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에 대해 가르치신 예수님! (막 10:1~12)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과 10장을 보면,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가르치신 말씀들이 꼬리를 물면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앞으로 그들은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겸손과 관용과 화목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서로 협력하면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혼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 계기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혼에 대해서 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의 질문에 답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더 분명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혼을 아주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혼을 하면서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혼하는 것을 하나의 용기 있는 행동처럼 여겼습니다. 어찌 보면 오늘날의 상황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의 풍조가 아닙니다. 어그러진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나날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만이 절대적입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씀을 드립니다. 말2:16 말씀과 같이, 한 마디로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말3:6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 결혼의 의미와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리고는 우리 모두 각자의 가정에 더욱 충실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바리새인들의 질문입니다(1~2절).
막10: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예수님은 갈릴리 가버나움을 떠나셔서, 유대 지경을 향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목적지는 유대 지경에 있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요단 강 건너편, 곧 베레아로 가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베레아는 “건너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으시고, 요단 강 건너편 곧 베레아로 우회해서 유대로 가신 것입니다. 이는 눅9:51 이하의 말씀처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셨을 때입니다. 무리가 다시 예수님에게 모여들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베레아에 사는 유대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유월절을 맞아, 갈릴리에서 베레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는 유대인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전례대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막1:14~15 말씀처럼,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와 같이 외치셨을 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19:2 말씀을 보면, 이 때 예수님은 그들의 병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권능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렇듯 전례대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시며,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막10: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바리새인들은 참으로 끈질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계속해서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했습니다. 물론 그들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포기할 줄 몰랐습니다.
이 때에도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물론 그들은 악의를 품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미 계산된 질문을 통하여, 예수님을 시험에 빠트리도록 유도하려고 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던진 질문은 이러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마19:3 말씀을 보면, 그들의 질문이 좀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유대인의 탈무드를 보면, 그들의 이혼 사유를 잡다하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경우, 시모에게 나쁜 말을 했을 경우, 다른 남자와 대화를 했을 경우, 밖에서 머리를 풀었을 경우, 음식을 태우거나 맛을 제대로 내지 못할 경우 등등입니다.
그러니 그 당시 이혼하기가 얼마나 쉬웠겠습니까? 자기 아내를 버리고자 하면, 필요한 구실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때 예수님에게 모여든 무리 가운데는, 이미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든 자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무리 앞에서, 바리새인들은 짐짓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들은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실 지를 미리 다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분명 그들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인 마5:31~32을 보면, 예수님은 음행한 이유 없이 이혼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이 “옳지 않다”라고 대답하실 것을 내심 기다렸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두 가지를 꾀했던 것입니다.
첫째, 그들은 예수님과 무리를 떼어놓으려 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에 따라서 거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간음한 자로 전락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떠나버릴 것이라고 그들은 기대했던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막3:6 말씀을 보면, 이미 그들은 헤롯당과 함께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죽여 없애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자기들에게 찾아왔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요단 강 건너편, 곧 베레아에 계십니다. 베레아는 분봉 왕 헤롯이 다스리는 영토입니다. 바로 그 곳에 있는 마캐루스라는 요새에서 세례 요한은 헤롯에 의해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막6:18 말씀처럼,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이와 같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헤롯은 그의 아내를 버리고,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에게 장가들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것이 옳지 않음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안 그래도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이 그의 이혼 문제에 대해서 세례 요한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분명 헤롯은 예수님마저 죽이려 할 것입니다.
이렇듯 그들은 예수님과 사람들을 떼어놓으려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분봉 왕 헤롯의 손을 빌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속셈으로 그들은 예수님에게 하나의 계산된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둘째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3~9절).
막10: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막10: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님은 피하지 아니하시고,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이를 계기로 예수님은 이혼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치시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예수님은 그들에게 되물어보셨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모세는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의 풍조가 아니었습니다. 조상들의 전통도 아니었고, 랍비들의 견해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바리새인들은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그들은 모세가 기록한 신24:1 말씀을 근거로, 자기들의 이혼은 성경적으로도 타당하며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때 바리새인들은 자신 있는 듯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했을까요? 그들에게 속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모세와 다르게 말씀하시며, 예수님이 성경과 다르게 가르치신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바로 그들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결코 그들의 이혼을 장려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이혼을 최대한 억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신명기 22장에서 모세는 남자든지 여자든지 간음을 행하면, 돌로 쳐죽이도록 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기에, 간음을 행한 사람이라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신24:1에 있는 말씀입니다.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고, 그와 함께 살기를 기뻐하지 않아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럴 때는 그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명령형이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여자에게는 경제력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신24:2 말씀처럼, 이혼을 당한 여자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여자에게 이혼 증서를 주어서,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24:3 말씀과 같이, 그 여자가 둘째 남편에게서도 이혼을 당했습니다. 또는 둘째 남편과 사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럴 경우 그 여자의 전남편이 다시금 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습니까?
신24:4 말씀을 보면, 그렇게는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한번 그의 아내를 내보냈으면, 또다시 자기 아내로는 맞이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맞이하지 말라는 동사가 명령형입니다. 모세는 사람이 한번 이혼을 했으면, 재결합하지는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모세가 무엇을 명했습니까? 모세가 명하는 바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자기 아내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기 아내를 내보낼 때는 그만큼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번 내보내면, 다시 맞이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막10: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왜 사람이 이혼을 합니까?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사람이 쉽게 자기 아내를 내보내지 못하도록, 신24:4에 있는 명령을 기록한 것입니다. 아내를 내보내면, 다시는 맞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니 함부로 이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자기 아내보다 더 마음에 드는 여자가 생겼습니다. “저 여자와 한 달만 살다가 헤어지고, 본래의 아내를 다시 맞이해야지.” 이와 같이 완악한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모세는 한번 내보낸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라는 명령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 네게 귀한 자녀를 낳아준 아내인데, 어찌 그리도 쉽사리 내보낼 수가 있단 말이냐? 한번 내보내면 다시는 맞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 내보내기 전에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여라.” 이러한 뜻으로 모세는 이 명령을 기록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다는 사실은 바리새인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 때 그들은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에 계시된 창조와 결혼의 원리를 들어서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이혼을 정당화시키려고, 신24:1 말씀을 그릇되게 인용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사람들을 예수님에게서 떼어놓으려 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헤롯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렇듯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완악했습니다.
막10: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막10: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막10: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앞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모세가 기록한 신명기의 명령을 곡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이제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시기 위하여, 모세가 기록한 또 다른 성경인 창세기 1장과 2장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성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해서 그 곳에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창세기 1장과 2장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창1:27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한 남자와 한 여자로만 지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한 남자에 여러 여자로 짓지 아니하시고, 또한 여러 남자에 한 여자로 짓지도 아니하셨습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에게 이혼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두 사람이 헤어졌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창세기 3장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둘째, 결혼으로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창2:24 말씀입니다. 결혼을 하면, 사람은 그 부모를 떠납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 됩니다. 한 몸은 둘로 쪼갤 수가 없습니다.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에, 둘로 나뉘어질 수가 없습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자녀에게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자녀는 부모의 모든 것을 섞어서 한 몸으로 태어납니다. 따라서 부부가 이혼하는 것은 자녀의 몸을 둘로 쪼개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만큼 자녀에게는 큰 상처가 될 것입니다.
막10: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여기에 예수님의 결론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의 원리를 밝히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결혼의 원리를 밝히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예수님은 결혼이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모든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잘못 만났어. 우리의 결혼은 실수야.”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모든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이러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제 예수님의 대답이 구체적으로 등장합니다.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예수님은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단정적으로 대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따라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온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두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언제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교훈입니다(10~12절).
막10: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막10: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막10: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예수님이 베레아에 있는 어떤 집에 계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마19:10 말씀처럼, 사실은 그들도 세상 풍조에 많이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자, 다시 이 일을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성경에 기록된 창조의 원리와 결혼의 원리를 따라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그 아내를 버렸습니다. 그의 아내와 이혼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임의로 나눈 셈입니다.
그가 다른 데에 장가를 들었습니다. 다른 여자와 결혼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들 두 사람이 남남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한 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여전히 한 몸입니다.
따라서 엄연히 그는 아내가 있는 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다른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는 자기 본처에게 간음을 행한 것입니다. 이로써 그는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이것은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아내를 버림은 자기 아내에게 간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남편을 버림은 자기 남편에게 간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간음한 자를 돌로 쳐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아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남편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혼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두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이혼을 허락하셨습니다. 첫째, 마19:9 말씀처럼 배우자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음행을 범할 경우입니다. 둘째, 고전7:15 말씀처럼 믿지 않는 배우자와 신앙 문제 때문에 계속적인 갈등을 겪을 경우입니다.
그럴지라도 섣불리 이혼하면 안 됩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간음을 행했을 때, 호세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고멜에게 베풀었던 사랑과 용서와 인내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믿지 않는 자도 그 배우자로 말미암아 믿음을 가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제10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것처럼, 이웃의 아내를 탐내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음욕을 품고 이웃의 아내를 보면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마도 우리 각자에게는 떳떳하지 못한 점들이 많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요8:11을 보면, 예수님은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용서하시며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의 간음, 우리의 이혼까지도 용서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인 막9:50에서, 예수님은 우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히 부부 사이에도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한 부부, 서로 화목한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누리며, 물댄 동산처럼 늘 행복이 끊임없이 샘솟는 우리 모두의 가정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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