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18-25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어느 마을에 아주 절친한 친구사이인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두 사람의 사이가 몹시도 나빠졌습니다. 그들은 근 일 년간을 서로 말도 안하고 못본 척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사람이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그는 깊이 뉘우쳤습니다. "내가 이렇게 해서는 안되지!" 그는 친구와 다시금 화해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화해를 위해서 자기의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로부터 아무런 답장이 없습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친구에게 화해의 편지를 썼습니다. 때로는 길게 쓰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짧게 쓰기도 했습니다. 계속해서 십여 통의 편지를 보내었지만 친구에게서는 아무런 답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 따라 몹시도 추웠습니다. 그는 눈보라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친구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안되겠다. 아무래도 내가 친구를 직접 찾아가 보아야지!" 그는 눈보라의 거센 바람을 헤치면서 친구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그의 다른 한 친구는 대문을 열면서 하얀 눈을 흠뻑 맞고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 친구의 얼어붙었던 마음은 눈 녹듯이 녹아 내리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굳은 악수를 하고서 그 동안의 모든 오해를 풀고 서로 화해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전의 절친했던 친구사이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하시기 위해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직접 우리를 찾아오셔야만 했습니다. 그 분은 누구이십니까?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22:41이하에 보면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한 번은 예수님의 주변에 바리새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어찌해서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자신의 주라고 칭하였느냐?"
그 질문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능히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서 인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의 자손이십니까? 마태복음 1장은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우리에게 답변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전반부인 1∼17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적인 족보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인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여기서 "세계"라는 말은 족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인적인 족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 곧 인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신성만 가지고는 죽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으실 수가 없으니까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셔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하반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족보를 통해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의 특이한 점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18∼20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둘째로, 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야 했는지 성탄의 목적에 대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21∼23절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관련해서 헌신했던 요셉의 순종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4∼25절의 내용입니다.
이제 말씀을 한 절씩 읽어가면서 묵상하는 가운데, 성탄의 주인공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 속 말구유를 환하게 비추어주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의 특이한 점을 살펴봅니다.
1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8절에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결혼을 세 단계로 나누어서 시행했습니다.
첫째 단계는 약혼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부모들끼리 결혼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정혼입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결혼 정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결혼할 당사자가 자기 입으로 랍비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서약하는 것입니다. 정혼이 되면 일단 법적으로는 부부입니다. 그래서 "남편, 아내"라고 칭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 정혼한 기간에 남편이 죽게 되면 아내는 처녀과부가 됩니다. 한 번도 동거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혼한 기간 동안에 파혼을 하려면 이혼의 절차를 거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셋째 단계는 결혼입니다. 정혼하고 나서 일 년쯤 지나면 결혼잔치를 배설합니다. 그리고는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와서 동거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리아와 요셉은 정혼했습니다. 법적으로는 부부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잉태를 했습니다. 18절 하반부에 보니까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점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육신의 부모님이 계십니다. 먼저 나를 낳아주신 인간의 어머니가 계시고, 또 나를 낳게 해 주신 인간의 아버지가 계십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육신에서 태어났습니다. 육신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도 육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육신으로 태어나지는 않으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면서 인간의 어머니는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려면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가지셔야 하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면서 인간의 아버지는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신성을 가지셔야 되니까 성령으로 잉태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흠없는 화목 제물로 바쳐지셔야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죄와는 상관없는 분이 되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신성을 위해서 인간의 아버지는 허락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에서 태어나셨지만 육신으로 나지는 않으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또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으면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면 그런 줄 알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신앙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이성적으로는 이것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도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리아가 잉태를 했습니다. 요셉은 자기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요셉은 마리아가 자기의 아이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배었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율법에 따르면 마리아를 돌로 쳐서 죽여도 아무도 대꾸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아니했습니다. 19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은 그 아내 마리아가 육체적인 고통 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정신적으로 수치와 조롱을 당하는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가만히 끊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서 끊는다는 것은 이혼을 뜻합니다. 이미 요셉과 마리아는 정혼한 사이로서 법적으로는 부부입니다. 만약 요셉이 이혼하기 위해서는 이혼증서를 써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음행을 연고해서 이혼증서를 써 주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적당한 구실을 찾아야 했을 것입니다. 예컨대 음식솜씨가 너무 형편없거나, 또 알지 못했던 병을 가지고 있을 경우입니다. 그 당시는 이러한 사유로도 이혼이 가능했습니다. 하여튼 이러한 적당한 구실로 이혼증서를 써 주어서 자기 이외에 아이를 배게 한 남자에게로 돌려주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20절 말씀을 보십시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요셉은 그 일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에게서 한 가지 배울 점이 있습니다. 지금 요셉은 엄청난 일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에게는 입을 열지 아니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입을 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지혜로운 길인지, 그것을 곰곰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고민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20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하나님은 요셉의 꿈속에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가리켜서 다윗의 자손으로 불렀습니다. 말하자면 요셉이 다윗의 혈통으로서 그리스도의 나심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입니다. 20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게 되었을 때 마음에 많은 위로를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요셉처럼 무슨 일을 당하든지 사람에게는 입을 봉하고 사십시다. 하나님에게만 입을 열고 기도에 힘쓰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귀하게 쓰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는지 성탄의 목적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을 누가 지어주셨습니까? 천사가 지어준 것입니까? 아닙니다. 천사는 그저 그 이름을 전해 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지어준 것입니까? 아닙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의 이름을 짓는 것은 아버지의 고유권한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이 그 이름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구원하시리"(Jehovah will save)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호세아라든지, 여호수아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모두 똑같은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과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들은 그저 자기의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무엇이라고 밝히고 있습니까? 21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예수님을 믿는 자,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하게 씻음 받기를 원하는 백성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어디서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까? "저희 죄에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거룩한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해서 우리를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 아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실 때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케 하신 것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미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예언된 것입니다. 22∼2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
옛날 유다 왕 아하스 때였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왕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은 연합해서 유다를 침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 나라에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 왕 아하스는 당연히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종 선지자 이사야를 아하스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게 하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
여러분,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유다가 전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으로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 말씀을 주신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시니까 적군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힘있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유다 왕 아하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성에서 금과 은을 취해 그것을 앗수르 왕에게 보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선지자 이사야는 두번째 아이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그 아이가 태어나서 선과 악을 구별하고 또 버터와 꿀을 먹을 때쯤 되어서는 유다를 침공하고자 하는 두 나라가 황폐하게 되리라."
과연 이사야 가정에 두번째 언급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마헬살랄하스바스였습니다. 그 아이가 태어나서 세 살쯤 되었을 때,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 이스라엘 왕 베가가 죽었습니다. 아람 왕 르신도 죽었습니다. 그 결과 유다는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유다는 그들 두 나라와 전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보존해 주시고 지켜주신 것입니다.
두번째 아이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었다면, 첫번째 아이에 대한 예언도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때가 찼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지켜주시기 위해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저버리는 법이 없으십니다. 여러분, 힘든 일을 당하셨습니까?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괴롭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나를 저버리고 떠나버린다 할지라도, 그러나 우리 곁에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영원한 임마누엘이 되십니다.
내 힘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불가능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하신 분이십니다.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보내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요셉의 헌신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요셉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꾸물거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셉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습니다. 곧바로 결혼잔치를 벌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여러분, 요셉이 본래 계획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의 뜻을 꺾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한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 따지지도 않았고 또 마리아에게 가서 설명할 필요도, 들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저 즉각적으로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25절 말씀을 보십시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요셉은 마리아의 뱃속에 잉태해 있는 생명이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아들을 낳기까지 마리아와 동침하지 아니했습니다. 거룩히 구별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아서 그 이름을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분부하신 대로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한 것입니다. 요셉의 이 순종이 우리 모두의 순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옛날 시골 마을을 순회하면서 손님들을 태워 나르는 버스가 있었습니다. 그 날도 버스 안에 손님을 가득 태웠습니다. 그리고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습니다. 꼭대기까지 올라갈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려올 때 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것입니다.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산을 굽이굽이 내려올 때마다 가속도가 붙어 차는 손살같이 내리막길을 질주했습니다. 차가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하는 가운데, 손님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버스 안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완전히 공포의 도가니로 바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버스기사는 손님들을 진정시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내리막길은 무사히 다 내려왔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을 어귀에 있는 다리만 지나가면 곧 언덕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차가 멈추어 서게 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차가 마을 어귀에 있는 다리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버스기사는 너무나도 깜짝 놀랐습니다. 다리 한복판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놀고 있는 것입니다. 브레이크는 말을 듣지 않습니다. 클락션을 급히 울렸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아이들은 다리 옆쪽으로 피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만큼은 유독 겁을 먹지 않고, 그 자리에 머뭇거리면서 그대로 서 있는 것입니다. 기사는 순간적으로 아찔했습니다.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으면, 차는 다리의 난간에 부딪혀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승객들이 죽거나 다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질주하게 되면, 아이는 차에 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버스는 그대로 질주해 버렸습니다. 아이는 차에 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차는 언덕에 이르렀고 자동적으로 멈추었습니다. 버스 기사는 얼른 차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차에 치인 아이 곁으로 뛰어왔습니다. 이미 아이는 죽어 있었습니다. 기사는 아이를 품에 안았습니다. 그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하염없는 눈물만 떨어뜨리고 있었습니다. 승객들은 하나 둘씩 운전사 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가 한 마디씩 했습니다.
"어떻게 운전을 그렇게 하느냐? 정비되지도 않은 차를 왜 끌고 나왔느냐? 난폭 운전수! 살인마!"
이런 등등의 폭언과 욕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뒤늦게 현장에 이른 한 청년이 그 광경을 보고서 승객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제발 좀 그만 하세요! 그 분을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승객들은 의아스러운 눈으로 그 청년을 쳐다보았습니다. 청년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 아이는 바로 버스기사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그만 괴롭히세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성탄절은 기쁜 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해서 하나님의 아픈 심정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하나님은 이 못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며 죽게 만드셨습니다. 그리해서 나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을 맞이해서 하나님의 망극하신 사랑과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요셉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하루하루 우리의 삶이 요셉처럼 헌신된 아름다운 모습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