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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4. 2. 아름다운 발 롬 10:14-15

17. 4. 2.                                             

 

아름다운 발

 

롬 10:14-15

 

   인간의 신체 중에 가장 억울한 부위가 있다면 발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장 수고를 많이 하고 그리고 가장 험한 일을 많이 하면서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발은 여러 모로 차별대우를 받습니다. 손을 씻은 물로 발은 씻어도 발을 닦은 물로 손을 씻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얼굴이나 손을 닦는 수건으로는 발을 닦지 않습니다. 발의 입장에서 보면 불평할 만합니다.

   그런데 더 속상할 것 같은 것은 누구도 발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체의 다른 부위들은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뽐내는데 발은 그럴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발은 생김새도 그렇지만 늘 양말과 신발 속에 가려져 있어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또 누구도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사람들이 여름에 샌들을 신으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발이 사람들 눈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답게 보이려는 여성들이 발을 치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하는 것이 ‘발 네일’입니다. 발톱을 아름답게 치장하여 발을 아름답게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발 타투’를 하는 사람들도 부쩍 늘고 있습니다. 발에 여러 문양이나 그림을 그려놓은 것입니다.

   한 번 보실까요? 이것이 발 네일을 한 발입니다. 한 결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것이 발 타투입니다. 더욱 발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까? 이제 발도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뽐 낼 수 있는 시대가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전혀 다른 차원의 아름다운 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구약의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인용한 사 52:7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해방시켜주실 것이라고 예언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전령이 찾아와 하나님의 구원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그 좋은 소식을 전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때 그 소식을 전하러 온 전령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찬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다시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이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즉 이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좋은 소식을 듣지 못하여 믿지 못하고 그래서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저들에게 이 좋은 소식,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전하는 소식을 듣고 예수 믿고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그들의 발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발 네일을 하고 발 타투를 해서 눈에 아름답게 치장한 발이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야 말로 정말 아름답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이 볼 때도 정말 아름다운 발은 바로 이런 전도자들의 발인 것입니다.

 

왜 전도자들의 발이 아름다운가?

   그러면 전도자들의 발이 왜 그렇게 아름다울까요? 오늘 본문을 깊이 묵상해 보면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좋은 소식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전령이 좋은 소식을 전해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좋은 소식은 포로로 잡혀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곧 해방될 것이라는 소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전도자가 좋은 소식을 전해 준다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좋은 소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구원의 길이 있다는 소식입니다.

 

  올림픽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마라톤 경기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에서 유래했습니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해왔을 때 마라톤 평원에서 10만의 페르시아 군대와 1만의 아테네 군사가 맞섰습니다. 그러나 아테네의 영웅 밀티아데스 장군의 지략으로 페르시아 군대는 협곡으로 유인 돼 궤멸당하고 맙니다.

  이 때 아테네 시민들은 나라가 멸망 직전의 위기 상황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밀티아데스 장군은 올림픽 달리기 선수였던 필리피데스에게 이 승전 소식을 전하라 명했고, 그는 사력을 다해 42킬로를 달려 그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우리 아테네 군이 승리했다!” 그러나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렸기에 그는 이 한 마디 소식을 전하고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발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을 들어야 하지만 전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우리가 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의 발이 정말 아름다운 발이 될 것입니다.

 

2. 힘든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전령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 산을 넘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산을 넘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한 마디로 힘겨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산을 넘는 일은 평지를 걷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힘이 드는 일입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위해 힘든 길을 걷는 발이야 말로 아름다운 발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고생하고 헌신하는 발이야 말로 아름다운 발이라는 것입니다.

 

  일전에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이 언론에 소개되어 큰 충격과 감동을 준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선 아름다운 자태와 백조같이 우아한 발레 동작과는 도저히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없는 상처투성이고 울퉁불퉁 기형적인 모습의 발 때문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내 이분의 발이 어떻게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를 알게 되면 큰 감동을 받습니다.

  이 분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수석 발레리나를 지냈습니다. 동양인으로 서양인들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발레에서 유럽을 대표하는 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나로 뽑힌 것 자체가 주목 받을 만한 일입니다.

  모두가 어떻게 이 분이 이런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를 궁금해 했습니다. 이 분이 이 자리에 오르게 된 이유는 단 한 가지 처절한 연습 때문입니다. 사실 이분은 늦게 발레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연습 외에는 따라 갈 길이 없다는 생각에 같은 동작을 수백 수천 번 반복했다고 합니다. 매일 10시간 이상 쉬지 않고 훈련했다고 합니다.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자고 일어나서 몸이 아프지 않으면 반성하게 됩니다. 무용수가 아픔을 친구처럼 여기지 못하면 무용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분의 이 발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분은 누군가에게 감동적인 발레 춤을 선사하기 위해 불철주야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습니다. 온 몸이 통증으로 고통스러워도 쉬지 않았습니다. 발에 물집이 생기고 상처가 나고 굳은살투성이가 되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발이 이 모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분의 발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고들 부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런 발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멈추지 않는 발이 필요합니다.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아도 물러서지 않고, 어려운 시련이 닥쳐도 멈추지 않고,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그런 발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발을 아름다운 발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발은 어떤 발입니까? 그저 사람들 보기에 아름다운 발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발입니까?  

 

어떻게 아름다운 발을 만들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발을 아름다운 발로 만들 수 있을까요? 우리 발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발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가야 할 길을 걸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걷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가고 싶은 길이고 다른 하나는 가야할 길입니다. 가고 싶은 길은 누가 가라고 하지 않아도 가려고 애씁니다. 심지어 누군가가 말리고 가면 안 된다고 해도 가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가야할 길은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가야 한다고 해도 잘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 21:18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젊어서는 가고 싶은 길을 걸었지만 늙어서는 가야할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고 싶은 길만 가는 사람들이어서는 안 됩니다. 가야할 길을 가야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가야할 길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가는 길입니다.

 

  얼마 전에 EBS TV가 방영한 [길 위의 천사]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본 일이 있습니다. 중국의 오지에 살고 있는 묘족 사람들에게 우편물을 전하는 창린 창이라는 우편배달부 이야기를 다룬 프로그램입니다.

  이 분은 산간벽지에 있는 묘족 마을 23곳에 우편물을 배달합니다. 이 마을들은 노새나 나귀도 갈 수 없는 99고개라 불리는 길을 오르내려야 갈 수 있는 곳에 흩어져있습니다. 여름에는 풀이 자라 길이 없어지기 일쑤이고, 폭우가 쏟아지면 길이 끊여서 가기가 힘든 곳입니다. 이 길을 60킬로가 넘는 무거운 짐을 지고 나흘을 걷고 또 걸어 우편물을 배달합니다.

  남편이 우편배달을 하면서 혼자 농사를 져야 하는 아내가 그만 하라고 만류를 합니다. 한 번은 고갯길을 넘다가 굴러서 멍이 들고 앞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해서 이제는 정말 그만두라고 해도 상처가 아물면 또 길을 나서는 남편을 말릴 수가 없어 기도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창린 창은 자기가 가지 않으면 가족의 좋은 소식을 전해들을 수 없는 오지 마을의 어머니 같은 할머니들 생각에 오늘도 주저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자기가 가지 않으면 신문도, 약품도, 그리고 선물도 받을 수 없는 마을 사람들 생각에 오늘도 길을 나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창린 창이야 말로 가고 싶은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라 가야할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발이야 말로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아름다운 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야할 길을 가야하겠습니다. 가야할 길이 있는 것을 알고도 가고 싶은 길만 고집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야할 길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복음을 전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제 이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2. 복음을 전하는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전도의 당위성을 의식적으로나 심지어 무의식적으로도 알고 있습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전도가 사명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전도를 결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막상 세상 한 복판에서 믿지 않는 이웃들과 직장 동료들을 만나면 전도해야겠다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합니다. 행동으로 옮긴다고 해도 마지못해 끌려다니는 식의 소극적 전도 행위에 그치고 맙니다. 그러면서 전도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만 가중되고 때로는 전도에 실패했다는 패배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복음을 전하는 길을 중단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중단하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 세대의 위대한 전도자 빌리 그래함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첫째가 두려움입니다. 오늘처럼 개인주의가 발달한 시대에 누군가의 생활에 끼어드는 것은 위협적인 일일 뿐 아니라 주제넘고 건방진 일이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 사람을 성나게 할 것을 두려워하게 되고,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에게 맞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워하고, 광신자로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합니다. 나아가 가까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다 거절당하면 상처 받을까 두려워하고, 그 사람과의 관계가 깨질까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이 두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중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 사람을 꼭 교회로 데려와야겠다는 생각, 그 사람에게 믿겠다는 결신을 얻어내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야말로 좋은 소식을 전해 주는 것입니다. 받으면 좋고 아니면 또 아닌 것이라는 자세로 전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 것입니다.

   둘째가 전도 방법에 대한 무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해 보려고 하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결국 전도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전도 대상자를 위해 충분히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그 마음을 열어주셔야만 전도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적절한 대화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다짜고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면 전도의 문이 닫혀버리기 때문입니다. 서로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야 전도의 문이 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전도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은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정교한 절차를 따라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만난 예수 이야기를 하면 됩니다. 예수 믿고 난 뒤 내게 일어난 아름다운 변화 이야기를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전도를 권면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도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유도 댈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명령입니다.

   이제 이 명령에 순종해 보십시오. 전도 대상자를 정해 놓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끈기 있게 전도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런 여러분의 발을 아름답다고 좋아하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