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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유명목사 설교

김명혁

“눈물의 감동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

 

시 39:12, 56:8, 139:17,18

 

 

오늘 아침에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모래알보다 더 많은 은혜들 중에서 “눈물의 감동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간증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을 아주 귀중하게 보십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눈물을 아주 귀중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맨날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는데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여호와여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시 39:12).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 56:8).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행 13:22).하나님께서 귀중하게 사용하신 선지자 예레미아도 맨날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는데 예레미아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렘 9:1).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애 1:2).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흐름이여”(애 1:16).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애 2:11).

 

 

사실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면서 우셨다고 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도 눈물을 흘리면서 우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예루살렘 성이 망할 것을 바라보시면서도 우셨다고 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 19:41,42).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부르짖으시면서 통곡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도 아들을 내어 버리시면서 캄캄함으로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셨다고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후 주님께서 디베랴 바다가에서 배신자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만나서 타이르시면서도 우셨다고 생각합니다(요 21:15-17). 그리고 승천하신 후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항상 살아서 간구하신다고 했는데(롬 8:34, 히 7:25), 우리들이 여러 가지 죄악에 밀려서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것을 바라보시면서 우시고 또 우신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죄 때문에 그리고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또 울고 또 울었다고 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 “내가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고후 2:4).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빌 3:18). 사도 바울은 맨날 울면서 눈물을 쏟은 눈물의 목회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도 자기 죄 때문에 그리고 민족이 당하는 불행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 때문에 평생토록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또 운 눈물의 목회자들이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과 그가 인도하신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일어난 회개 운동이 눈물로 가득한 눈물의 운동이었다는 사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07년 1월이 되었습니다.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습니다. 전국 각처에서 1,500여명의 신자들이 장대현교회에 모여 10일 동안 사경회를 가졌습니다. 그 사경회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는 글들을 소개합니다. “2천명 이상을 수용하는 장대현 예배당에 회중이 차고 넘치도록 모인 사경회원 전체가 성령의 휩쓸린바 되어 혹은 소리쳐 울고 혹은 가슴 쳐 통곡하며 혹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고 혹은 발을 구르고 자복하며 혹은 춤을 추면서 찬미하니 소리소리 합하여 소리의 기둥은 번제단에 타오르는 불기둥 같이 하늘로 떠 떠올랐다.” “길선주 장로는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 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이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다. 존귀하신 분이 비천하고 누추한 땅에 오셨으니 이상한 귀빈이고, 귀중한 몸인데도 오셔서 밖에서 오래 기다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며, 전능하신 분이 간절히 두드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다. 귀빈을 맞아드리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자애하신 귀빈을 환영치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고, 간절하신 음성을 듣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며, 굳게 닫은 방문을 열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길 장로는 ‘문을 열라 문을 열라 문을 열고 환영하라’고 준엄하게 외쳤다.” “길선주 장로의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을 영접하라’는 열띤 설교가 시작되었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의 설교는 흐르는 시냇물 같이 회중의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 설교가 끝나고 길 장로의 기도가 시작되자 감동을 받은 회중은 자기들도 모르게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통회 자복했다. 장내는 금새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는 기도회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 라고 하면서 지난 날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가 친구 한 사람이 죽으면서 남은 재산을 잘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유산을 정리하기는 하였으나 그 중의 1백 원은 수고 비조로 인정하여 자기가 소유하였다. 길 장로는 기도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속였고 그 친구와 그의 부인을 속인 도둑놈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이 그 돈을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 라고 공중 앞에서 눈물과 함께 자복하였다. ‘나 때문에 온 회중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올시다’ 라는 자복기도는 쉬지 않고 계속하였다. 회중은 이 때 모두 마루 바닥을 치면서 회개하기를 시작하였다.” “기도가 계속되자 무겁고 슬픔 마음이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한쪽 구석에서 어떤 사람이 울기 시작하였고 이어 모든 청중들이 울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일어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는 털썩 주저앉아 흐느껴 울다가 마루 위에 뒹굴며 고뇌에 찬 모습으로 마루바닥을 두 주먹으로 두들겼다.』 1907년의 평양 장대현 교회에 일어난 “부흥운동”은 사실은 “눈물운동”이었고 “회개운동” 이었습니다.

 

 

눈물은 너무너무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물은 가장 진솔하고 처절한 자기 표현의 방식이고 가장 친밀한 소통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물을 흘릴 때 하나님과 친밀하게 소통하게 되고 사람들과도 친밀하게 소통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이 울 때 에서가 함께 울면서 화해했고, 요셉이 울 때에 형들이 함께 울면서 화해했고, 다윗이 울 때 백성들이 함께 울면서 하나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눈물은 가장 귀중한 은혜의 통로이고 가장 귀중한 소통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자들에게 가까이 하시면서 친밀하게 소통하셨습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흘리는 눈물도 귀중하고, 자기가 당하는 슬픔과 아픔과 고통 때문에 흘리는 눈물도 귀중하고, 민족이 당하는 재난 때문에 흘리는 눈물도 귀중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에 감격하여 흘리는 눈물도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요엘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욜 2:12,13).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아모스에게 울음 군을 불러다가 울게 하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 군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암 5:16). 눈물은 너무너무 귀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받으시는 것이 눈물이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은혜를 받게 하는 것이 눈물이고, 나를 살리는 것이 눈물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까지 움직이게 하는 것이 눈물입니다. 저주 받아 마땅한 니느웨 성이 굵은 베옷을 입고 울며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려고 하셨던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니느웨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 3:5-10).

 

 

그런데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인 저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눈물의 감동을 아주 많이 주셨습니다. 저는 본래 눈물이 없었던 좀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무엇이든지 두려워하지 않고 막 하고 막 가는 “막가 파” 였고 심한 장난꾸러기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기 시작했고,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등 신앙의 선배님들을 통해서 회개와 은혜 사모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제가 범한 죄와 허물을 회개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경험하고 묵상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11살 때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북에 두고 38선을 혼자서 뛰어넘어서 남쪽에 온 후 몇 년 동안은 거의 매일 밤 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후에는 미국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 철원이가 불치의 병인 뇌수종을 지니고 태어나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 살다가 4살 때 저의 곁을 떠나 주님의 품으로 돌아간 일 때문에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슬픔과 아픔의 눈물들은 제가 늘 고백하는 대로 아주 귀중하고 아름다운 보석이 되었습니다. 이별의 슬픔과 아픔의 눈물들은 저로 하여금 십자가에 나타난 주님의 슬픔과 아픔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었고 슬픔과 아픔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었고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철원이가 먼저 간 슬픔과 아픔이 없는 천국을 사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눈물의 감동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 라는 제목으로 저와 관련된 간증의 이야기들 아홉 가지를 시작합니다.

 

 

첫째로, 저에게 “눈물의 감동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 중 하나는 제가 고등학생 때 손양원 목사님의 삶과 사역에 대한 책인 “사랑의 원자탄” 이란 책을 읽으면서 울고 또 운 일이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을 때 어느 날 아침 남대문 네거리에 있던 기독교 서점에서 “사랑의 원자탄” 이란 책을 사 들고 제가 새벽기도 후 거의 매일 올라가서 기도하던 남산의 어느 숲 속에 올라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그 책을 읽으면서 울고 또 울고 기도하고 또 기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이란 책은 손양원 목사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전도사님 때부터 여수에 있는 애양원에 가서 나환자들을 돌아보는 사랑의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손양원 목사님이 나병 환자들과 함께 산으로 소풍을 갔습니다. 도시락을 먹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린이 나환자들은 자기들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손양원 목사님께서 혹시라도 자기들 때문에 나병에 걸릴까 봐 걱정을 하면서 손양원 목사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아서 자기들끼리 도시락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그것을 눈치채고 어린이 나환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의 도시락을 나누어 먹으려고 했습니다. 어린이 나환자들은 안 된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손양원 목사님은 그들의 도시락을 빼앗아서 나누어 먹었습니다. 사실 손양원 목사님은 나병에 걸리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도 나병에 걸리기를 속으로 바라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순수하고 참된 사랑을 느끼고 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이란 책은 마지막 부분에서 손양원 목사님이 자기가 사랑하던 두 아들을 총으로 쏘아서 죽인 마귀 새끼 같은 공산당 청년을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하는 대신 그를 불쌍히 여기면서 용서하고 사랑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원수를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하는데 어떻게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미워하지도 않고 죽이려고도 하지 않고 그를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고 사랑했을까? 말로만 용서하고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자기의 양 아들로 삼았을까? 저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세상에 있다는 말인가! 그 후부터 손양원 목사님은 제가 가장 존경하고 가장 사랑하는 본받고 싶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진리보다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더욱 더 귀중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저에게 “눈물의 감동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 중 또 하나는 제가 고등학생인가 대학생 때 주암산 부흥회에 참석해서 찬송가 246장을 부르면서 울고 또 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리던 김치선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창동교회에 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새벽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를 부르시면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시곤 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쫓아 다니면서 은혜를 많이 받곤 했는데 삼각산 관악산은 물론 대구의 주암산까지 쫓아 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주암산 부흥회 어느 시간에 찬송가 246장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절 가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저는 1절을 부르고 나서 더 이상 찬송을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라고 찬송을 부를 때 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피를 흘려서 교회를 사셨을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피를 흘려서 교회를 사셨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놀랍고 너무 감사하고 너무 감격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또한 “늘 사랑합니다” 라는 가사에 “나는 늘 사랑하지 못하는데” 라고 생각하며 충격을 받으면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우니까 옆에 있던 어른 한 사람이 무슨 슬픈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느냐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울었습니다. 아마 20여분 이상 계속해서 울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피 흘려 사신 귀한 교회를 늘 사랑하여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하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 라는 말씀을 아주 귀중하게 여기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피로 사신 교회를 더욱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저에게 “눈물의 감동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 중 또 하나는 제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 어머니로부터 온 편지를 받아서 읽으면서 울고 또 운 일이었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이별한 지 17년이 되던 때인 1965년 10월 어느 날 북에 계시는 어머니가 저에게 보낸 슬픔과 아픔의 편지 한 장을 받았습니다. 제가 홍콩을 통해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습니다. “내 아들 명혁에게 9월 5일 네의 편지와 동시에 외로이 자라 성인이 된 내 아들 명혁이에 얼굴을 더구나 훌륭하게 된 내 아들을... 나는 보고 십고나. 손이라도 한번 꽉 쥐어 보고 십고나. 이 내 기쁨을 지면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명혁아! 나는 네 말 그대로 오래 오래 살아서 내 사랑하는 아들 만날 날을 기다리겟다. 몽중엔들 이저스랴 내 명혁이. 부디 건강하기를 축원하면서. 어머니 글 9월 29일” 저는 그 편지를 받아 들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뒷 마당에 가서 읽고 또 읽으면서 울고 또 울고 또 울었습니다. 결국 저는 슬픔과 아픔과 보고픔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리면서 살아가는 눈물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후부터 십자가에 나타난 슬픔과 아픔의 이별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고 “엘리 엘리 라마사빅다니” 라고 부르짖으시던 주님의 부르짖으심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슬픔과 아픔을 당하는 여러 종류의 많은 사람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습니다. 아마 어머니를 이별한 수 많은 중국 연변의 조선족 고아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게 된 것도 그런 연유였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와의 이별의 슬픔과 아픔은 저로 하여금 한 평생 눈물을 흘리면서 살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어머니의 편지 사본을 성경책 속에 넣고 다니면서 읽곤 합니다. 편지 사본 한 장은 제 사무실 벽에 부쳐두고 보곤 합니다. 편지 원본은 귀국 후 중앙정보부에게 빼앗겼습니다.

 

 

넷째로, 저에게 “눈물의 감동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 중 또 하나는 제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지 20년 후에 북한을 바라보면서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라고 부르면서 울고 또 운 일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12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해서 총회신학교에서 교수하던 1977년 11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중앙정보부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서 밤이 맞도록 두 사람에게 심한 심문과 취조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북한에 편지를 보낸 일과 주일 성수를 방해하는 군사 정부를 비판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주 편안하고 당당한 마음으로 그들의 취조에 응했습니다. 오히려 저들을 충고도하고 권면도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풀려 나왔는데 저들은 제가 귀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어머니의 편지 원본을 압수해갔습니다.

 

 

어머니의 편지를 압수 당한 지 20여년이 지난 1997년 1월 5일 뜻밖에 어머니의 편지 사본 한 장을 이모님 한 분으로부터 전해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50여년만에 처음 보는 어머니의 예쁜 사진도 함께 전해 받았습니다. 저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30여년전의 감격이 되살아났습니다. 저는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어머니의 피 맺힌 사랑을 다시금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를 부르고 또 부르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보았습니다. 북녘 하늘을 바라보면서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눈물로 쓴 편지였습니다. 저는 편지를 쓰면서 울고 또 울고 또 울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부르고 또 불러도 못다 부를 그 이름,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부르고 또 불러도 좋고 또 좋은 그 이름,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압수 당했던 어머니의 편지 사본을 20여년만에 다시 찾아 읽고 또 읽고, 그리고 50여년만에 처음 보는 어머니의 예쁜 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 나는 어머니를 부르고 또 불러 보았습니다. 아,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는 너무나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나를 부르시는 어머니의 애절한 절규를 한마디 한 마디 다시 들으면서 어머니의 가슴에 피 맺힌 아픔과 슬픔을 가슴으로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너무나 사랑하셨고 너무나 사랑하시다가 나중에는 나를 남쪽으로 떠나 보내시는 가장 큰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맏아들을 스스로 잃는 것보다 더 큰 희생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스스로 가장 큰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로 하여금 가장 큰 희생을 치르며 가장 큰 아픔과 슬픔을 안게 한 나의 불효를 무엇으로 갚아 드릴 수가 있사옵니까? 어머니, 나의 불효를 책하시고 또 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는 어머니에게 얼굴 한번 보여 드리지 못했고, 그렇게도 잡아보고 싶어하시는 손 한번 쥐어 드리지 못한 채 20여년이 지났고 30여년이 지났으며 이제는 50여년이 지났습니다. 이 몹쓸 불효 자식을 책하시고 또 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는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철도 없이 어머니를 훌쩍 떠나 남쪽으로 온 다음 한 2년 동안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밤마다 남 몰래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물론 이모님들이 나를 잘 보살펴 주셨지만 나는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기도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나는 부족함이 없는 한 생애를 살아 왔습니다. 아니 너무나 넉넉한 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에게 조그마한 위로와 기쁨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하나님을 바로 예배하고 싶은 단 한가지 마음을 가지고 어머니를 떠나 남쪽으로 온 저를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많이 사랑하셨고 너무나 많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마음껏 공부도 할 수 있게 해 주셨고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길 수도 있게 해 주셨습니다. 어머니, 나는 병원에 가는 것도 잘 모를 정도로 건강하게 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행복한 가정도 이루었습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일들을 하지만 특히 북한동포 돕기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팔순이 훨씬 지나신 어머니께서 지금 살아 계시다면 나는 어머니를 마음껏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몸도 씻어 드리고 싶고, 음식도 대접해 드리고 싶고, 그리고 어머니의 품 안에서 함께 잠도 자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지금 하늘 나라에 계시다면 먼저 순교하신 아버지를 뵈올 터이니 어머니의 슬픔을 거두시고 위로와 기쁨을 아버지와 함께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요사이 나는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많이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사실 이런 기도는 처음 드려보는 기도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는 어머니 뵈올 날을 날마다 기다리겠습니다. 먼저 천국에 간 어머님의 손자인 나의 사랑하는 아들 철원이, 나를 늘 칭찬해 주시면서 나에게 신앙의 뿌리를 심어 주신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그리고 누구보다도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 주신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를 뵈올 날을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바르고 진실하게 살아가겠습니다. 어머니가 진실하게 사는 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위로하시고 축복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1997년 1월 12일 불효자식 명혁 올림.”

 

 

다섯째로, 저에게 “눈물의 감동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 중 또 하나는 뇌수종이라는 불치의 병을 지니고 태어나서 4년 동안 극심한 고통과 아픔을 지니고 살다가 세상을 떠나 하늘 집으로 올라간 철원이를 바라보면서 저는 맨날 울면서 기도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철원이를 경기도 양주시 신세계 공원묘지에 묻고 돌아와서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라는 제목의 글을 썼는데 그 글이 총신대보(1977년 19월 31일) 에 실렸습니다. 저의 제자들이 그 글을 읽고 너무나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또 고백했습니다. 그 글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고생과 수고로운 삶을 다 마치고 이제는 주님의 품 안에서 고운 옷을 입은 동무들과 함께 주님을 섬기며 즐거워하는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네가 즐겨 부르던 찬송소리가 지금도 아빠 귀에 쟁쟁하구나. “예수께로 가면 기쁘리로다. 걱정 근심 대신 재미 많도다. 예수께로 가면 기쁘리로다. 나와 같은 아이 부르셨도다. 영화로운 곳에 있는 동무들 고운 옷을 입고 주를 섬기네” 가사의 뜻을 되새겨 물으며 몇 십 몇 백 번을 아빠와 함께 부르던 그 찬송가의 뜻이 정말 그대로 이루어졌구나! “아빠, 걱정 근심이 아야 아야 이렇게 아픈거지? 재미 많은 게 뭐야? 아프지도 않고 좋고 기쁜 거지? 아빠, 누구와 같은 아이 부르셨지? 이렇게 물어봐” “그래 철원아, 누구와 같은 아이 부르셨지?” “철원이와 같은 아이 부르셨지 뭐” “누가 부르셨나?” “예수님이 부르셨지 뭐” “철원아 네 마음이 슬프나 기쁘나?” “기뻐!” “왜 기쁜가?” “예수 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기쁘지!”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견디기 어려운 그 아픔 중에서도 너는 그렇게도 잘 참았고 기뻐했지! 철원아 너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가장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과 아픔을 당하였단다. 머리 속 뇌수의 압력이 너무 심해져 머리뼈가 벌어질 정도의 아픔을 당하면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울곤 하던 네 모습을 생각만 해도 이 아빠의 가슴은 미어지는 것만 같단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너는 아픔을 당할 때마다 아빠에게 기도해 달라고 했었지? 이 아빠는 너 때문에 기도하는 법을 차츰 배우게 되었단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죄를 뉘우치며 간절하고 진실하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은 바로 너 철원이었단다. 아빠가 너를 위해 오래 오래(때로는 종일) 기도할 때마다 너는 그렇게도 좋아했지. “아빠는 기도를 잘 해서 최고야!”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그렇게도 괴롭고 아픈 나날을 보내면서도 너는 한 번도 하나님이나 아빠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불평하지도 않았지! 마지막 1년 동안 시력을 잃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도 너는 한번도 답답하다고 불평하지 않았지! 너는 오히려 사람들이 “아이고” “죽겠다” 라고 말하면 “아이고 소리 하지마” “죽겠다 소리 하지마. 그건 나쁜 말이야” 라고 했지. 마치 “나는 이렇게 힘든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아이고 죽겠다’ 라는 말 한 마디 안 하는데 당신들은 왜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라고 타이르듯이! 아빠는 너의 마음 속에서 천국의 평화와 기쁨을 볼 때마다 천국이 점점 더 가까워짐을 느끼곤 했단다. 네가 시력을 잃은 마지막 1년 동안 때때로 “아빠 하늘이 보여!” “아빠 예수님이 오셨어” 라고 말하던 뜻을 이제야 분명히 알게 되었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것을 보는 너의 눈을 가리우시고 천국을 볼 수 있는 눈을 여시었던 것을 이제야 분명히 깨닫게 되는구나!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너는 괴로울 때마다 “아빠 나 천국 가고 싶어. 엄마, 아빠, 누나 다같이 천국 가고 싶어. 천국 가고 싶어. 천국에 가면 구주 예수님이 나 아픈 것 완전히 다 고쳐주시지”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지. 너는 심한 고통을 당할 때마다 이런 말을 하곤 했었지. “아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머리에 가시관 쓰시고 피 흘렸지! 손에도 발에도 못 박히어 피 흘리셨지! 아빠 예수님은 나보다도 더 아프셨지!” 네가 하던 말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가슴은 너무도 귀한 아픔으로 가득히 미어지는 것만 같구나! 너는 예수님 앞에 설 때 그래도 조금은 떳떳함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너 위해 당한 고통의 몇 만분지 일을 너도 경험했으니 말이다. 고난의 축복을 나에게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너 철원이었단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이 땅에서 4년 동안의 너의 삶은 이 아빠를 위해서 산 값진 삶이었단다. 아빠가 졌어야 할 십자가를 네가 대신 졌으니 말이다. 철원아! 고맙다! 너는 아빠에게 얼마나 귀한 설교와 간증과 교훈을 주었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나는 네가 너무도 귀하고 사랑스럽고 보고 싶구나! 네가 있는 천국이 그렇게도 그리워지는구나. 너는 지금 무덤에서 잠자는 너의 몸을 바라보며 영화로운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고 있지? 철원아 아빠도 너와 꼭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부활의 아침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단다. 사도 요한이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던 기도가 이제는 아빠의 기도가 되기 시작했단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네가 그렇게도 즐겨 부르던 수많은 찬송가! 아빠가 가사를 잘 모르는 찬송을 부를 때마다 네가 가사를 가르쳐주면서 같이 부르던 그 찬송가들을 지금 혼자 불러볼 때마다 너의 귀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구나. 너는 찬송가와 고전음악을 그렇게도 좋아했지. 이제는 천군천사와 함께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기쁘게 노래 하거라.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네가 날마다 즐겨 암송하던 그 수많은 성경 귀절을 지금 혼자 읽어 볼 때 그 말씀들의 뜻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구나.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시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네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혜를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네가 늘 암송하던 욥기 23:10 말씀과 같이 네가 가는 길을 하나님은 다 아셨고 너를 보배와 같이 정금과 같이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너를 단련하신 것을 이제야 분명히 깨닫게 되는구나.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네가 비록 견디기 어려운 괴로운 삶을 살았지만, 그러나 너만큼 귀한 삶을 살고 이 세상을 떠난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죄 없는 깨끗한 삶, 고통을 당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위로와 교훈을 안겨주며 천국의 평화와 구원의 즐거움을 간증하며 사는 삶을 사는 것보다 더 귀하고 값진 삶이 어디 있겠니? 아빠는 너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새로운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단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너는 또한 엄마 아빠에게는 비할 수 없는 효자였단다. 세상을 떠나기 석 달 전에는 미국에 가서 전문의사의 진찰도 받았고 할머니를 비롯한 여러 친척들을 만나 인사도 드렸으니 너의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 신유의 은사를 받은 현 권사님의 기도를 받은 후에 하늘 나라로 감으로 부모의 마음에 아무런 한스러운 마음을 남기지 않았으니 얼마나 효자였니! 그러나 아빠는 너에게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른다. “아빠, 신학지남 원고 써야 돼?” “아빠, 강의 준비하느라고 바뻐?” “아빠, 나하고 좀 놀아!” “아빠, 설교준비 해야 돼?” 아빠는 늘 바쁘게 지내느라고 너하고 같이 이야기하고 놀지 못했단다. 네가 천국으로 가기 4일 전에도 학교에 있는 아빠에게 전화하면서 “아빠, 나 머리 아퍼, 아빠 빨리 와” 라고 했지만 그날도 아빠는 원고 쓰느라고 밤 늦게야 집에 돌아갔단다. 왜 좀 더 일찍 들어가지 못했던가 생각하면 아빠의 가슴은 미어지는 것만 같단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미안하다! 그러나 고맙다! 어서 속히 철원이 만날 날만을 기다리겠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너는 커서 목사님이 되어 기도도 많이 하고 전도도 많이 하겠다고 늘 말하곤 했지. 네가 참으로 훌륭한 목사님이 되어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려보낼 수 있게 되기를 아빠가 늘 기도하던 것을 너도 잘 알지? 철원아 이제는 이 아빠가 너 대신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 철원이의 몫까지 이 아빠가 다 하겠다. 철원이의 소원을 이 아빠가 다 이루어 줄게. 아빠는 너의 몸을 무덤에 묻고 돌아오는 길에 노회에 들려 강도사 인허를 받았단다. 그리고 얼마 있으면 목사 안수도 받게 될 것이다. 너의 몫을 이 아빠가 다 해주마! 아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고통과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안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다가 보고 싶은 철원이 얼굴을 기쁨으로 대하게 될 그날만을 기다리겠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참으로 고맙다. 아빠는 너의 무덤 앞에 다음과 같은 비문을 세우려고 한다. “고난의 의미와 천국의 평화를 가르치고 먼저 주님의 품으로 간 어린 아들 철원이가 영화로운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며 여기 편히 쉰다. 주후 1973년 11월 11일에 나고 주후 1977년 10월 10일에 가다.” 』 철원이야말로 부족한 저로 하여금 사랑의 눈물과 슬픔의 눈물과 아픔의 눈물과 회개의 눈물과 기도의 눈물과 감사의 눈물을 계속해서 흘리게 한 보석과 같은 어린 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구중하고 아름다운 보석과 같은 어린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들립니다.

 

 

여섯째로, 저에게 “눈물의 감동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 중 또 하나는 1983년 7월 12일부터 10일 동안 화란 암스텔담에서 “국제 전도대회”에 참석하면서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아이스랜드의 리카벡에 도착해서 어느 작은 호텔 방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또 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암스텔담에서 “국제 전도대회”에 참석해서 빌리 그래함 박사님의 진솔한 고백의 말씀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빌리 그래함 박사님의 복음 설교와 함께 진솔한 고백과 권면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박윤선 목사님께서 저와 같은 의자에 앉아서 빌리 그래함 박사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복음 전파는 행복한 삶을 위한 지침도 아니고 어떤 새로운 윤리의 기준도 아니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그대로 전파하는 것이 복음 전파인데, 복음 전도는 기술이나 어떤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변화된 삶으로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전도”는 기술이나 훈련이라기 보다는 변화된 사람의 “삶” 이라고 역설했습니다. 빌리 그래함 박사님은 복음 전도자가 삶의 성결을 잃으면 복음 전도자의 삶은 끝장이라는 말씀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저 유명한 복음전도자 아무개와 아무개가 어디 있느냐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자기도 전에는 자기가 인도하는 전도집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헌신했느냐에 대한 관심을 가졌었고, 얼마나 많은 헌금을 드렸느냐에 대한 관심을 가졌었는데 지금은 그런 관심을 다 내어 버리게 되었다는 고백도 했습니다. 저는 너무너무 깊은 감동과 충격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루 바닥에 꿇어 앉아서 울고 또 울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빌리 그래함 박사님이야말로 부족한 저의 복음주의적 삶과 사역에 깊은 영향을 미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83 암스텔담 국제전도대회를 마치고 1983년 7월 24일 카나다 뱅쿠버에서 개최되는 제 6차 WCC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암스텔담을 떠나 카나다로 가는 길에 7월 21일 아이스랜드의 리카벡에 도착해서 어느 작은 호텔 방에서 하룻밤을 묵은 일이 있었는데 그날 밤 시편 139:17,18 절을 읽다가 너무나 깊은 감동을 받고 울고 또 울고 또 울면서 무릎을 꿇고 감사와 회개의 기도를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17,18). 다윗에게는 물론 부족한 저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섭리의 조목 조목들이 모래알 보다 더 많다는 사실 앞에 너무나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이릴 때부터 그 때까지 지내온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일들을 너무너무 세밀하게 간섭하시면서 저를 가장 선한 길로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생각하면서 너무 감격해서 울고 또 울고 또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고 저를 생각해주시고 저를 간섭해주신 일들이 너무 많은데 그 수가 모래보다 많다는 다윗의 고백에 저는 너무 깊은 감동과 충격을 받고 울고 또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사실 다윗은 입을 열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고백하고 또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시 145:8). 결국 저는 시편 51편과 103편과 139편과 143편과 145편 등을 너무너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부족한 저도 모든 것이 망극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은혜임을 고백하고 또 고백하면서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일곱째로, 저에게 “눈물의 감동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 중 또 하나는 2005년 10월 중남미 도미니카 선교대회에 참석해서 은혜와 감동을 받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운 일이었습니다. 중남미의 조그만 섬인 도미니카 공화국의 싼타 도밍고에 한국과 미국과 중남미 곳곳에서 80여명의 선교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교제하고 발표하면서 세계선교에 대한 비전과 전략을 함께 나누며 모색했는데 도미니카 선교대회는 은혜와 감동이 충만한 너무나 좋은 선교대회였습니다.

 

 

첫 번째로 한국교회 선교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96세의 방지일 목사님께서 아침 기도회 메시지를 전하셨는데 선교대회에서 선포된 메시지들 중 가장 감명 깊은 은혜와 영감이 충만한 메시지였습니다. 확신에 넘치는 쟁쟁한 목소리와 놀라운 기억력을 지니고 전하신 에스겔 39:8 한절 말씀에 대한 깊고 폭 넓은 강해 설교에 참석자들은 모두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존재의 모든 오관이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듣고 느끼고 만져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이나 상황이나 전략이나 계획 등을 바라보는 대신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인류 구원의 일과 선교의 일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구원의 날은 과거에 이루어지고 미래에 이루어질 날이지만 우리에게 있어서는 항상 현재에 이루어지는 이 날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96세의 노구를 이끌고 도미니카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고 다음 달에는 호주와 뉴질랜드에 가서 또 말씀을 전하실 예정이라는 말씀에 아들과 손자들 같은 참석자들은 모두 감탄을 자아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선교 2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지도자 몇 분들의 선교 지향적 삶과 사역에 대한 말씀을 들으며 참석자들은 모두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최복규 목사님은 전도사 시절부터 최근에 은퇴 하시기까지 평생의 목회 사역과 부흥 사역을 선교 지향적으로 해 오셨다고 간증했습니다. 최복규 목사님은 1년에 20여 차례 이상 선교지를 방문하면서 선교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고 간증했습니다. 산돌중앙교회의 신동우 목사님 역시 극히 가난한 지역에서 25년 전에 목회를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선교지향적 목회를 해 오고 있다고 간증했습니다. 신동우 목사님은 지난 25년 동안 선교지를 700여 차례나 방문하여 선교사들을 위로 격려하며 선교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오고 있다고 간증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새벽 2시에 선교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는데 선교지에 있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일주일간의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선교지로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치안적으로 위험에 처해 있는 소말리아에 있는 선교사를 만나 함께 울고 울고 또 울다가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선교사에게 잠시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선교지로 가라고 권면했으나 선교사는 그 권면을 뿌리치고 그대로 선교지에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면서 신동우 목사님은 울고 울고 또 울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미국의 이원상, 박희민, 호성기 목사님과 토론토의 임현수 목사님도 선교지향적 목회에 대한 간증을 했는데 모두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세 번째로 선교 3세대라고 할 수 있는 선교현지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보고와 간증이 있었는데 너무나 큰 감동과 은혜와 도전을 받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과테말라로 달려가서 기도의 무릎으로 선교하고 있는 김상돈 선교사의 간증은 고난과 역경의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한 사도행전적 선교의 간증이었습니다. 모두 너무나 큰 감동과 은혜와 도전을 받았습니다. 23년전 브라질의 오지인 떼레지나의 원주민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원주민들과 의식주를 함께 하며 선교하고 있는 강성일 선교사의 선교 간증 역시 감동과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찌는듯한 무더위로 아내의 입이 삐뚤어지고 영양실조로 아이들이 쓸어져 누우며 벌레들이 몸을 물고 몸 속에 알을 까서 온 몸이 터지고 부어 오르는 온갖 종류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오직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을 브라질 원주민들에게 전하기 위해 23년을 버텨온 강성일 선교사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커다란 감동과 은혜였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극심한 어려움 중에서 사역하고 있는 강성일 선교사를 방문한 곽선희 목사님이 선교사역을 접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자기를 도와 선교훈련원의 책임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부탁은 강성일 선교사가 브라질에서 경험한 가장 큰 시험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강성일 선교사는 곽 목사님의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더 이상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브라질에 귀화해서 브라질 국민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참된 행복과 삶의 가치는 편안한 환경에 달린 것이 아니고 소명과 헌신과 사랑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확인하는 귀한 순간들이었습니다.

 

 

네 번째로 이번 선교대회는 선교전략 대회였기 때문에 강승삼 목사님 이원상 목사님 박희민 목사님 전재옥 교수님 김의환 박사님 등 여러 선교 지도자들이 선교전략에 대한 전문적인 발표들이 있었는데 그 발표들은 많은 도전과 각성과 격려가 되었습니다. 박희민 목사님은 선교지향적 목회의 특징 10 가지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다섯 번째로 수요일 밤의 모임은 뜻 깊은 감동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선교의 제 3세대인 유병국 선교사님의 뜨겁고 생동적인 선교 도전에 이어 선교 제 2 세대인 최복규 목사님의 선교 일념의 평생 사역에 대한 간증이 있었는데 감동과 은혜가 충만했고 참석자들은 모두 선교에 일념 하여야 할 것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최복규 목사님의 말씀이 끝난 후 최복규 목사, 최일식 목사, 김명혁 목사, 강승삼 목사는 선교 제 1세대인 방지일 목사님 앞으로 다가가서 마루에 엎드려 큰 절을 올리며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했는데 우리는 물론 참석자들은 모두 깊은 감동에 사로 잡혔습니다. 폐회 기도를 저보고 하라고 해서 제가 강대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왼편에는 최복규 목사님, 오른편에는 최일식 목사님이 서 계셨는데, 저는 감동의 울음이 북 바쳐 올라와 도저히 기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처음 갖는 경험이었습니다. 소리 내어 울다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성자 예수님께,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 성부 하나님께, 순교의 피를 흘리신 신앙의 선배님들께, 수고의 눈물과 땀을 흘리신 신앙의 선배님들께, 그리고 선교의 현장에서 수고하고 있는 동역자들과 후배 선교사님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감사의 기도를 눈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선교사들과 저들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시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리고 축도로 밤 집회를 마쳤습니다. 눈물로 가득한 기도의 조목들이었습니다. 눈물의 감동과 은혜가 충만한 도미니카 선교대회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축복이었는지 모릅니다.

 

 

여덟째로, 저에게 “눈물의 감동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 중 또 하나는 제가 강변교회에서 목회할 때인 2006년 9월 어느 날 새벽기도회 시간에 롬 7:24 말씀을 읽으면서 울고 또 운 일이었습니다. 제가 그 당시의 상황을 글로 썼는데 그 글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는 제목으로 뉴스파워(06.9.14)와 국민일보(06.9.21)에 그대로 실렸습니다. 그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오늘 새벽기도회 시간에 성도들과 함께 사도 바울의 처절한 죄 고백의 탄식을 읽으면서 가슴과 눈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오늘 아침 차를 타고 교회로 오는 시간에도 그 눈물은 계속해서 내 가슴과 눈에서 흐르고 있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What a wretched man I am!” 자기 자신을 가리켜 ‘저주 받을’ 사람이라고 처절한 죄 고백을 한 사람이 정말 사도 바울 자신이었을까? 그래서 일부 성서 학자들은 그 죄 고백이 사도 바울 자신의 죄 고백은 아니고 중생하지 못한 자나 죄인 일반의 죄 고백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필자가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성서 학자 박윤선 목사님은 그것이 사도 바울의 죄 고백이라고 말하면서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런 경험이 없다” 라고 잘라서 말했다. 그리고 “중생한 자의 영혼이 범죄한다” 라고 설명까지 부쳤다. 나는 오늘 새벽 사도 바울의 처절한 죄 고백의 탄식을 한 마디 한 마디 읽으면서 ‘어쩌면! 어쩌면!’ 하면서 나 자신도 감동에 떨며 탄식하고 있었다. 삼층 천에 올라갈 정도로 가장 큰 은혜를 체험한 사도가! 그의 손 수건이 닿기만 해도 불치의 병들이 물러갔던 가장 큰 능력을 지녔던 사도가! 어떻게? 어떻게? 그런 처절한 죄 고백의 탄식을 할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나는 가슴과 목이 메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이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4,18,21,24).』

 

 

『기독교는 값싼 은혜를 파는 종교가 아니다. 만사형통을 빌어주는 종교도 아니다. 그럴듯한 선으로 포장해주는 종교도 아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부끄러운 수치와 절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들어내는 종교이다. 그리고 자신의 저주스러운 모습을 하나님께 진솔하게 고백하는 종교이다. “내 속에 정한 곳이라고는 한 곳도 없습니다”(다윗).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이사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사도 바울). “나는 망할 지이옵니다.”(어거스틴). “나는 작은 벌레입니다”(프랜시스). “나는 버림 받을 죄인입니다”(루터).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칼빈). “나는 눈 멀고 병 들고 연약한 죄인입니다”(웨슬레).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길선주).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이기풍). “이 놈이 주님이 차지하여야 할 자리를 대신 차질하고 있습니다”(주기철).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며 티끌 같은 미말의 존재입니다”(이성봉). “나는 고멜과 같은 죄인입니다”(김치선). “나는 어릴 때부터 범죄를 계속한 불의하고도 불충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는 큰 죄인임을 깨닫고 두렵게 떨며 울었습니다”(손양원). “나는 신사 참배한 죄인입니다”(한경직).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박윤선). 지금 우리는 처절한 죄 고백의 탄식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며 한탄했던 욥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모두 너무 의인들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다른 사람들의 잘못만 크게 보는 너무 밝은 눈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자신을 미워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분노하는 이상한 가슴을 지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메마른 나의 가슴에 사도 바울이 가슴에 지녔던 처절한 죄 고백과 탄식의 몇 백분의 일이라도 주신 주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길선주 이성봉 김치선 목사님들이 지니셨던 처절한 죄 고백과 탄식을 나도 가슴에 지니면서 남은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소원한다.』

 

 

결국 저는 회개를 가장 귀중한 것으로 여기며 사모하게 되었고 회개를 가장 많이 한 다윗과 사도 바울을 가장 존경하게 되었고 길선주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등 신앙의 선배들을 가장 존경하며 본 받고 싶게 되었습니다.

 

 

아홉째로, 저에게 “눈물의 감동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 중 또 하나는 제가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후에 이곳 저곳을 방문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일입니다. 전국의 여러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여 설교하고 기도하면서, 독일의 작은 교회 성도들을 만나서 설교하고 기도하면서, 피차 눈물을 흘리면서 운 일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한두 가지 일만 이야기합니다. 제가 강변교회에서 2008년 1월 13일 은퇴했는데 2008년 부활절 전후에 눈물을 흘리면서 운 일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글들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활절 새벽부터 흐르기 시작한 뜨거운 눈물이 지난 며칠 동안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 덕양기독교연합회가 주관한 부활절 새벽예배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도 나의 마음 속에는 부활에 대한 감격보다는 일종의 혼란과 무거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강대에 오른 순간 내가 앉을 의자 앞에 무릎을 끓었다. 대단한 기도를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순간 뜨거운 눈물이 눈과 가슴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 위해 죽으시고 나 위해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회개와 감사의 눈물이었다. 사실 나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감격에 북 바쳐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특히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배신자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전했을 때 나의 가슴은 황송함의 감격으로 떨고 있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지난 며칠 동안 이 질문을 상기할 때마다 나는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덕양에서 부활절 새벽예배를 마친 후 우리 부부는 강변교회로 달려갔다. 은퇴 후 10주 만에 강변교회로 달려간 것이었다. 1층 식당에서 만난 권사님과 집사님들이 나를 만나자 마자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나도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보고픔과 반가움과 사랑의 눈물이었다. 보고픔과 반가움과 사랑의 눈물은 예배 전에도 예배 중에도 예배 후에도 이어졌고 반가움의 포옹은 수없이 많이 이어졌다. 본래 눈물이 많은 이용환 집사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줄줄 흘리며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본래 눈물이 적은 강영희 집사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30여 년 동안 미운 정 고운정 다 들었는데 눈물을 흘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보고픔과 반가움과 사랑의 눈물을 흘린 행복한 하루였다.』

 

 

『나는 지금 중국 연변에 와서 또 다른 종류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그 눈물을 나의 가슴 병에 담고 있다. 가난과 고난의 슬픔과 아픔 중에서 자라가는 불쌍한 우리 조선족 어린이들과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저들의 슬픔과 아픔을 함께 느끼면서 슬픔과 아픔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일행은 호텔에 들러 여장을 풀지도 못하고 그 길로 즉시 왕청으로 달려갔다. 소형버스로 2시간 달려서 왕청에 도착했다. 이번에 긴급 지원하게 된 네 가정을 일일이 찾아 보기 위해서였다. 엄마 아빠 없이 할머니 손에서 자라고 있는 8살 난 정권일이는 10리 되는 초등학교를 걸어서 다니는데 학교에서는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반찬도 없는 밥을 정신 없이 먹어 치우는 손자를 바라볼 때마다 할머니는 가슴으로 눈물을 흘린다고 말했다. 8살 난 이봉림은 간염으로 고생하는 엄마와 함께 둘이서 살고 있는데 엄마는 병원에도 한번 가보지 못하고 오직 어린 딸에게 모든 소망을 두고 하루 하루 아픈 몸으로 품팔이를 하면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나의 집사람은 봉림이 엄마와 헤어질 때 둘이 한동안 부둥켜 안고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가슴에 슬픔과 아픔의 눈물을 지니고 연길로 돌아와서 된장찌개 하나로 저녁식사를 하고 호텔에서 여장을 푼 후 하루 밤을 편하게 잤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화요일 아침 식사를 한 후 우리 일행은 2시간 거리에 있는 화룡으로 달려갔다. 결연가정과 긴급지원 가정 8가정을 일일이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한 가정 한 가정을 방문할 때마다 또 다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홀 엄마, 홀 아빠는 각종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다리 하나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홀 엄마와 함께 사는 초등학교 1학년 박 성 어린이는 예쁘고 착하게 생겼는데 너무너무 가난하고 불쌍했다. 탈북 여성 엄마가 어디론가 도망가서 홀 아빠와 함께 사는 초등학교 1학년 이 화 어린이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울면서 엄마에게 편지를 쓰곤 한다고 했다. 가장 슬픈 이야기는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눈물과 사랑으로 쓰다듬으면서 착하고 예쁘게 살아가고 있는 라혜연이의 이야기이다. 엄마 림계향은 한국에 와서 일하다가 뇌출혈로 쓸어져서 식물 인간이 되었다. 슬픔과 아픔과 절망 중에서도 라혜연이는 학교에서는 최 우등생으로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고 있었다. 내가 식물 인간이 된 혜연이 엄마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했을 때 엄마는 약간의 반응을 나타내며 눈물을 조금 흘렸다. 박 성, 이 화 어린이와 혜연이가 나란히 앉아서 식사를 했는데 너무너무 예쁘고 불쌍해서 안아주고 안아주고 또 안아주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가슴 병에 담으면서. 그 자리에서 혜연이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다. 예쁘게 또박또박 쓴 글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제 고마운 분들의 후원을 받게 될 팔가자 중학교 3학년 5반에 다니고 있는 라혜연입니다. 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이 현실 앞에서 멍해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고마운 분들도 있구나! 한 학생도 아니고 이 숱한 빈곤 학생들에게 후원의 손길을 뻗치신다는 생각에 저는 떨리고 긴장된 마음을 가라 앉히고 고마운 분들에 대한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전달하기 위해서 필을 들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빈부차이가 있듯이 우리 여기 자그마한 고장에도 빈부차이는 영원히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나마 빈곤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조그마한 빛을 볼 수 있었던 건 바로 당신들의 따스한 마음 때문입니다. 고마운 분들이여! 정녕 당신들은 날개 잃은 천사와도 비길 바가 아니며 당신들의 따스한 매 손길 하나하나가 얼마나 친근하며 벅찬 감동을 느끼게 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오늘의 벅차고 감동된 심정을 안고 꼭 고마운 분들이 우리들에 대한 기대 훌륭히 성장하여 나라의 유용한 인재로 되는 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바르고 훌륭히 성장하여 열심히 학습에 힘써서 고마운 분들의 크나큰 은정에 대해 조금이나마 보답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너무너무 착하고 예쁜 마음의 글을 대하면서 나는 계속해서 슬프고도 아픈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그 눈물을 나의 가슴 병에 담는다. 나는 라혜연이와 엄마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밤이 깊었다. 내일 수요일 아침에는 안도와 용정으로 달려간다. (엄마들이 북으로 잡혀간) 금화와 선화도 반갑게 만날 것이다. 부족한 나에게 달려갈 곳을 주신 주님께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펼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주신 주님께 눈물겨운 감사를 드린다. 2008년 3월 25일 화요일 늦은 밤에.』

 

 

이것이 제가 2008년 4월에 쓴 글입니다. 사실 저는 2013년 6월 연변을 방문하고 돌아왔는데 라헤연이를 반갑게 만났습니다. 혜연이는 지금 연변대학교 농학원 2학년 학생으로 공부를 잘하고 있는데 편지를 써서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 편지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존경하는 목사님: 안녕하세요, 목사님. 저는 그동안 목사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로 학업을 지금까지 잘 완성하고 있습니다. 2007년 3월 11일 저의 어머니는 갑작스레 쓰러졌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저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마냥 행복하고 다정한 우리 집은 그 순간에 넘어졌습니다. 어머니는 그 아프고 힘든 시간들을 겪으면서 병마와 투쟁을 해보았지만 저의 이름 한 번 불러보지 못하고 저의 얼굴 한 번 더 보지 못하고 그렇게 아프고 괴로워하다가 저의 곁을 영원히 떠나갔습니다.… 목사님을 처음 보았을 때 저는 15살이었습니다. 초 중 때 항상 일등만 하던 저는 어머니의 갑작스런 아픔 소식을 듣고 청천 병력에 맞은 것처럼 눈앞이 캄캄하였습니다. 그 때 저한테는 희망도 없고 의지도 없고 신심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 목사님을 만나고 목사님은 저한테 두말없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저의 어머니 만나러도 가시고 어머니가 있는 영로원에 후원도 해 주시고 (어머니를 위해) 기도도 해 주시고 그 때부터 저는 목사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매달 저한테 생활비도 보내주시고 관심도 많이 가져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힘을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어머니가 항상 하던 말이 기억났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제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시련은 삶의 필수 과목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힘을 가지고 학업에 몰두 하였습니다. 그리하며 2008년 9월에 룡정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3년의 학업을 성공히 끝마친 뒤 2011년 9월에 연변대학 농학원 농립경제 관리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저는 2학년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희망 – 제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이루어주었습니다. 저는 이것만으로도 어머니가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머니한테 항상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그냥 제가 남들이 모두 다 겪는 고통을 제가 일찍 겪었다고 생각하며 저를 위로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목사님의 도움을 이렇게 받고 있어서 얼마나 감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항상 목사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나갈 것이고 비가 오면 만물이 자라나고 날이 개이면 상쾌하다시피 언제나 다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고 남을 돕는 것은 복을 짓는 일이라고 목사님처럼 앞으로 남을 도우면서 살겠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그동안 저에게 준 사랑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3년 6월 19일 라헤연 올림”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오늘 아침 “눈물의 감동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 라는 제목으로 저와 관련된 간증의 이야기들 아홉 가지를 했습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죄인이지만,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살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 드리고 또 감사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제가 범한 모든 죄악을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고,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재난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시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살다가 죽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눈물은 아주 아주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물은 가장 진솔한 자기 표현의 방식이고 가장 친밀한 소통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물을 흘릴 때 하나님과 친밀하게 소통하게 되고 사람들과도 친밀하게 소통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죄인들을 향해서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에 약하신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큰 죄를 범한 사람이라도 눈물을 흘리며 진실하게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뜨거워 지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십니다. 분에 넘치는 축복까지 부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중심이 뜨거우셔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 털로 씻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기뻐하시며 그녀에게 사죄와 구원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사람들도 눈물에 약합니다. 원수 지간이던 에서와 야곱이 “목을 어긋 맞기고 입 맞추고 피차 울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가로 놓여 있던 미움과 적대의 감정이 모두 눈 녹듯이 녹아 내리고 말았습니다. 요셉이 자기를 팔아 먹은 형들을 만나서 “방성 대곡하며” 울었을 때 그들 사이에 가로 놓여 있던 모든 미움과 적대와 두려움의 감정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며 울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심성이 메말랐고 우리들의 교회와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회사처럼 학원처럼 세속화되어가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프로그램과 행사에 너무 치우쳐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사야만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야만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이웃을 외면하면서 이기적으로 그리고 세상 유행을 따르면서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웃과 동포가 당하는 고통을 함께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며 울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들에게 눈물을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울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회개의 눈물과 슬픔과 아픔의 눈물과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눈물과 감사와 감격과 찬양의 눈물을 흘리면서 살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께서 집회 때마다 부르시던 찬송가, 김치선 목사님께서 새벽 기도회 때마다 부르시던 찬송가 177장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를 함께 부른 다음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