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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1월27일 설교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리라 사9:1-7

2011년 11월 27일

본 문 : 사9:1-7

제 목 :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리라

 

오늘 강단에 평소와 다른 것이 여러분의 눈에 띄지 않습니까? 촛불 하나가 켜져 있습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대강절 또는 대림절 그 첫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부터 4주간이 대림절이고, 성탄절이 지난 다음 12일 후로부터 주현절이 이어져 사순절까지 지속됩니다. 그래서 교회력으로는 오늘이 새해 첫날이라고 하겠습니다. 대림절 기간 동안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을 축하하고 또한 장차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립니다. 즉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의 초림과 종말에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다시 오심을 기념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특별히 이 기간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어 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신 은혜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로서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을 켭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대망하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나타내는 첫 번째 촛불입니다. 이는 세상에서 지치고 곤고한 사람들과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의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라고 하는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주전 8세기경의 이스라엘의 환경은 현재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환경과 놀랄만큼 너무도 유사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 북이 갈라져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주변 강대국인 애굽, 앗수르, 바벨론에 의해 끊임없이 침략의 위협 속에 시달렸습니다. 또한 거짓종교가 판을 치고 도덕은 땅에 떨어졌으며, 권력이나 돈을 많이 가진 자들이 사회적으로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사람들을 돌보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을 수탈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가공동체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특별히 1절에 나오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그리고 갈릴리는 북이스라엘에 속한 땅으로서 앗수르를 비롯한 주변 열강의 침입으로 인해 항상 시달림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다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시기에 앗수르 군대의 침략으로 인해 거의 초토화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주전722년에 멸망을 당하게 되었고 앗수르의 강제적인 이주정책에 의해 끝내 이방국가화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후에 사마리아 사람이라 불려지게 되는데, 혈통적으로는 혼혈인이고, 종교적으로도 자신들만의 성전을 만들어 유대인들과는 다른 색깔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로 인해 이 지역 사람들은 유대인들로부터도 멸시를 받아왔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전에 혼혈인들을 멸시하고 무시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처지를 가리켜 오늘 본문에서 1절에서는 ‘전에 고통을 받던 자들’‘멸시를 당하고’ 2절에서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소망이 없는 인생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고, 나라를 잃어 남의 나라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동족들로부터도 버림받아 이 땅에서는 그 누구에게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렇게 고통당하게 되었을까요? 과거 400년이란 긴 세월동안 애굽의 노예로 비참한 삶을 영위하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아 노예에서 해방되어 가나안땅을 차지하여 한 국가로서 존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쉽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속성을 잘 아시기에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채 교만하여 하나님을 저버리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하셨습니다. 신8:12-14 『12)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끝내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우상숭배에 깊이 빠졌고 온갖 죄악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차례 경고를 하였음에도 돌이키지 않자 이렇게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들이 이러한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은 자신의 죄과 때문이었습니다.

근래에 들어와 우리나라의 사회적인 환경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경기불황으로 인해 처처에서 못살겠다고 한숨 쉬는 소리만 들려옵니다. 점점 심화되는 양극화 현상으로 인해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인해 일할 의욕은 상실되고 있습니다. 갈수록 더 극심해지는 경쟁으로 인해 모두가 숨막혀합니다. 모두가 못살겠다고 고통으로 신음합니다. 신문이나 뉴스를 보노라면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거나 따뜻하게 해주는 소식은 없이 암울한 소식뿐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총체적인 절망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어쩌다가 우리나라가 이런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가 놀랄 정도의 고도성장을 이루었고,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이제는 원조를 하는 나라로, 꿈을 찾아 다른 나라로 찾아가던 가난한 나라가 이제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꿈을 이루기 위하여 찾아오는 나라로 바뀐 것이 사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랬던 우리나라가 이렇게 전락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전에 외국신문에서 우리나라를 가리켜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렸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막 일어나는 시점인데 너무 빨리 그 과실을 따먹고 말았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짧은 시간에 이렇게 놀라운 경제적인 부흥을 이룬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채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돈과 힘이라고 하는 우상을 섬겼고 그 결과로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속히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알에 서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의 교만에 대한 심판을 행하셨지만 결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범한 죄는 천번 만번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과이나 그 죄과대로 그들을 심판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심판만을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절망만을 선포한 것도 아닙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아울러 전하고 있습니다. 1-2절『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선지자는 소망이 없던 이 지역에 이제 하나님께서 어두움을 거두고, 영화롭게 하셨으며, 빛을 비추신다고 전합니다. 소망의 메시지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채 절망만이 가득하였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내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비록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심판을 받았지만 자비가 무한하시며 긍휼을 아낌없이 베풀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성취되었을까요? 마4:12-16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이사야의 예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비로소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오시되 무엇으로 오셨습니까? 빛으로 오셨습니다. 요 1:4-5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빛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어두움을 물리치고 주변을 밝혀줍니다. 어두움 속에서 갈 길을 알려줍니다. 더러움을 태워 버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셔서 소망이 다 사라진 채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죄의 문제에 매여 늘 어두움 속에서 허덕이는 인생 가운데 오셔서 진리의 빛을 비추심으로 죄의 문제에서 놓여 빛으로 나오게 하십니다. 온통 잿빛하늘 같고 소망이 없이 절망만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예수님의 빛이 비추이기만 하면 절망의 인생이 소망의 인생으로 바뀌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몇일 전 안산의 동산교회의 김인중목사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 분이 새가족 초청 잔치 날 설교를 하면서 교회에 처음 나온 청중들에게 “이 중에서 혹 절망으로 인해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꼭 나를 만난 후에 죽으십시오”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둘 다 온통 죽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 분은 평소에도 습관적으로 교회는 다녔지만 늘 죽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사는 사람이었고, 한 분은 전혀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었는데 자살에 실패하고 난 후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원인이 둘 다 돈 문제였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실직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고, 한 사람은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권면을 받아 교회에 나와 설교를 듣고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편지를 보내왔다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급히 연락해서 이 두 사람을 교회로 나오도록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에게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빛의 복음은 아무리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이라도 건져낼 능력이 있음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가 아닌 병든 사람, 자살하고 싶은 사람, 실의와 절망에 빠진 사람을 위하여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오신 분이심을 믿었고, 교회를 찾아온 이 사람들에게 믿음대로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를 잠자코 듣던 그 사람들에게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면서 그들의 마음속에 희망이 싹트는 것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면담을 마치고 나갈 때는 이제는 살아야 할 의미를 찾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더랍니다. 복음의 빛이 비추이자 절망 중에 있던 그들에게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물론 환경이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환경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빛이신 예수님은 절망 중에 있는 인생을 소망이 있는 인생으로 바꾸어주십니다.

 

그렇다면 빛이 되시는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주실까요?

즐거움이 가득 찬 인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살펴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즐거움입니다. 3절『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그 즐거움은 먼저 추수하는 즐거움이 더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추수하는 즐거움을 여러분은 경험해 보셨습니까? 예전에 10평정도 되는 밭을 가꾸어본 경험이 있는데 힘은 들어도 추수하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지 모릅니다. 이래서 농부들이 힘들어도 농사를 짓는구나 생각하였습니다. 추수하는 즐거움에 더해져서 전쟁의 승리에서 얻는 기쁨을 얻게 하십니다.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이란 곧 전쟁의 승리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4절a 『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이 말씀은 출애굽이 그 배경입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방되어 나올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그들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마치 전승국의 백성들처럼 애굽 사람들로 부터 온갖 패물을 받아가지고 나왔습니다. 4절 b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 이다 』는 말씀은 미디안 족속들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심지어 추수마저 굴에 숨어서 몰래 하던 시절에 기드온이 300 용사를 거느리고 미디안을 쳐부수었을 때 느꼈던 그 기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구원의 기쁨을 영원히 누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세울 나라는 전쟁이 없는, 영원한 평화의 나라임을 말씀합니다. 5절『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왜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을 불에 사릅니까? 더 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임했으며, 더 이상 전쟁의 위험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풍성한 추수의 기쁨과 영원한 평화만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예수님이 왕으로서 다스릴 나라이며 우리는 그 나라의 백성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속히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하여 남북한이 모두 가지고 있는 무기를 없애버리고 화해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원의 기쁨과 참 평화를 가져다 줄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까요?

6절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이 말씀은 메시아가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결코 영화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남성미가 넘치는 멋있는 예수님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53:2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그리고 성장하는 과정도 유대사람들이 한결같이 멸시했던, 갈릴리 지방의 이름도 없는 작은 마을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그것도 맏아들로서 자랐습니다. 오죽 했으면 요1:46에 빌립이 친구 나다니엘에게 『모세의 율법이 말하고 여러 선지자가 말하던 그이 즉 메시아를 만났는데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 하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을 친히 겪으셨습니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도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실 수 있으며여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히3: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어떻게 고난 중에 있는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으실까요?

그 분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그의 어깨에 정사를 매었다』고 합니다. 정사란 통치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어깨에 하늘 보좌를 열 수 있는 열쇠를 매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권자로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모든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요 천국입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우리의 마음이 천국이 되고, 우리 가정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우리 가정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이란 앞에서 말씀드렸던 온갖 즐거움과 평화를 누리는 곳입니다.

계속해서 성경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이름을 표현하는데 그 이름이 좀 특이합니다. 먼저 ‘기묘자라 모사라’ 영어성경 NIV에서는 Wonderful Counselor 즉 기묘한 상담자라 표현합니다. 기묘자란 신기한 분이란 뜻으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능력이 많으신 분이심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모사란 보혜사라고도 번역하는데 우리를 위해 변호해주시는 분임을 말합니다. 누구 앞에서 변호합니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심으로 죄의 형벌을 면제받게 하십니다. 기묘한 모사, 즉 신기한 상담자 되시는 주님 앞에 그 어떤 인생의 어려운 문제라 할지라도 내어놓기만 하면 능히 해결해 주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분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6절 하반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래서 마귀도 그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말합니다. 영존하시다는 것은 절대 변함이 없으시다는 뜻인데 이 분이 우리의 너무도 좋으신 아버지가 되시어 결코 변함이 없는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것입니다.

얼마 전 중국에 화상을 입은 딸을 위해 제대로 마취도 않고 자신의 피부를 떼어준 한 가난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중국을 울렸습니다. 중국 하북성의 링서우현이라고 하는 곳에 사는 가난한 농부 출신인 두진후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딸 란란은 이제 다섯 살입니다. 란란이 지난 2011년 8월 16일에 비닐하우스에서 일어난 화재로 전신 40%의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어머니가 병아리를 키우던 비닐하우스의 보온을 위해 난로에 불을 붙이다 생긴 화재였습니다. 엄마는 팔 등을 다쳤지만 딸아이 란란은 엄청난 전신 화상을 입었던 것입니다. 두진후이는 집에서 좀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하역부로 일하면서 돈을 벌고, 어머니는 집에서 닭을 키워 노부모와 두 아이를 포함한 여섯 식구의 생계를 꾸려왔습니다. 란란은 화상이 너무 심해 3차례의 수술을 받아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피부이식을 위해 추가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피부를 이식해주기 위해 자신의 오른쪽 다리 절반에 해당하는 피부를 떼어내어야 했습니다. 그에 소요되는 수술비 17만원 가량의 돈이 없어 아버지는 전신마취를 포기하고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담당의사는 "두진후이는 전신 마취보다 더 고통스럽고 위험한 국부 마취를 택했다"면서 수술을 받던 아버지 두진후이는 고통으로 온몸에 진땀을 흘리면서도 담당의사에게 "내 살을 떼어내는 고통은 아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괜찮아요… 내 딸에게 내 피부를 더 많이 떼어주세요"라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수술을 다 받은 후 아버지는 "세상의 어느 아버지라도 이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두진후이는 딸을 위해 내 놓을 것이 자신의 피부밖에 없었기에 마취 없는 피부이식이라도 선택한 것입니다. 그 엄청난 고통도 아버지의 딸에 대한 사랑은 결코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아버지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그 어떤 고통도 이렇게 기꺼이 감내할진대,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큰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여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있었던 성탄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것처럼 다시 이 땅에 오시어 구원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이 세상에 참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세상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죄로 인하여 겪어야만 했던 온갖 고통은 사라지고 기쁨만이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누가 이룰까요? 7절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이 반드시 이를 이루실 것입니다. 이 약속은 결코 변치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약속에 어떻게 반응하여야 할까요?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가운데 기다리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열심히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참여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환경이 어렵습니까? 환경을 바라볼 때 소망이 없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열심이 반드시 여러분을 건져내시어 저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특별히 대림절을 맞아 다시 오시마고 약속하신 주님을 기다리며 소망 가운데 승리의 발걸음으로 힘차게 전진해 나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 성남생명나무교회
글쓴이 : 징검다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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