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박봉수목사

17. 3. 26 탐내지 말라 출 20:17

17. 3. 26                                          

 

탐내지 말라

 

출 20:17

 

   오늘 본문은 십계명 중 열 번째 계명입니다. 계명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탐내지 말라”

   십계명 전체를 살펴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1-4계명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은 이웃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5-10계명입니다.

   두 번째 부분을 살펴보면,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5계명입니다. 이것은 이웃 사랑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행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6-9계명입니다. 이것은 이웃 사랑을 위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가 오늘 본문입니다. 이웃 사랑을 위한 마음가짐에 대한 말씀입니다. 탐내지 말라 즉 탐심을 제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그리고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계명들은 모두가 사람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탐심 때문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이웃 사랑을 위한 행동의 뿌리에 관한 명령인 것입니다.

 

탐내지 말라

   그러면 탐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말은 구약의 히브리어 ‘하마드’(Hamad)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하마드는 남의 것을 좋아하고,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탐낸다는 것은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을 갖고 싶어 그것이 마음의 소원이 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 말이 처음 나오는 곳이 창 3:6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기서 탐스럽게 한다는 말이 바로 이 하마드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보는 순간, 하마드 즉 그것을 먹고 싶은 간절한 마음의 소원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소원대로 그 나무 열매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창 3장 말씀은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요약해 보면 하와가 탐심이 생겨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저지른 최초의 죄는 바로 이 탐내는 일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경에서 이 탐낸다는 하마드라는 말이 나오는 곳이 수 7:21입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이 말은 죄를 저지른 아간의 변명입니다. 아간이 하나님께 돌려야 할 전리품을 탐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 7장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죄를 범한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정복하고 많은 전리품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읍은 불태우고 전리품은 모두 성막으로 가져와 하나님께 바치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이라는 사람이 전리품이 탐나서 일부를 감추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저지른 최초의 죄는 한 사람의 탐내는 일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사건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은 탐내는 것이 죄의 뿌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죄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저지른 최초의 죄나 동일하게 그 동기는 바로 이 하마드 즉 탐내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약 1:15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바로 욕심 즉 탐내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죄를 저지르게 되고, 죄를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키워 가면, 결국 죽음으로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탐내는 것이 죄의 뿌리요, 멸망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탐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죄를 짓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탐내지 말아야 하는지를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이웃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이웃의 집, 아내, 종, 가축, 그리고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웃의 것을 탐내게 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을 다룬 창 4장 말씀을 보면 가인과 아벨은 친형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형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하게 되었고, 결국 자기 동생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가인이 왜 아벨을 시기하게 되었을까요? 간단합니다. 가인이 아벨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탐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자기는 사랑하지 않으시고 아벨만을 사랑하시자 그 사랑이 탐이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자기 친 동생을 시기하게 되었고, 그 시기가 깊어지자 아벨을 미워하게 되었고, 결국 아벨을 죽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탐내는 것은 이웃을 시기하게 만듭니다. 심할 경우 이웃을 미워하게까지 만듭니다. 그래서 그 이웃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탐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것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자칫 탐심을 따라 행동하게 될 때 이웃에게 큰 피해를 입히게 만듭니다.

 

  최근 연예계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한 영화감독이 젊은 여배우와 바람이 난 것입니다. 설만 무성하더니 급기야 자기들도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기자들의 집요한 추적으로 그 감독의 아내가 언론에 노출되었고, 그 심정이 소개되었습니다. 이 감독이 여배우와 불륜행각을 시작한 뒤로 집에 생활비를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딸이 외국에서 유학중인데 돈이 없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아내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한 말이 이것입니다. “우리를 지옥에 빠뜨려 놓았다...”

   그렇습니다. 이웃의 것을 탐내면 그 이웃에게 큰 해를 끼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 탐내는 일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도 사랑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마 19장을 보면 한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을 여쭈었습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 청년이 재산을 포기할 수 없어서 근심하며 예수님 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이 청년이 돈이 많은 부자라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이 청년 마음속에 남아있는 재산에 대한 더 가지고 싶어 하는 욕망 바로 탐심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 탐심은 사람들의 가치관을 왜곡시킵니다. 사람이 돈에 대한 탐심을 가지고 있을 때 그에게 그 순간 최고의 가치는 돈입니다. 돈을 손에 쥘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돈은 그에게 우상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 3:5에서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탐심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탐심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올 지라도 이 사람은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섬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자기가 탐내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탐내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방해합니다. 그래서 탐내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탐내지 않으려면

   그러면 우리가 탐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자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족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한 남자 배우를 흠모하는 여성 팬이 있습니다. 자기 남편과 그 남자 배우를 비교하면서 늘 그 배우를 마음에 품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그 남자 배우의 아내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성 팬이 배우의 아내에게 부러운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얼마나 좋으세요. 그렇게 멋진 분과 함께 사시니...” 그런데 이 배우의 아내가 화를 내면서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그러면 한 번 살아 보세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족하며 살지 못합니다. 정말 귀한 것을 받아 누리고 있으면서도 늘 더 좋은 것이 있을 것처럼 주변을 기웃 거립니다. 바로 그 틈에 탐심이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의 것을 탐내게 되는 것입니다.

   빌 4:11-12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도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닌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도 바울은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재산도 없고, 가족도 없고, 머물 집도 없고... 그래서 늘 부족함을 느끼고 무엇인가 가지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한 삶을 살 것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백하는 말은 한 마디로 자족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엇을 탐내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족할 수 있으면 탐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 주신 것에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으면 남의 것을 탐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족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절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절제한다는 것은 자신을 통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더 가지고 싶은 욕망을 제어하는 것을 말합니다.

 

  옛날 중국의 주나라에 한 충성스러운 신하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왕이 "나라가 잘살게 되었는데 왜 식탁에 상아 젓가락이 오르지 않고 아직도 나무젓가락이 오르는가!"라고 불평했습니다. 이때부터 이 충성스러운 신하는 몹시 근심하며 등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등청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이 신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상아 젓가락이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아도 그게 아니네. 상아 젓가락을 장만하면 그 다음은 금 그릇을 찾을 것이요, 그 다음은 산해진미를 요구할 것이요, 또 그 다음은 금으로 만든 상을 만들라고 할 것이요, 그 다음은 아방궁을 장만하려 할 것 아닌가? 그러면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당할 것인가?“

 

   그렇습니다. 작은 것 하나 절제하지 못하면 더 큰 것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탐심이 그 틈을 파고듭니다. 남의 것을 탐내게 되고 이웃에게 큰 피해를 입힙니다.

   고전 9:25을 보면 사도바울은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절제할 수 있어야 승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육적인 싸움에서도 그렇지만 영적 싸움에서는 더욱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복싱이나 레슬링과 같은 격투기 경기에 나서는 사람들은 적과의 싸움 이전에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체중조절에 실패하면 링에 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기를 며칠 앞두고 계체량에 통과하려고 피눈물 나게 절제합니다.

   영적인 전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면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먹고, 입고, 쓰는 이런 일상생활에서 절제하지 못하면 그 틈을 사탄이 파고 듭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먹고 싶고 더 좋은 것을 입고 싶고, 더 풍성하게 쓰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게 합니다. 그 틈에 남의 것을 탐내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축하한다는 것은 남의 좋은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뜻으로 인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남이 잘되고 좋은 것을 가지게 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인사를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남의 좋은 일을 축하하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시기심이 들고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오죽하면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을까요? 타락한 인간의 성품으로는 남의 좋은 일을 축하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롬 12:14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저주하지 말고 그들을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시기심이 들게 만드는 사람들 그들도 축복하고 축하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래 전에 영국 런던에 세분의 목사님이 함께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분은 스펄전 목사님으로 당대에 최고의 설교가로 손꼽히는 분입니다. 다른 한 분은 몰간 목사님으로 탁월한 지도력을 인정받는 분입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은 마이어 목사님으로 책을 잘 쓰기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한 번은 마이어 목사님 마음속에 다른 두 분에 대한 시기심이 들더랍니다. 한 분은 탁월한 설교로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있고, 또 다른 분은 뛰어난 리더십으로 역시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교회는 부흥이 잘 안 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기심이 생기더랍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제 마음에서 이 시기심을 없애주십시오”. 그러자 기도 중에 세미한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네 기도를 바꾸어라 시기심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 두 사람을 축복하라”

  그래서 두 목사님을 축복하고 두 교회를 위해 기도했답니다. 그랬더니 마음에 평안이 임하고 그 후 자기 교회도 부흥하게 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나아가 축복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이 잘 되는 것을 축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이웃의 것을 탐내게 될 때 이웃을 사랑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탐내지 않으려면 자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절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이웃을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고 더욱 이웃을 축복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