊임없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에서 나온 잘못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해 주시는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넘어가서 3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지금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십니다. 우리 속에서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또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위에서 우리를 잡아당겨 주시고, 성령께서는 밑에서 우리를 밀어주십니다.
고난을 겪고 계십니까?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나홀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간구해 주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속에서 친히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반드시 현재의 고난을 이기고야 말 것입니다. 영화로운 그 자리에 이르고야 말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현재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2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는 연약해서 고난을 당할 때 마땅히 빌바를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왜 내가 이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 이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이것을 몰라서 참으로 괴롭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바를 몰라서 그저 엎드려 "주여! 주여!"라고 소리만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내놓고 나면 "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그 가운데 있었구나! 하나님께서 그래서 그때 그 고난을 내게 주셨구나!"라면서 그 사실을 깨닫고 감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가 알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이 장차 내게 유익이 되고 선이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쉽게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종으로 팔렸습니다.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요셉은 거기에서 바로의 술맡은 관원장을 만났습니다. 그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감옥에서 2년 동안 더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요셉이 당한 모든 고난이 그를 영화롭게 하는 길로 인도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요셉의 삶만 그렇습니까? 욥의 삶을 통해서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삶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나간 체험을 통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그 자체만을 생각하면 그것은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본시 십자가는 죄수에게 주어진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습니다. 사탄의 노예가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멸망의 자식이었던 우리가 천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죄인 되었던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왜 하나님이 우리를 나쁜 길로 인도하시겠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 한 사람만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 각자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나쁜 길로 가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그저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닷가에 가면 파도가 많이 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복을 따는 해녀는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다 속으로 들어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다 속에는 파도가 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바다 표면에만 파도가 치는 것입니다. 바다 속 깊은 곳을 흘러가는 물줄기는 표면의 파도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을 피상적으로 바라다보면 고난의 물결이 쉬지 않고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 깊은 곳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물줄기가 도도히 한쪽 방향을 향해서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선을 향해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을 향해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기 때문에 현재 겪는 고난을 겁먹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도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작정하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인도하시는데 누가 그 뜻을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이미 우리는 영화롭게 되기로 작정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고야 마십니다. 29∼30절 말씀입니다. 여기에 보면 구원의 과정이 다섯 가지 단계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첫째로, "미리 아신"입니다. 둘째로, "미리 정하셨으니"입니다. 셋째로, "부르시고"입니다. 넷째로, "의롭다 하시고"입니다. 다섯째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독립되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고리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번 살펴봅니다. 미리 아신 그들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셨습니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셨습니다.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다섯 가지 단계의 주어가 누구입니까? 사람인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도 하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십니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고리는 절대 끊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중단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부르시기는 하셨는데, 의롭다고 하시지 않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일단 의롭다 하셨으면 반드시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섯 가지 단계를 일명 "The Golden Chain(황금의 연쇄고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구원이 우리가 하는 행동에 따라서 좌우된다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인간이 얼마나 연약합니까? 얼마나 변덕스럽습니까? 믿음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열심도 붙었다 떨어졌다가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만일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삶에 따라서 결정되어진다면 우리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안에 떨 필요가 없습니다. 안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친히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홀로 주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얼마든지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과거형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그렇게 확정하신 것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되신 하나님은 시작하시면 반드시 끝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할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이를 키워서 그 아이가 부모의 말을 잘 듣고 또 효도를 하면 호적에 올려주고, 또 아이가 말을 잘 안듣고 효도도 잘 하지 않으면 호적에 올리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의 배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나서 키우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양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받는 자녀로 키워 양육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까? 우리가 연약할 때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건하지 못할 때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도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변덕스러움에 좌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 영화롭게 되기로 작정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까? 29절에 보면 두 가지 목적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그날,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곧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닮게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29절 하반부입니다.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로서 영화롭게 되는 그날, 우리는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에 있는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다 벗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 앞에 던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세무궁토록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 이겨냅니다.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이따금씩 꼭 보고 싶은 스포츠중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없어서 그것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재방송을 봅니다. 재방송을 볼 때는 마음이 느긋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이미 이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졸일 필요가 없습니다. 느긋한 마음으로 즐기면서 볼 수 있습니다. 또 연속극 중에 사극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학교에 다니면서 역사시간을 통해 이미 결과를 어느 정도는 배웠습니다. 그래서 나쁜 사람이 아무리 못된 방법으로 주인공을 해하려고 해도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주인공이 영화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극을 볼 때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은 아무리 극심하다 할지라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영화롭게 되기로 작정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날마다 느긋한 마음으로 승리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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