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가르치신 예수님! (막 9:14~29)
오늘 본문 23절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는 믿음의 능력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믿음의 능력을 강조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늘 함께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귀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을 직접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곧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셔야 했습니다. 그러면 고후5:7 말씀처럼, 그들은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행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믿음의 능력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 믿음에 관하여 잘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질이 확연하게 달라질 것입니다.
첫째로,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14~18절)
막9: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눅9:37 말씀처럼, 그 이튿날 예수님은 세 제자와 함께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 때 산 아래에는 나머지 아홉 명의 제자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 아홉 명의 제자들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으니까, 으레 예수님도 함께 계실 것이라고 사람들은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악의적으로 찾아온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기를 바랐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그 곳에 계시지를 않자,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변론을 일으켰습니다.
오늘 본문에 변론의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열세에 몰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에 그들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막9: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막9: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그 때 온 무리가 예수님이 세 제자와 함께 그들에게 다가오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즉시 그들은 세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첫째, 그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둘째, 그들은 예수님에게 달려왔습니다. 셋째, 그들은 예수님에게 문안했습니다.
이는 마치 청소년들 앞에 그들이 기다리던 인기 연예인이 나타났을 때의 광경과 같습니다. 온 무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매우 놀란 표정으로 환호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쏜살같이 예수님에게 달려가, 너도나도 예수님에게 말을 걸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나오는 “너희”와 “그들” 가운데, 한 쪽은 서기관들이며 한 쪽은 아홉 제자들일 것입니다. 문법적으로는 어느 쪽이든지 가능합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제자들과 서기관들 사이에 변론이 있었음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따라서 이 때 예수님이 그들 사이에 있었던 변론의 내용을 모르셔서, 그와 같은 질문을 던지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질문을 통해서, 의기양양한 서기관들을 나무라시며 곤경에 빠진 그의 제자들을 구해내시기를 바라셨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질문에 서기관들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면목없다는 듯이 아무 말을 못했습니다.
막9: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막9: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무리 중의 한 사람이 나서면서 예수님에게 대답했습니다. 마17:13을 보면, 그는 예수님에게 와서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예수님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했던 것입니다.
또한 눅9:38 말씀처럼, 이 때 그는 소리를 지르며 말했습니다. 온 무리가 예수님에게 문안했으니, 얼마나 떠들썩했겠습니까? 게다가 눅9:38 말씀처럼, 그가 데리고 온 아이는 그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소리 질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마17:15에서는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예수님을 “주여” 또는 “선생님”이라고 번갈아 부르면서, 예수님에게 자신의 문제를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의 마음이 절실했던 것입니다.
그 아이는 그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귀신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말을 못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 25절 말씀처럼, 그 아이는 듣지도 못했습니다. 듣지를 못하니까,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귀신 들린 아들을 예수님에게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아들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 때 그는 예수님에게 그 귀신이 얼마나 심하게 그의 아들을 괴롭히는지 다섯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귀신은 어디서든지 그를 잡습니다. 그러니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둘째, 거꾸러집니다. 발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셋째, 입에 거품을 흘립니다. 넷째, 이를 갑니다. 다섯째, 파리해집니다. 온 몸이 경직되는 것입니다.
마17:15에서 그는 자기 아들이 간질을 앓는다고 밝혔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 간질이 단순하게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질병은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이 말을 못하고, 심한 간질을 앓는 것은 귀신 들렸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그의 아들을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곳에 계시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눅9:40 말씀처럼,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 주기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능히 하지를 못했습니다.
막6:7 말씀처럼,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막6:13 말씀을 보면, 그들은 이미 많은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번에 그들은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그 이유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신 예수님(19~27절)
막9: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그 사실을 예수님에게 고했을 때,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때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주 대상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에 따라 이미 그들은 많은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그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그들은 귀신을 내쫓기 위하여 여러 차례 시도했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그에게서 나가라.” 그런데도 귀신이 꿈쩍도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풀이 죽어 그만 포기를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약속하셨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줄을 믿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때, 그들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자, 그들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그의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지심으로, 믿음이 없는 그의 제자들을 나무라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이제 예수님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곧 그들을 떠나셔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그들은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들은 믿음으로 행하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쉽게 낙심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이와 같이 우리를 책망하실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여. 내가 얼마나 너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에게 참으리요.”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변함없이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바랍니다.
막9: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막9: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막9: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이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원하는 바를 얻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귀신은 원치 않는 일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눅9:42 말씀처럼, 오는 도중에 귀신은 그 아이를 거꾸러뜨렸습니다. 귀신은 그 아이가 예수님에게 가지 못하도록 막으려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귀신이 예수님을 보는 순간, 귀신은 그 아이를 다시금 사로잡았습니다. 그 결과 그 아이는 심한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더니 그 아이는 땅에 엎드러져 뒹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의 입에서는 거품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러한 광경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물으셨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데, 왜 그러한 질문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 사람이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고통을 예수님께 아뢰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고통을 예수님에게 아뢰면,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이시지만, 우리가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는 대답했습니다. “어릴 때부터니이다.” 그러니 그 동안 그와 그의 아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는 자신들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한 가지 덧붙였습니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귀신은 의도적으로 그 아이를 모닥불이나 샘 또는 연못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강압적으로 그 아이를 그 속에 집어던졌습니다. 그것도 이따금이 아니라, 자주 그렇게 했습니다. 귀신은 그 아이를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아이의 몸에는 불에 덴 화상을 비롯해서, 그 외의 상처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귀신에게서 당하는 그 아이도 매우 고통스럽지만, 필사적으로 귀신에게서 외아들을 지켜야 하는 그 아이의 아버지도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마찬가지로 그 아이가 어릴 때부터 귀신 들린 것이 죄 때문일 수는 없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귀신은 그 아이를 죽이려했지만, 하나님은 허락하지를 않으셨습니다.
막9:22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막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9: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막1:40에서 한 나병환자는 예수님에게 이와 같이 간구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치를 않았습니다. 단지 그는 예수님의 의사를 물었을 뿐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믿음이 없는 간구를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의사는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아들을 데려오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능히 하지 못했기에, 어쩌면 예수님도 능히 하실 수 없을는지 모른다고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심스럽게 예수님에게 간구했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는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말이었습니다. 이는 분명 믿음이 없는 간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고 그를 나무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연이어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대답했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지금도 그 아이는 심하게 경련하며, 땅에 엎드려 뒹굴며, 거품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예수님을, 예수님의 능력을,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솔직한 심정으로 예수님에게 간구했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내가 믿나이다. 그러나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의심하는 생각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내게서 의심을 떨쳐주옵소서.” 이런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간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때때로 우리에게도 의심이 들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부단 없이 간구해야 합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막9: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막9: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막9: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예수님은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며,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와 대화하시던 것을 멈추셨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의 관심은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바라시는 바는 그의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곧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말씀하셨습니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그러니까 그 더러운 귀신 때문에, 귀신 들린 아이가 말을 못하며 듣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마12:43~45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귀신은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다시금 그 사람에게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이는 전연 그럴 우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더러운 귀신을 명하여,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아버지는 귀신이 주는 고통에서 완전히 놓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귀신이 나갈 때의 광경은 어떠했습니까? 귀신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또한 귀신은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귀신이 그 아이에게서 나갔습니다. 막1:26 말씀을 보면, 이전에도 귀신이 똑같은 방식으로 나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귀신은 그 아이에게서 나가기가 싫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명하시니까, 귀신은 어쩔 수 없이 그 아이에게서 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귀신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더 그 아이를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이렇듯 귀신의 본질은 더럽고도 악합니다.
심한 경련으로 인해서, 그 아이는 죽은 것 같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아이가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귀신은 그 아이를 죽이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일어섰습니다. 그 아이는 혼자서도 서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눅9:42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그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셨습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참으로 인자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죽은 것 같은 아이의 손을 잡아 주셨듯이, 예수님은 우리의 손도 기꺼이 잡아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일으켜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넘어졌다가도 얼마든지 다시금 일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셋째로, 제자들을 가르치신 예수님(28~29절)
막9: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막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제 장면이 바뀌어, 예수님이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벗어나셔서, 제자들과만 함께 있게 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런 종류”란 이번에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한 귀신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는 한 마디로 기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번에 그들은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에게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들은 많은 귀신들을 내쫓았습니다. 자연히 그들은 이번에도 자기들이 당연하게 그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쫓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가 그들에게 기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에게 어떤 권능이 있는 것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면, 그 곳에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약5:16 말씀처럼, 의인의 간구가 역사하는 힘이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는 자에게,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마17:19~20에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마17: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마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왜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까? 그들의 믿음이 작은 까닭이었습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자기들 선에서 쉽게 처리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하며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믿음이 작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어야, 우리에게 예수님의 권능이 나타납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믿음을 요구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우리는 태산과 같은 문제라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실례가 누구입니까? 바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겨자씨 한 알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간구했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그 결과 그는 태산과 같이 큰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라 하더라도, 자기 힘으로 하면 실패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가진 사람이더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태산과 같은 문제라도 해결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합니다. 믿음으로 삽시다. 그리해서 날마다 믿음의 힘으로 세상을 이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추천 설교 > 박상훈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관용을 가르치신 예수님! (막 9:38~41) (0) | 2017.01.21 |
---|---|
[스크랩] 겸손을 가르치신 예수님! (막 9:30~37) (0) | 2017.01.21 |
[스크랩] 로마서강해/제52강 맺힌 것을 풀어버리는 삶 (12:19-21) (0) | 2017.01.12 |
[스크랩] 로마서강해/제51강 평화를 이루어내는 삶 (롬 12:17-18) (0) | 2017.01.12 |
[스크랩] 로마서강해/제50강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삶 (12:14-16) (0) | 2017.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