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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눅 13:6~9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눅 13:6~9
이름 김광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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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없음

바둑의 고수들은 바둑을 두는 내내 계가(計家)를 하며 둔다고 합니다. 중반의 계가는 냉철한 국면의 대세 판단이면서 동시에 냉엄한 자기비판이기도 합니다. 죽음의 종국을 앞두고 살아가는 인간에게도 중반의 계가가 필요합니다. 하루와 한 달마다 스스로의 삶을 계가해야 합니다. 바둑의 교훈을 보다 구체화한 것이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생전묘비명(生前墓碑銘)의 교훈입니다. 버나드 쇼는 익살스럽게도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라는 묘비명을 생전에 남겼습니다. 그러나 웃어지지만 않는 것이 그의 익살입니다. 독설의 익살 속에서 언제나 번뜩이는 삶의 지혜를 주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인생들이 날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계가하고 그 결과를 스스로의 묘비명으로 기록한다면 잘못은 뉘우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 뒤를 생각하는 뉘우침은 필경 뉘우침 없는 내일로 이어지게 할 것입니다. 삶의 계가와 생전묘비명으로 스스로 뼈를 깎으며 살아간다면 죽음 뒤에도 사랑을 누릴 수 있습니다. 혹시 우물쭈물하다가 한 해를 보내는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닙니까?

한 사회학자가 현대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95%는 벤치 워머(bench warmer)에 불과하다고 비평합니다. 의자만 따뜻하게 데우는 교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교인의 대부분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따뜻하게 데우고 나가는 것이 교회를 향한 유일한 기여입니다. 다른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자들을 향해 어찌하여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라고 책망하십니다. 동시에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나무, 존재 이유를 다 하지 못하는 나무마다 찍어버리겠다고 경고하십니다.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자칭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그 증거가 없는 자에게 주신 준엄한 말씀입니다. 언제까지 무책임하고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신앙생활을 계속할 것입니까?

본문을 통해 예수께서 두 가지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총독 빌라도가 예루살렘 순례자들과 갈릴리 사람들을 정치적 반란죄로 살해한 사건과 실로암 망대가 갑자기 무너진 사건입니다. 이러한 불상사를 바라보던 자들이 예수께 나와 질문을 합니다. “저들이 죽은 것은 나쁜 자들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받아들일 수 없는 자들이었기에 징계하신 것이지요? 살아남은 우리들은 저들보다 낫지요?” 당시 사람들은 재난으로 죽은 사람들은 자신보다 죄가 많았기에 죽은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을 하십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도리어 비판의 방향을 자신을 향해 돌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자신을 비판할 줄 아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자신을 비판할 줄 알고 자기 문제를 직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할 때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내 속에 악이 있습니다. 게으름이 있습니다. 못된 성품이 있습니다라고 참회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기 위해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또한 회개는 자리에 대한 책임을 지는 행위입니다. 누구나 부모로서 지켜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스승으로서 지켜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자녀로서 지켜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성도로서 지켜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그 모습이 바르게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땅만 버리는 자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의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사랑을 알았는가

데이비드 베너(David G. Benrer)는 미국 조지아주의 애플랜타에 설립된 영성치료연구소의 대표이며, 심리학연구소의 영성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표작으로 ‘Surrender to Love’ 라는 책이 있는데 사랑에 항복하다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책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전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놀랍게 발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현기증이 날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그 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깊이, 무모하게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 분의 사랑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에 항복하여!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능히 그렇게 될 줄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게 됩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50%도 안 된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 앞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본문 6절입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별한 사랑이 있음을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두움의 존재였던 우리들, 죄와 진노의 자식이었던 우리들,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인 우리들을 생명의 자리로 인도하여 주신 것이야말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고 계십니까?

많은 나무를 제치고 무화과나무를 택한 것은 주인의 절대적 주권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을,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포도원지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포도원은 교회를 비유합니다. 잘난 자를 택하지 않고, 세상이 알아주는 자를 택하지 않고, 별 볼일 없는 존재를 택하신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우리가 잘나지 못했음에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랑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볼품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원대한 계획을 가지시고 우리를 영광된 일에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땅만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둘째로 열매를 맺었는가

독일의 화가 뒤러 (Albrecht Durer)가 그린 기도하는 손에 담긴 일화입니다. 뒤러와 한스는 화가의 꿈을 안고 도시로 갔습니다. 그러나 둘은 가난했으며 돈벌이를 하면서 그림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그때 친구 한스가 말했습니다. “뒤러, 네가 먼저 그림을 배워라. 내가 돈을 벌어서 돕겠다. 나중에 성공해서 그림이 잘 팔리면 나는 그때 그림 공부를 하도록 할게.”뒤러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한스가 진심으로 권했습니다. 결국 뒤러는 그림 공부에만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한스는 고생을 해가며 뒤러의 학비를 댔습니다. 뒤러가 학교를 마칠 때쯤, 그림이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뒤러가 한스를 위해 뒷바라지를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한스를 찾아간 뒤러는 한스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뒤러가 공부를 마치고 그림이 팔리는 화가가 되게 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손은 노동으로 마디가 뒤틀려버려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지만, 뒤러는 앞으로 유명한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한스의 기도를 들은 뒤러는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받았습니다. 노동으로 마디가 뒤틀렸지만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한스의 손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는 손은 친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손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 손이 못에 박혔고, 그 고귀한 희생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런 정성과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셨는데 우리는 무슨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본문 6절입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포도원에 심어져 있는 이유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화과나무를 향한 주인의 기대와 관심입니다. 그 기대와 목적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 아닙니까?

무화과나무는 보고 즐기기 위하여 가꾸는 관상목 아닙니다. 땔깜으로 사용되는 화목도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는 과실수입니다. 꽃보다 열매입니다. 열매를 맺는 것 이외에 기대할 것이 없는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존재 이유는 열매 맺음에 있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면 존재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땅만 버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땅만 버리고 있는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열매를 기대하는 주인의 마음에 맞는 목적을 이루었습니까? 열매를 찾으실 때 내어놓을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어떠한 열매를 내어놓을 수 있습니까? 열매로 그 나무를 판단하듯이 하나님도 믿음의 열매로 판단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열매를 맺었습니까?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였음을 회개합니다.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자신을 바꾸고 주님을 향하겠습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었음을 회개합니다. 믿음 없었음을 회개합니다. 사랑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우리의 전심을 드리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죄악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였음에 회개해야 합니다.
 

셋째로 기회를 잡았는가

루이스(Clive Staples Lewis)악마의 편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영국의 노신사가 어느 날 도서실을 찾아갑니다. 여러 가지 책 중에서 신앙에 관한 책을 보던 노신사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나?” 그 순간 악마가 찾아옵니다. 악마는 마음속에 이렇게 말합니다. “점심시간이야, 뭘 그렇게 생각해그는 하나님에 관한 의식을 누르고 식당으로 갑니다.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다시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그 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나?” 악마가 다시 마음속에 들어와서 속삭입니다.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말라. 우선 식사를 끝내고 보자식사를 끝냈습니다. 다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어렴풋이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노신사는 사탄의 역사를 통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거 뭐, 있을 수 있는 생각이지. 오늘은 너무 바빠. 집에 가서 할 일이 많아.” 그는 버스 좌석에 앉아 신문을 읽으며 집으로 갑니다. 자신에게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버스를 타고 가는 노신사 뒤에서 악마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일주일 후 노신사는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노신사처럼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본문 7절입니다.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주인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맺히기를 삼 년을 기다렸습니다. 삼 년은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 다닌 햇수와 같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삼 년이나 따라 다녔으면 열매를 맺어야 하지 않겠느냐? 언제까지 열매 없는 삶을 살 것이냐?" 라고 물으십니다.

시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의 시간으로 한 해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한 해의 은총을 감사하여야 합니다. 3년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모습은 과연 누구입니까? 벌써 찍힘을 받아야 마땅한 죄인인 우리가 아닙니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회개할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지나가면 회개할 수 없을 때가 오고 결국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한 해의 은총 앞에 무릎 꿇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집중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깨닫고 다시 주어지는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예수께서 우리에게 묻기를 다른 사람을 얼마나 괴롭혔는가 묻지 않고 얼마나 선한 일을 하였는가 물으신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어떠한 열매를 맺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 자리를 지키면서 땅만 버리는 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이 중요합니다. 마지막 기회인줄 알고 잡아야 합니다.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일 년간, 즉 단 한 번의 기회를 연기해 준 것이지 심판을 면제해 준 것이 아닙니다. 정한 기간이 지나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결국 찍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기회를 잡지 못하고 넘겨 버린다면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국 황실에 휘핑보이(whipping boy)’가 있습니다. 교사가 왕자를 때릴 수 없으니까 왕자와 나이가 비슷한 친구를 데려다가 왕자 옆에 앉히고 왕자가 공부를 하지 않거나 성적이 떨어질 때 또는 잘못을 저지를 경우에 그 친구가 대신 매를 맞게 하는 것입니다. 왕자는 친구가 매를 맞을 때에 깨달아야 합니다. 왜 저 친구가 매를 맞는지. 그런데 전혀 깨닫지 못하고 , 저 친구 또 매를 맞네,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보지?”한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자요, 구제불능의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나 때문이라는 것을 빨리 깨닫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스스로 살필 수 있는 시간들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라고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겸허한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열매 맺지 못함을 뉘우쳐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주어지는 기회를 잡아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