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밥 버포드(Bob Buford)의 저서 ‘후반전(Half Time)’은 많은 지도자들에게 충격과 감동을 주었던 책입니다. 저자는 인생을 하나의 운동 경기로 보았습니다. 이미 인생의 전반전을 치르고 후반전만 남겨놓고 있는 사람들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질문에 따른 대답을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생이 여름철의 벼와 같다면 어떤 비료를 뿌려야 농사에 실패하지 않고 풍성한 추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버포드는 인생의 후반전을 35세부터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35세부터는 인생의 계획과 목표를 성공하겠다. 부자가 되겠다는 것에서부터 가치 있는 일, 의미 있는 일로 전환하라”고 인생의 개혁을 조언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세상 떠나는 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훌륭한 추수를 기대한다면 의미 있고, 뜻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인생을 쏟아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개혁 없이는 종교의 개혁이 없고, 신앙이 새롭게 되지 않고는 교회가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중세 교회가 부패하고 지나치게 제도화되어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1517년 10월31일,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독일의 비텐베르그 성당 정문에 붙이고 교회의 잘못을 직고했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외침을 시작으로 종교개혁의 불길은 급속도로 전 유럽을 향해 번져갔습니다. 교회의 잘못된 관습과 성경으로부터 벗어난 오류를 시정하자는 순수한 차원에서 시작한 개혁이었으나 사회개혁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작금 한국 교회의 각 교단이나 신학교에서 개혁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보다 교회개혁이라는 소리가 더욱 거세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종교도 새로워지고, 교회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신앙이 새롭게 되지 않고는 기대할 수 없는 명확한 과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개혁이라는 단어는 ‘Reformation’입니다. 엉망이 된 형식, 체제, 판을 뜻하는 폼(Form)을 다시 짜는 포맷입니다. 즉 바이러스 감염이 된 컴퓨터 시스템을 치료하기 위해서 디스크를 지우고 운영체제를 다시 설치하여 처음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처럼 거짓 정보와 잘못된 습관, 파괴적인 영성, 이기적인 인간의 욕망과 더러운 행동으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신앙체계를 지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개혁입니다. 본문에 보니 히스기야가 유다 왕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우상을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선친 아하스는 우상숭배에 깊이 빠졌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산당들과 우상들을 제거하는 신앙개혁을 주도하였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놋뱀이 백성들의 우상이 된 것을 보고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 즉 놋조각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놋뱀은 광야에서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고침을 받게 하였던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후대 사람들은 마치 놋뱀이 병고침이나 능력을 주는 것처럼 숭배하였기에 히스기야는 우상이 된 놋뱀을 놋조각일 뿐이라고 외친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히스기야 왕은 소홀하게 여겼던 하나님과의 언약을 회복시키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성전 안에까지 들어온 부정한 물건들을 과감히 버렸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올바르게 드림으로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신다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코람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정신으로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기억하고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어떻게 행할 것인가 숙고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어떻게 행하였습니까? 첫째로 정직하여야 미국의 백화점 왕 페니(J.C.Penny)는 신앙과 신념의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콜로라도에 큰 정육점을 냈습니다. 양질의 고기는 주로 호텔에 납품되었습니다. 그런데 호텔 주방장이 끊임없이 뇌물을 요구했습니다. 페니에게 뇌물은 신앙 양심상 허락되지 않았습니다.“뇌물을 주면 손해를 보는 쪽은 고객들이다. 그만큼 질이 나쁜 고기를 납품하게 된다. 정직이 나의 경영철학이다.” 결국 주방장은 고기 납품을 중단시켰고, 온갖 악소문을 퍼뜨려 그의 사업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페니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사업은 망했으나 신념은 변치 않았고 오히려 더 확고해졌습니다. 그는 가게문앞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righteousness)는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을 크게 써서 붙이고 잡화점을 열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의 이런 모습을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에 감동한 크리스천들이 가게를 이용해 주었고 가게는 놀랍게 번창했습니다. 페니는 정직을 바탕으로 95세로 세상을 떠난 1971년, 미국 전역에 무려 1,660개 점포가 운영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정직은 반드시 인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일관성 있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신앙에 기복(起伏)이 있기 마련이지만, 꾸준한 게 중요합니다. 히스기야는 사람 앞에서의 정직보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였습니다. 정직히 행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직하게 사는 것이 때로 어리석고 미련해 보이는 것 같으나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비결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정직하느냐’ 의 문제는 ‘믿음이 어느 정도이냐’ 묻는 것과 같습니다. 정직으로 믿음을 증명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살기를 힘썼던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는 흠과 티와 허물이 많은 인생이었으나 하나님을 향한 정직이 있었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 잘못을 깨우칠 때 하나님 앞에서 정직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노라고 정직하게 고백하였기에 용서받고 재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의지하여야 1850년 영국 도버의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난 루이자(Louisa M. R. Stead)는 미국으로 건너가 스테드를 만나 결혼하였습니다. 어느 여름날 남편과 루이자는 4살 난 딸을 데리고 뉴욕의 롱아일랜드 해수욕장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때 소년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남편은 소년을 구하러 바다 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소년과 함께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루이자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찬송시를 주셨습니다. 찬송가 542장입니다.“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허락하심 받았으니 의심 아주 없도다.” 그 후 그녀는 딸을 데리고 1917년 남아프리카의 남부 로디지아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선교사로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떠나고 하나님 앞에서 깨달은 것은 남편이 의지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구주 예수가 자신의 영원한 의지의 대상인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고귀한 믿음이 아닙니까?
본문 5절입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히스기야는 우상으로 변질된 놋뱀을 부수고 단순한 놋 조각이라고 외친 개혁 조치는 왕위를 위협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전통을 깬 정도가 아니라 전통을 짓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갔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만큼 하나님을 의지한 왕이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고 본문은 증거합니다. 히스기야는 무기를 의지한 것도 병력을 의지한 것도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국난을 극복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사람을 두려워하면 우상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우상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토니 캠폴로(A. Tony Campolo)의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지갑에 당신의 사진을 넣고 다닌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진을 품고 다녀야 합니다. 하나님을 품고 하나님만 의지할 때 축복과 치유가 나타날 것입니다.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자만이 참된 복을 받습니다. 부디 히스기야처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연합하여야 음악가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이 유럽에서 가장 값비싼 오르간을 소장하고 있는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올개니스트의 연주를 듣고 한 번 연주해 볼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귀한 오르간을 연주하게 하겠느냐?” 라며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여러 차례의 부탁 끝에 겨우 멘델스존이 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손끝에서 오르간은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었고 환상적 음악이 성당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연신 감격하며 연주를 듣고 있던 그가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물었습니다. 멘델스존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그 연주자가 말했습니다. “제가 눈이 멀어서 당신 같은 위대한 음악가의 연주를 방해하고 말았습니다.” 혹시 우리도 하나님께서 삶을 연주하고자 하시는 손길을 방해하는 일은 없습니까? 삶을 하나님의 손에 내어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연합되어지면 축복의 열매가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기의 ‘연합한다’는 말은 ‘꼭 붙어있다’는 뜻입니다. 밀착되듯이 긴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늘 영적으로 깊은 교제를 한다는 뜻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과 연합하여 떠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가까이 하며 살아가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상과 연합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세상의 향락이나 물욕과 연합하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합된 신앙이 되어야 마귀가 틈타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개혁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외와 순종의 자세가 없는 한 신앙개혁은 구호에 그치고 맙니다. 말씀 대신에 엉뚱한 것으로 포장하여 그럴듯한 모양을 내면서 이만하면 괜찮은 신앙이라고 착각하며 무감각한 신앙인으로 살아갑니다. 스스로 속이는 것이며 다른 사람도 속이는 잘못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제도의 개혁을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개혁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새로운 변화를 보여야 합니다. 아무리 논리로 개혁되어야 한다고 외쳐봐야 소용이 없고 실제적 변화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스스로 개혁되려는 강력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516주년을 맞이하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칼빈의 전통을 계승하는 교회들은 스스로를 개혁된 교회(reformed church)라고 주장하지만 루터의 전통을 따르는 교회들은 스스로를 개혁하는 교회(reforming church)라고 말합니다. 사실 교회 개혁은 늘 현재진행형이어야지 어느 한 시기에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조상인 종교개혁이 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축복된 자녀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개혁교도라는 것을 자랑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를 짓눌렀던 미신을 행하지 않는 것을 자랑하고,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 특별히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교인들이 개혁을 위한 땀방울을 흘리는 데 인색한 것을 경고한 말로 보입니다. 개혁되어야 할 것은 제도로서의 종교뿐만이 아닙니다. 제도의 일부분인 우리의 삶이 개혁되지 않는다면 교회는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스스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인가 질문하여야 합니다. 과연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모습입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십니까?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연합하고 사십니까?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현실이 아무리 척박하다 해도 말씀의 쟁기로 마음 밭을 갈아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복음의 씨앗을 다시 뿌려야 합니다. 개혁자 루터처럼 담대한 믿음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부디 스스로 보기에 족한 신앙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신앙을 소유하기에 힘쓰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