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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두개인들을 물리치신 예수님! (막 12:18~27)

사두개인들을 물리치신 예수님! (막 12:18~27)

 

 

때는 고난주간의 셋째 날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기 위해 계략을 세웠습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에게 보내고, 다음으로 사두개인들이 나서며, 마지막으로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공략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예수님의 결론적인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려 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침묵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의 계략은 신학적으로 어려운 질문을 던져서 예수님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실패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18~23절).


막12: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유대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파, 및 에세네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제사장들이 주로 사두개파였습니다. 고로 사두개인들은 성전을 관할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계략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신학적으로 차이가 많았습니다. 행23:8 말씀과 같이,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다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많이 다투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영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내세에 대한 소망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였습니다. 자연히 그들은 제사장이라는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누리는 부와 권력에 크나큰 장애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없애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이에 그들은 평소에 바리새인들과 다투던 문제, 곧 부활에 관한 문제를 들고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가 기록한 다섯 권의 책만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모세가 부활을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요5:29에서 예수님은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11:25에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자신을 가리켜 “나는 부활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죽임을 당하시지만 다시 살아나실 것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논쟁을 한판 붙어보자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부활을 가르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적으로 누가 옳고 그른지 한번 따져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막12: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대단히 명예로운 호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들만 “선생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에게 그 호칭을 쓴 것은 가룟 유다의 입맞춤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이 자기들보다 율법을 모른다는 점을 부각시키려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무리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속셈이었습니다.

곧이어 그들은 모세의 책 중에서 신25:5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열두 지파를 유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야 메시야가 유다 지파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특이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아들이 없이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죽은 자의 아내는 아무에게나 시집갈 수가 없었습니다. 반드시 죽은 남편의 형제들 가운데 미혼인 자와 결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첫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죽은 남편의 이름을 잇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첫 아들은 죽은 남편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후에 계속해서 둘째, 셋째 아들을 낳으면, 그제야 그 아들들은 현재 남편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38장을 보면, 야곱의 아들 유다의 집안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이 이 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를 악하게 보시고, 그를 죽이셨습니다. 뒤에 보아스가 룻과 결혼한 것도 바로 이 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사두개인들은 먼저 모세의 율법을 인용했습니다. 그런 후에 그들은 하나의 괴상야릇한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부활을 부정하기 위해, 그들이 짜낸 이야기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부활을 논쟁할 때, 이 이야기를 자주 써먹었을 것입니다.


막12: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막12:21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막12:22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정말 무서운 여자였습니다. 남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넷째 아들쯤 되면, 얼른 눈치를 챘어야 했습니다. 결혼을 포기하고, 멀리 도망을 쳤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맏형의 상속자를 세우기 위하여, 여섯 명의 아우들은 모두가 우직스럽게도 차례대로 그 여자를 아내로 취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맏형의 상속자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여섯 명 모두 차례대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아니면 죽은 자의 남자 친척들이 또다시 줄줄이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런 괴이한 이야기를 한 후에,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막12: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아마도 바리새인들은 이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때, 똑같은 모습으로 부활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이 땅에서 맺은 가족관계가 내세에서도 영원히 지속된다고 보았습니다.

바리새인의 주장대로라면, 여덟 사람 모두 이 땅에서와 똑같은 모습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들 일곱 형제는 다 같은 여자를 아내로 취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부활한 후에는, 일곱 형제 모두가 그 여자의 남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그들 일곱 형제는 모두 일부일처의 관계를 가졌습니다. 동생들은 형들이 죽고 난 뒤에, 차례대로 형수와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부일처의 관계가 부활 후에도 지속되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합니까?

사두개인들은 이처럼 뚱딴지같은 질문을 예수님에게 던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자기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시리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신 줄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24절).


막12: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의 잘못을 두 가지로 지적하시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첫째, 그들은 성경을 알지 못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진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우선 그들은 성경을 알지 못했습니다. 헬라어로 이 때 사용된 “못하다”와 24절 끝에 사용된 “아니다”는 단어가 같지 않습니다. 두 단어 모두 부정의 뜻을 나타내지만, 주는 의미가 다릅니다. “못하다”가 “아니다”보다 좀더 주관적이며 적극적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성경을 모르면서도, 성경을 알려 하지도 않았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성경을 알았더라면, 만일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이 죽은 자의 부활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하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게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안에 무궁무진한 보화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보화를 캐내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성경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대한 우주도 창조하셨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능력은 공허를 충만으로, 혼돈을 질서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때, 어찌 하나님이 죽은 자의 가족관계를 무질서하게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합시다. 그리함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날마다 체험하며 덧입고 사는 우리 모두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을 물리치셨습니다(25~27절).


막12: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때, 하나님은 죽은 자의 생전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살리십니다. 그러면 사람이 부활하면, 생전과는 어떻게 달라집니까?

사람이 이 땅에서는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갑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더라도,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육하며 번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부활하면, 다시는 죽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갈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는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돕는 배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부활하면, 돕는 배필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 때에는 모든 사람이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는 자기 가족을 최우선적으로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부활하면, 끼리끼리의 배타적인 사랑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신랑이시고, 우리 모두는 신부가 됩니다. 우리 모두는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똑같이 온전한 사랑을 나눕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살 때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가족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이어 예수님은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부활도 천사도 영도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부활할 때, 생전의 모습대로 다시 살아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부활할 때,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날 때는 천사처럼 된다는 말씀입니다.

천사들의 수는 줄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천사들의 수는 늘지도 않습니다. 천사들은 결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활하면, 우리는 천사들처럼 영적인 존재가 되어 죽지 않고 영원히 삽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곧 부활장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부활의 몸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몸은 육의 몸과는 달리 썩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스럽습니다.

말씀으로 천지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에게 육의 몸과는 다른 부활의 몸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 사두개인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막12: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이제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성경을 알지 못함을 지적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가 쓴 다섯 권의 책들만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을 인용하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모세의 글인 출3:6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호렙 산의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사람 편에서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세보다 이미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따라서 사람 편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셔야 옳았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노라.”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과거형을 쓰지 아니하시고 현재형을 사용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살아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몸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은 몸은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실제로 이제 며칠 후면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실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써 예수님은 부활이 있음을 친히 보여주실 것입니다. 


막12: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죽은 자는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산 자만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의 경배를 받고 계신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들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모세의 글에서도 내세가 있음을, 부활이 있음을 밝히 보이셨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성경의 일점 일획도 소홀히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사용된 시제까지라도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사두개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부활도 영도 천사도 없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진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마22:33 말씀을 보면, 그 때 무리가 듣고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인용하신 모세의 글을 깨닫지 못했을까?” 아마도 무리는 그와 같이 생각하면서 의아스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결국 사두개인들은 무리 앞에서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함을 스스로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눅20:40 말씀과 같이, 그들은 예수님에게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로써 사두개인들의 계략도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바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신성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사두개인들도 예수님을 계략에 빠뜨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무한하신 지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둘째, 성경에 대한 예수님의 애착입니다. 예수님은 상황에 합당한 성경말씀을 정확하게 아시고, 그 성경말씀을 적절하게 인용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성경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하기 바랍니다. 

셋째,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확증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말씀하셨고, 또한 자신이 친히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부활도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헌신과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알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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