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강 내가 확신하노니(8:35-39)
금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생각나는 그림이 있습니다. 불란서의 화가 밀레가 그린 「만종」입니다. 워낙 유명한 그림입니다. 두 부부가 밭에서 온종일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저녁이 되었습니다. 석양빛이 주변을 아름답게 물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예배당의 종소리가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그와 때를 맞추어 두 부부는 하던 일손을 멈추었습니다. 남편은 손에 쥐고 일하던 쇠스랑을 땅에 꽂았습니다. 아내는 손에 들고 있는 바구니를 땅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두 사람은 선 채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서 경건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그림입니다.
과연 그때 그들이 어떠한 기도를 드렸을지 생각을 해봅니다. 아마도 하루 일과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또 하루 일과를 생각하면서 행여 잘못한 것이 없는지 반성하면서 회개하는 기도도 드렸을 것 같습니다. 또 내일 할 일을 생각하면서 작은 소망의 기도도 드렸을 것 같습니다.
금년 한 해를 마감하면서 우리 모두의 마음가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잘못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회개의 기도를 또한 드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새해에는 좀 더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의 기도를 또한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모두에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언제, 어느 때,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찰스 스펄젼 목사님이 한 번은 시골에 있는 어떤 농가를 방문했습니다. 농가의 마당 한쪽 편에는 큰 풍향계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풍향계 끝에는 바람의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촉이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그 모습을 재미있게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화살촉 밑에 표가 하나 달려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표에는 무엇이라고 글자가 쓰여있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과연 무엇이라고 쓰여있을지 궁금해서 풍향계 밑으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4:16의 말씀이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좀 의아스럽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 주인인 농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설마 하나님의 사랑이 바람부는 대로 바뀐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러자 농부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입니다. 정반대이지요. 바람이야 어떠한 방향으로 불던지 간에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뜻으로 거기에 그 말씀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해를 돌이켜볼 때 우리가 때로는 형통했습니다. 때로는 곤고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형통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가 곤고함에 처했을 때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이 합력해서 우리에게 선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영원히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끊을 수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사도 바울의 확신이 우리 모두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극심하다 할지라도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그 어떠한 것이라도 우리에게 보장된 장래의 영광을 결코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3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본문 앞에 있는 34절에서 네 가지로 이미 우리에게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이 엄청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과연 그 무엇이 끊을 수가 있겠습니까? 환난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곤고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그 어떠한 고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일곱 가지를 다 합친다 할지라도 결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는 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일곱 가지의 고난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크고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의 경우를 한 번 예로 들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일곱 가지 고난을 몸소 겪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당했던 육체적인 환난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번 감옥에 갇혔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태장으로 맞았습니다. 돌로 맞기도 했습니다. 육체적인 환난뿐만 아니고 심령의 곤고도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늘 교회의 대한 염려로 인해서 그의 마음은 억눌리는 듯했습니다. 또 그가 가는 곳마다 이런저런 핍박이 있었습니다. 동족 유대인들의 핍박도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의 핍박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는 기근이 있었습니다. 먹지도 못했습니다. 제대로 마시지도 못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에게는 적신도 있었습니다. 춥고 헐벗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이런저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 번에 걸쳐서 선교 여행을 했습니다. 시내의 위험도 있었고, 강의 위험도 있었고, 바다의 위험도 있었고, 강도의 위험도 있었고, 광야의 위험도 당했습니다. 어디서나 칼이 그의 생명을 위협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면서 칼을 갈며 동맹한 사람이 무려 40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마침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잘 아는 로마의 영문 밖에서 칼로 목베임을 받아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고난들이 과연 사도 바울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내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끊지를 못했습니다. 바울은 고후5:14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를 강권한다고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파도처럼, 밀물처럼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끊임없이 밀려오고 또 밀려왔습니다. 바울은 엄청난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음으로서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선한 싸움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을 겪었지만, 결코 두려워하거나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3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가 시44:22의 말씀을 인용한 것처럼 다른 성도들도 훨씬 더 극심한 고난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을 겪고 있습니까? 우리만 겪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극심한 고난을 겪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고난도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결코 끊지를 못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미리 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미리 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는 여기까지 와있습니다. 이제 남은 한 단계는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감히 그 누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나설 수가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말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을 모두 합친다 할지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겪는 고난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최후의 승리와 영광은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현재의 고난에서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37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겨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겪을 때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가 함께 하시지 때문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고난도 넉넉히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어느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퇴근 후에 잠시 백화점에 들렀습니다. 그날은 사랑하는 아내의 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줄 생일선물을 샀습니다. 예쁘게 포장해서 선물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어린 딸이 아래층에 있다가 아빠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아빠, 어서오세요. 오늘이 엄마생일이라고 선물을 사오셨군요!"
아빠는 그 말을 듣고 딸에게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그래. 오늘 하루 잘 놀았니? 엄마는 어디 계시니?"
딸은 대답했습니다.
"예. 2층에 계세요."
아빠는 그 소리를 듣고 자기가 가지고 온 선물꾸러미를 사랑하는 딸아이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네가 아빠 대신에 이 선물을 엄마에게 전해 줄 수 있겠니?"
딸은 의아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소아마비로 휠체어에 앉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2층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자기가 사온 선물꾸러미를 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딸을 번쩍 안아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안고 딸은 선물꾸러미를 안고서 함께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딸은 아버지가 사온 선물을 어머니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힘으로는 현재의 고난을 이겨낼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 겪는 어떠한 고난이라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겨우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스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고도 남습니다. 넉넉히 이겨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의 경우를 한 번 예로 들어서 생각해 보십시다. 고린도후서 12장에 있는 내용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의 육체를 찌르는 가시었습니다. 질병이었습니다. 그는 그것 때문에 너무나 괴로워서 세 번씩이나 주께 간구했습니다. 자기 육체에서 가시가 없어지기를 바라면서 세 번이나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가 그의 육체에서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가 받은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고후12:9의 말씀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사도 바울이 그 응답을 받게 되었을 때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고후12:9의 하반부와 10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더 이상 자기 육체에 있는 가시를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뻐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자기 육체를 찌르는 가시를 참고 견뎌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자랑할 정도로 그는 넉넉히 이겨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을 겪고 있습니까? 그 고난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결코 끊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더 가까이 인도할 뿐입니다. 바람이 불면 연은 더 높이 올라갑니다. 황금이 용광로에서 녹는다고 해서 황금이 없어집니까? 아닙니다. 불순물, 찌꺼기만 없어질 뿐입니다. 더 순수해 질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돈독하게 하고 우리의 신앙을 더욱더 순수하게 만들어줄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8:28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과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을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난은 경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중한 것입니다. 고난은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영원합니다. 고난은 이 땅의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하늘 나라의 것입니다. 고난은 사람에게서 주어집니다. 그러나 영광은 하나님에게서 주어집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고난을 받지만, 그 고난이 아무리 극심하고 크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과 상급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우리는 결과적으로 넉넉히 이겨놓은 상태입니다. 최후의 승리와 영광은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38∼39절 말씀을 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오늘 본문을 시작할 때 "누가"라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말씀을 거쳐서 이제는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무엇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가 겪었던 모든 고난들이 끝나고 더 이상 그에게 다가오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여전히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고 온 우주 속에 있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열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여덟 가지는 서로 두 가지씩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가지는 짝을 이루지 않고 개별적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짝은 "사망과 생명"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생기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떠한 사연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둘째 짝은 "천사와 권세자"입니다. 천사는 선한 존재입니다. 반대로 권세자는 악한 영, 악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존재들, 곧 그것이 선한 존재이든지 악한 존재이든지 간에, 어떠한 존재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는 결코 끊지를 못합니다.
셋째 짝은 "현재의 일과 장래의 일"입니다. 현재로부터 장래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어떠한 사건과 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능력"은 짝을 이루지 않고 개별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떠한 능력도, 그 어떠한 권세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는 끊을 수는 없습니다.
넷째 짝은 "높음과 깊음"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높이 올라갈 수도 있고 낮게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겁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라는 말씀으로 끝맺음하고 있습니다. 그는 더 많은 예들을 나열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망, 생명, 천사들, 권세자들,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등 아무리 다른 목록들이 수없이 많다 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겁먹을 필요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넉넉하게 이기고 승리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임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임종을 지켜보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자기가 늘 보는 성경의 로마서 8장에 있는 말씀을 펼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족들은 로마서 8장을 펼쳤습니다. 그는 이미 기력이 쇠해서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도 시력을 잃어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가족들에게 자기 손가락을 로마서 8장 마지막 부분에 있는 "내가 확신하노니"라는 말씀 위에 놓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가족들은 그의 손가락을 롬8:38의 말씀 위에 올려주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에게 그 말씀을 읽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를 위해 한 목소리로 38∼39절을 읽어주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망조차도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그는 평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한 해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이 세상의 어떠한 것이라도 끊을 수 없는 그 사랑으로 이 한 해를 복되게 마감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그 시간까지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돌보아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현재 당하는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힘입어서 얼마든지 이기고 승리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선한 싸움에서 승리해 왔습니다.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금년 한 해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천국가는 그 시간까지 하나님의 사랑,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랑, 끊을 수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서 매일 매순간 넉넉하게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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