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박상훈목사

[스크랩] 밭의 가라지의 비유! (마태복음 13:24~30)

밭의 가라지의 비유! (마태복음 13:24~30) 
     
마 13:24-30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본문이 기록되어 있는 마태복음은 특별히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있는 복음서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왕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배척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있어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그 까닭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의 마음 밭이 옥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길가와 같이 단단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돌밭처럼 흙이 얇던지, 그들의 마음 밭 속에 가시떨기가 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밭이라면 아무리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도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이 또 생기는 줄 압니다.
"도대체 왜 세상에는 그러한 마음 밭이 생겼는가? 왜 예수님은 자기를 영접치 아니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가? 또 언제까지 내버려 두실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비유를 해 주셨습니다. 비유의 제목은 36절에서 제자들이 밝힌 것처럼 "밭의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그 내용은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나아가서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곡식만 뿌렸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원수가 몰래 와서는 밭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 같으면 앙심을 품고 집에 불을 지를텐데, 유대 나라에는 돌로 집을 만들었으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타나는 대로 몰래 밤중에 가서 가라지를 덧뿌리는 일로 복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법을 보면 이런 일을 금지하는 조항을 만들어 놓을 만큼 이런 일은 이따금씩 있었습니다.
원수가 뿌린 가라지는 일명 다른 말로 "독보리"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그 이삭에는 독이 있습니다. 먹으면 배탈이 납니다. 위로는 구토를 하게 되고, 아래로는 설사를 하게 됩니다. 심하면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그 이삭을 먹으면 안됩니다.
또 이 독보리는 말 그대로 보리와 너무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싹이 트고 자라는 동안에는 분간이 잘되지 않습니다. 나중에 이삭이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보면 종들이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나중에 결실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밭에 가라지들이 많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종들은 깜짝 놀라 주인에게 달려왔습니다. 밭에 가라지가 어쩌다 한 두 개 있었으면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밭에는 여기저기에 수많은 가라지들이 자라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주인에서 고해 바쳤습니다. 종들은 가라지의 출처가 어디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원수의 소행인 것을 즉시 알아차렸습니다. 종들은 주인을 위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밭에 나아가서 가라지를 다 뽑아 버리기를 원하시나이까?"
그 때 주인은 종들에게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29∼30절 말씀입니다.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그 뒤에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다른 비유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비유를 말씀하셨던 바닷가를 떠나서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밭의 가라지의 비유의 뜻이 무엇인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37∼43절에서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시면서 제가 붇는 질문에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누구입니까? "인자."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        리키는 말입니다.
2) 밭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세상."
3)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4)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
5)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
6)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7) 추숫군은? "천사들."
8) 가라지의 운명은? "불에 사르는 것같이."
9) 천사들을 보내시는 분은? "인자."
10) 천사들이 이 땅에서 거두어 낼 가라지들은 무엇입니까? "모든 넘어지게 하         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
11) 가라지들이 던져질 곳은? "풀무불."
12) 그곳에서 가라지들이 보일 반응은?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 의인들이 갈 곳은? "아버지 나라."
14) 의인들이 받을 영광은? "해와 같이 빛나리라."
15)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마감하시면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무엇         입니까? "귀있는 자는 들으라."
오늘 우리는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편의상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밭에는 곡식도 자라지만 가라지도 함께 자랍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는 언제나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아들들도 살아갑니다. 그러나 악한 자의 아들들도 버젓이 활기를 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학교에 다닙니다. 같은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습니다. 또 같은 직장에서 일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41절 말씀대로 가라지는 곡식들을 넘어지게 합니다. 그리고 불법을 행하면서 곡식들을 괴롭힙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부르짖습니다.
"주여, 저 몹쓸 가라지들을 왜 그대로 내버려 두십니까? 왜 당장에 처치하지 아니하십니까? 언제까지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그 때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 너희를 위해서니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을 다치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추수 때까지 그대로 자라게 두어라."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주인이 가라지를 즉시 뽑지 않습니까? 곡식을 위해서입니다. 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설령 가라지 열 개를 못뽑더라도 곡식 하나를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 주인의 마음입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가라지를 뽑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이 말씀은 악을 조장하고 방치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선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잠16:4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에게 능력이 없거나, 하나님에게 실수가 있으셔서 우리 곁에 가라지를 있게 한 것이 아닙니다. 다 우리에게 쓸데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목자가 양들을 칩니다.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서 실컷 배불리 먹게 했습니다. 양들이 배가 불렀습니다. 저녁이 되었습니다. 목자를 따라서 우리로 들어왔습니다. 양들은 어리석습니다. 배가 부르면 그냥 드러누워 잡니다. 배탈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자다보면 서로 깔려서 죽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목자는 양들 사이에 염소 몇 마리를 집어넣습니다. 염소는 양들이 자기 옆에 다가오면 뿔로 받아버립니다. 그러면 양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피해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저절로 운동을 하게 되고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날이 되면 또 목자를 따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나가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그 사이에 염소를 넣는 것입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 바다로 나가서 고기를 잡습니다. 잡힌 고기를 좁은 공간에 놓고 운반하다보면, 항구까지 오는 동안 물고기는 힘이 다 빠져 버립니다. 물 위에 둥둥 뜨게 됩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어부는 바다에 나가기 전 상어 새끼 몇 마리를 준비해 갑니다. 그러면 좁은 공간 속에서 잡힌 물고기들은 상어 새끼에게 물리지 않으려고, 이리 도망 다니고 저리 도망 다닙니다. 그러다 보면 물고기들은 싱싱해 지고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 항구까지 이를지라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팔팔하게 살아서 오는 것입니다. 어부는 물고기들을 위해서 일부러 상어 새끼 몇 마리를 넣는 것입니다.
곡식과 가라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곁에 가라지가 있기 때문에 곡식은 오히려 더 강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힘을 얻고 모진 비바람도 참을 수 있는 인내력이 배양되는 것입니다. 또 곁에 가라지가 있기 때문에 비가 오더라도 귀한 흙이 쓸리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가라지와 같은 사람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괴로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하는 법이 없으십니다. 다 우리를 위해서 그것을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너무 힘들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가라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구나!"라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가라지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는 결코 추숫군이 아닙니다.

3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세상 마지막 때에 가라지를 다 거두어서 불사르게 단으로 묶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추숫군이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결코 가라지를 뽑을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번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도중에 어떤 사마리아인들의 촌에 잠시 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 저녁 그곳에서 유숙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대인인 것을 보고서 자기 마을에 못들어오게 거부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예수님의 두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성급하게 예수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서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제자들을 데리고 다른 마을로 물러가셨습니다.
여러분, 야고보와 요한의 잘못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추숫군이 아닌데도 추숫군처럼 행세를 하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 눈에 가라지처럼 보인다고 그들을 자기들 손으로 즉시 뽑아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추숫군이 아닙니다. 또 지금은 추수 때가 아닙니다. 심판의 때가 아닙니다. 은혜의 때입니다. 긍휼의 때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밖에 있었을 때는 다 가라지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저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 믿고 의롭게 하시고 가라지와 같았던 과거의 모든 삶을 청산케 하시고, 곡식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곁에 가라지와 같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뽑을 권리가 없습니다. 그들을 쉽게 정죄하고 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가라지와 같은 삶을 속히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곡식의 삶을 살기를 바라면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의 세리와 창기들은 명백하게 가라지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친구처럼 대하셨습니다.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결국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사랑의 감화를 받고, 가라지의 삶을 청산하고 곡식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가운데 분명한 가라지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라지와 같은 그의 발도 씻겨 주셨습니다. 아마도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더 깨끗하게 씻겨 주셨을 것입니다. 또한 마가의 다락방에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드시면서 예수님이 열 두 제자 가운데 누구에게 대표로 떡을 떼어 주셨습니까?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높여주는 표시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명백한 가라지와 같은 가룟 유다지만, 사랑의 감화를 통해서 그가 돌아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거듭거듭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피땀 흘리시며 간절히 기도하고 나셨을 때입니다. 가룟 유다가 군병들을 이끌고서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습니다. 그는 군병들에게 보내는 신호로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런 가룟 유다를 향해서 예수님은 친구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드디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우셨을 것입니다.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은 가라지들을 위해서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의 이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추숫군이 아닙니다. 가라지를 뽑을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남을 쉽게 정죄하고 심판하려고 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끝까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권면하며 그들을 위해서 축복으로 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추수 때가 있습니다.

심판 때입니다. 곡식과 가라지가 결정적으로 분리되는 순간입니다. 곡식과 가라지가 자기 갈 길로 가는 때입니다. 가라지는 다 모아서 풀무불에 던진다고 했습니다. 풀무불은 지옥을 상징합니다. 풀무불의 온도는 대략 섭씨 1000도씨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불은 결코 꺼지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영영한 불입니다. 계21:8에 보면 지옥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라고 했습니다. 뜨거운 불 때문에 고통스럽고, 유황이 탈 때마다 유독가스가 심하게 풍겨져 나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무엇입니까? 그곳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세세토록 밤낮없이 고통 가운데서 울며 이를 가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반면 곡식들은 아버지 나라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실수하는 법이 없으십니다. 결코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다 모아서 아버지의 나라로 들려 보내십니다. 그곳은 빛과 사랑이 충분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의인들은 위로를 받으면서 해와 같이 빛나고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왜 이 땅에 가라지들이 있는지, 왜 왕되신 예수님이 가라지들을 내버려 두시는지, 언제까지 내버려 두실 것인지 살펴 보았습니다. 왕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이 세상 속에 심으셨습니다. 아무도 없는 외딴 산 속에 심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밭, 곧 가라지들이 많은 이 세상에 우리를 심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자기 밭에 가서 열심히 땀흘리며 일을 했습니다. 잠시 쉬기 위해 밭 곁에 있는 큰 느티나무 그늘에 가서 팔베개를 하고 누웠습니다. 누워서 푸른 하늘을 쳐다봅니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있었습니다. 무심코 하늘을 쳐다본 농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구름들이 뭉쳐서 두 개의 글자를 이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한 글자는 "그"자였습니다. 또 한 글자는 "전"자였습니다.
"그와 전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는 틀림없이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인가 계시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는 가운데 불현듯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 맞아! 바로 이것이구나! '그'자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이고, '전'자는 전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리스도를 전하라!'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임에 틀림없어!"
그는 그렇게 믿고서 농사짓던 일을 다 팽개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도회지에 있는 성경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라고 사명을 주셨으니까, 교회만 개척하면 하나님이 뒤에서 팍팍 밀어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해 보니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한 번 와서 보고 그 다음주부터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목회가 되겠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사람은 농부답게 우악스럽게 생겼습니다. 거기다 말까지 더듬었습니다. 목회자로서의 자질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목회가 될 리 없습니다.
결국 깊은 회의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평소에 자기가 존경하던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조심스럽게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형제여, 형제가 그 날 보았다는 '그'자와 '전'자를 형제처럼 해석하지 말고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어떻겠습니까? '그'자는 그리스도를 열심히 믿고, '전'자는 자기의 생업에 전념하라고 말입니다."
그제야 농부는 자기의 성급했던 판단과 경솔함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자기가 평소에 하던 일을 천직으로 생각하고서 그 일을 감사함으로 다시금 열심히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삶 속에서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썼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이 세상 가운데 우리를 심으셨습니다. 그저 깊은 산 속의 기도원에 가서 수도 생활이나 전념하라고 우리를 심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세상 가운데서 빛이 되고 세상 가운데서 소금이 되라."
물론 우리 주변에 가라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가라지들 때문에 괴로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힘들어하지 마십시다. 가라지들이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그만큼 더 순수해 지고 빛나는 것입니다. 가라지들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더욱더 연단받는 것입니다. 아울러 내 곁에 가라지들이 있기 때문에 내 사명이 더욱더 귀하고 빛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될 그 날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 가운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매일 매순간 충실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