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관들을 물리치신 예수님 (막 12:28-34)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한 주간을 가리켜서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고난주간의 첫째 날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 무리는 소리 높여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했습니다.
그러한 광경을 보면서, 유대교의 지도자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무리의 외침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로 바뀌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함께 모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기 위해, 세 단계로 계략을 세웠습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이 나서고, 다음으로 사두개인들이 나서며, 마지막으로 서기관들이 나서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차례대로 예수님을 시험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이 나서서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에 관하여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지 못했습니다. 다음으로 사두개인들이 와서 부활에 관해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정치적인 질문도, 또한 사두개인들의 신학적인 질문도 예수님을 시험에 빠뜨리지를 못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서기관들이 나설 차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율법에 관해 물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의 계략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서기관들을 물리치신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매우 중요한 영적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28절).
막12: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물론 그 때 그 서기관이 즉흥적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22:34 말씀과 같이, 사두개인들의 계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바리새인들이 다시금 모였습니다.
앞서 바리새인들은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계략은 실패했습니다. 뒤이어 사두개인들이 나섰지만, 그들의 계략도 역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바리새파의 서기관들이 나섰던 것입니다.
당시에 제사장들은 주로 사두개파였습니다. 반면에 서기관들은 주로 바리새파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베끼는 일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인쇄기나 복사기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서기관들은 성경을 일일이 손으로 써가면서 베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서기관들은 성경을 잘 알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바리새파의 서기관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마22:35 말씀은 그를 가리켜 율법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서기관들 중에서도 율법에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우선 그 서기관은 예수님이 사두개인들에게 잘 대답하신 줄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에게 부활도 있고, 천사도 있고, 영도 있음을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바리새파의 서기관으로서, 예수님의 대답을 옳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고,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예수님에게 던졌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출애굽기 20장에는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십계명에 사용된 히브리어 글자의 수가 도합 613개입니다. 이에 따라 유대교의 랍비들은 율법을 613개의 계명들로 구분했습니다. 그 중에는 “하라”는 계명들이 있고, 또한 “하지 말라”는 계명들이 있습니다.
“하라”는 계명들, 곧 긍정적인 계명들의 수는 도합 248개입니다. 사람 몸에 있는 지체의 수와 동일하게 정리했습니다. 반면에 “하지 말라”는 계명들, 곧 금지하는 계명들의 수는 도합 365가지입니다. 1년의 날 수와 같도록 압축했습니다.
그런데 613가지나 되는 많은 계명들을 모두 다 기억하며 지키기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더 중한 계명과 더 경한 계명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많은 토론을 했습니다. 그들은 더 중한 계명일수록 마음에 더 깊이 새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서기관은 자기들이 늘 토론하던 문제를 들고 와서 예수님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물론 그의 질문은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22:35 말씀과 같이, 그는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무리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등을 돌리도록 만들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때 던진 서기관의 질문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계략이 될 수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모세가 절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모세보다도 하나님에게 더 가까운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출33:11 말씀과 같이,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하나님은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출34:35 말씀처럼, 모세의 얼굴에는 광채가 나서 사람들 앞에서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모세와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모세가 쓴 다섯 권의 책보다도 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은 있을 수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는 바리새인들도 사두개인들도 똑같이 인정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모세를 반대하시며 율법을 폐하시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마5:17 말씀처럼,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때 서기관들의 계략은 이러했습니다. 그들은 내심 예수님이 그 자신을 모세보다도 더 높이시기를 바랐습니다. 또한 그들은 내심 예수님이 모세의 글과는 다른 어떤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 모독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을 이단으로 몰아붙이며, 예수님은 메시야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열광하는 무리를 예수님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헛된 일을 꾸몄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의 어떠한 꾀도 예수님의 무한하신 지혜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서기관들의 계략은 오히려 예수님의 신성을 더 밝히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29~31절).
막12: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막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예수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아니하시고, 즉시 대답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도록 온전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율법을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서기관들은 내심 예수님이 모세의 글과는 달리 말씀하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모세의 글인 신6:4~5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 말씀이 너무나도 친숙한 구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신6:4~9에 있는 말씀을 가리켜 “쉐마”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씀의 히브리어 첫 단어가 “쉐마”였기 때문입니다. “쉐마”는 “들으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이 말씀을 암송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이 바라던 바는 무리 앞에서 예수님이 율법과는 다른 가르침을 준다는 사실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세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이 모세와 일치되심을 밝히 보이셨습니다. 그러니 서기관들의 계략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첫째가 되는 계명의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모세가 신명기를 기록할 당시, 이방 나라들은 제각기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죄다 헛된 신들이었습니다. 실상은 존재하지도 않는 신들이었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이십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신들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만일 신들이 여럿이라면,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한 신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까,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다해야 할 것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마음에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목숨을 다해야 합니다. 요15:13 말씀과 같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셋째, 뜻을 다해야 합니다. 사랑하려는 의지가 확고해서, 어떠한 형편에서도 변함 없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넷째,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요일3:18 말씀처럼, 말과 혀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막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곧이어 예수님은 둘째가 되는 계명을 밝히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 때도 예수님은 모세의 글인 레19:18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으려는 서기관들의 계략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무슨 뜻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먼저 자신을 사랑하고 중히 여기고 아끼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아침이면 누가 우리의 얼굴을 씻깁니까? 누가 우리 몸에 옷을 입히며, 누가 우리 입에 음식을 넣어줍니까? 이미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밀하게 돌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따로 배울 필요가 전연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는 우리가 우리 이웃의 필요에도 민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롬12:20 말씀과 같이, 심지어 우리는 우리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수까지라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31절 끝에서 결론적으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내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마22:40 말씀과 같이, 이 두 계명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말하자면 이 두 계명은 벽에 박힌 두 개의 못과 같습니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선지자, 곧 성경에 나오는 모든 계명들이 다 걸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십계명을 예로 들어봅니다. 내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하나님께 예배할 것입니다.
아울러 내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면, 내 부모를 공경할 것입니다. 살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간음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둑질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이웃의 것을 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지켜야 계명들은 결코 복잡하지 않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또한 내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원리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물리치셨습니다(32~34절).
막12: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서기관은 다소 실망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바라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성경대로, 모세의 글대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이 주신 “쉐마”의 말씀이 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때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라는 쉐마”의 말씀에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신4:35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을 돋보이게 했던 것입니다.
막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한편으로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서기관은 계속해서 자기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자기 나름대로의 주를 달아서 대답했습니다.
먼저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목숨을 다하고”를 뺐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뜻을 다하고”를 “지혜를 다하고”로 바꾸었습니다. 아울러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덧붙여서, 첫째와 둘째 계명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서기관이 한 말은 옳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미6:7~8 말씀처럼, 하나님은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보다도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더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막12: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님은 그 서기관이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셨습니다. 그 서기관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게,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을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언뜻 생각하면, 그 서기관은 예수님에게서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들어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은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에게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3장을 보면, 예수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공격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일곱 번이나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외식하는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외식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겉으로는 있는데, 실제로 속에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듯했지만, 실제 속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회칠한 무덤 같았습니다. 회칠한 무덤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했지만, 실제 마음으로는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을 미워하고, 같은 동족인 세리와 죄인도 미워했습니다. 마23:4 말씀과 같이,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분명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찔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이 끝맺음을 합니다.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물리치셨고, 다음으로 사두개인들을 물리치셨고, 마지막으로 서기관들도 물리치셨습니다. 이로써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세운 세 단 계의 계략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습니까?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 약하기에, 우리는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내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 약하기에, 우리는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온전하게 사랑하지 못한 죄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날로 우리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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