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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겸손을 가르치신 예수님! (막 9:30~37)

겸손을 가르치신 예수님! (막 9:30~37)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이제 곧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만 했습니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동안,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기를 바라셨습니다. 장차 바로 그들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모든 사람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는 그들이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행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의 힘으로 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믿음으로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의 믿음은 겨자씨 한 알만 했지만, 그는 태산과 같은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이렇듯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전능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그에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으로 행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곧 이어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겸손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4:6 말씀처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 모두 겸손을 잘 배워서, 늘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겸손의 본이신 예수님(30~33절)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몸소 겸손을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 자체가 바로 겸손의 실례였다는 사실입니다.


막9:30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을 떠나셨습니다. 참으로 많은 일들이 그 곳에서 일어났었습니다. 바로 그 곳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하게 믿고, 자신들의 입으로 그 사실을 분명하게 고백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버린 바 되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드러내 놓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예수님의 말씀에 항변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라면 누구라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예수님은 현재의 고난 너머에 장래의 영광이 있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장래에 있을 영광을 미리 그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이튿날 예수님은 세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 때 산 아래에는 나머지 아홉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아홉 명의 제자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은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행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쉽게 생각하면서 자기들의 힘으로 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면서, 그들에게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가셨습니다. 오늘 본문 33절 말씀처럼, 예수님은 갈릴리의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막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예수님이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신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집중해서 그의 제자들을 가르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9장과 10장을 보면,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르치신 내용들이 여러 가지로 나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살펴본 대로, 먼저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곧 이어 예수님은 관용을, 또한 화목을 가르치셨습니다.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들어서 구원에 대해, 부자 청년 관리를 들어서 영생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를 가르치시고, 자신이 당하실 일과 영광의 길을 가르치시고, 섬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후 10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더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많은 가르치심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라도,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가르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신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행선지는 갈릴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셔서, 죽임을 당하시고, 죽으신 지 삼 일만에 살아나실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시며, 죽임을 당하시며, 다시 살아나실 곳이 어디였습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시는 곳도 예루살렘이며,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는 곳도 예루살렘이며.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곳도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바로 예수님의 행선지였습니다. 갈릴리는 그저 잠시 거쳐서 지나가는 곳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에게로 모여드는 갈릴리 사람들 때문에,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을 방해받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셔야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행선지는 갈릴리가 아니라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때 예수님을 따라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할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막9: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셔서, 죽임을 당하시고, 죽으신 지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17:23 말씀처럼,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매우 근심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말뜻은 다 알아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곧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며, 세세토록 영광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리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하신다는 말입니까? 또한 어찌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당시로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깨닫지 못한 것을 예수님에게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베드로처럼 야단을 맞기가 싫었을 것입니다. 또한 슬프고도 고통스러운 일을 더 자세하게 알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에게 더 이상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눅9:45 말씀을 보면, 오히려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그들로 깨닫지 못하도록 숨긴 바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이 후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시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그러니 만일 이 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그들은 그 즉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로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에야, 그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이 대속의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의 삶 자체가 바로 겸손의 극치였음도 깨달았습니다. 아마도 이를 가장 잘 설명한 곳이 빌립보서 2장일 것입니다.

빌2:3 말씀처럼,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빌2:5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빌2:6 말씀처럼,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예수님보다 더 높은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빌2:8 말씀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홀로 다 받으셨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누가 예수님보다 더 낮아질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삶과 사역은 겸손의 극치였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겸손의 본이신 예수님과는 너무나도 딴판이었습니다.


둘째로, 교만에 사로잡힌 제자들(33~34절)


막9: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예수님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을 떠나신 후,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셔서 가버나움에 이르셨습니다. 마9:1 말씀처럼,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본 동네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곳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주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집에 계실 때였습니다. 본래는 집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집”이라는 뜻입니다. 막1:21과 29절을 보면, 가버나움에는 베드로의 집이 있었습니다. 아마 이 때도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 계셨으리라 여겨집니다. 

아무튼 그 때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이 모르시기 때문에 물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토론이 잘못되었음을 아시고, 그들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질문하셨던 것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가버나움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습니다. 따라서 분명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 토론했을 것입니다. 또한 열띤 토론을 벌였을 것입니다.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토론했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막9: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우선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잠잠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끄러운 듯이 입을 다물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당하실 고난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안중에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은 전연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이 얻을 영광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길에서 서로 자기가 더 크다고 다투었습니다.

마23:6~7 말씀처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본 받아야 할 것은 그들의 교만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겸손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길에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을까요? 이미 살펴본 대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자기들도 덩달아 영광을 누릴 줄로 여겼습니다.

그 때 과연 누가 더 예수님과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더 큰 영광을 얻을 것인가? 그것이 바로 그들의 관심사였습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사탄이라고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를 제외한다면, 그 다음으로 떠오르는 유력한 후보가 야고보와 요한이었을 것입니다. 그들 세 사람만이 예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20:20 말씀을 보면, 그들은 어머니와 함께 와서 예수님의 좌우 편에 앉기를 구했습니다.

그 때 다른 제자들은 그 두 형제를 분히 여겼습니다. 그들도 어머니가 가까이 있었으면, 함께 예수님께 와서 호소했을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각 촌으로 그들을 파송하셨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더 큰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제자들은 교만에 사로잡혀, 서로 자기가 크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교만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아무도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몸소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으셨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요13:3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겸손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겸손해야 예수님의 제자로써 하나가 됩니다.

반대로 교만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교만하면 서로 다툽니다. 교만하면 불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예수님ㅢ 겸손을 따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만한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셋째로, 제자들을 가르치신 예수님(35~37절)


막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고, 먼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교만에 사로잡혀서, 서로 자기가 크다고 다투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끝 부분을 “되어야 하리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첫째가 되는 비결을 가르쳐주시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원문의 뜻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첫째가 되겠다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들의 교만 때문에, 그들은 불화하며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그들의 원대로 첫째가 되는 비결을 가르치신다는 것은 문맥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맞지를 않습니다.

원문은 “되어야 하리라”가 아니라 “되리라”입니다. 그러니까 이 때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교만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밝히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오히려 그 사람은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눅14:11에서 예수님은 같은 내용으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기를 높였던 바리새인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춘 세리는 높아졌습니다. 눅18:14에서 예수님은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렇습니다. 잠16:18 말씀과 같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교만이 있으면, 패망이 따라옵니다. 거만한 마음이 있으면, 넘어짐이 뒤를 따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여기서 교만의 결과를 밝히신 것입니다.


막9: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막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교만을 책망하신 후, 그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아마도 두어 살 되는 아이였을 것입니다. 자기 발로 서기도 하고, 예수님의 팔에 안기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막1:30을 보면, 예수님은 열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결혼을 했을 터이고, 그에게는 아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때의 집이 베드로의 집이었다면, 여기에 나오는 어린 아이는 베드로의 아이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무튼 어린 아이는 미미한 존재였습니다. 그 당시 어린 아이는 사람의 수에도 들지 못할 만큼 무시당하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35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표현하면, 어린 아이는 말 그대로 뭇 사람의 끝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크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뭇 사람의 끝인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첫째가 되려고 다투는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팔로 그 아이를 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몸소 제자들 앞에서 겸손을 실천해 보이신 것입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이 때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바와 같이, 뭇 사람의 끝인 어린 아이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더라도,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주며 귀중히 여겨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겸손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 하나와 같이 낮고 비천한 자를 영접하면, 이는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마25:40 말씀처럼, 예수님의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에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뭇 사람의 끝이라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기뻐하시고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2:8 말씀처럼,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이러므로 빌2:9 말씀처럼,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언제나 겸손하게 우리를 낮춥시다. 벧전5:6 말씀처럼, 때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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