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5:1-5 2015.1.18(일)
우리에게는 이런 희망이 있습니다
새해들어 세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미국 서부개척시절, 서부로 금을 캐러 떠난 남자가 있었습니다. 이 남자는 서부 어디로 가면 확실히 금을 캘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몇 달동안 부지런히 곡괭이를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노다지는 나오지 않아 포기하고 그 곳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몇 십 년 후 같은 장소에서 엄청난 노다지가 쏟아졌습니다. 노다지를 발견한 사람도 오래전부터 전해져온 이야기를 듣고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금이 나올 때까지 파리라 마음먹고 땅을 팟습니다. 그런데 한 1미터 땅을 파자 금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팟더니 엄청난 금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1m였습니다. 처음 그곳을 판 사람이 1미터만 더 팟다면 엄청난 금맥을 발견했을 텐데 불행하게도 포기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에서 성공시키는 힘이 무엇일까? 두 가지라고 봅니다. 하나는 믿음입니다. “반드시 이곳을 파면 금이 나올거야”. 또 하나는 희망입니다. “내가 반드시 금을 캐서 큰 부자가 될거야”. 그리고 그 사이에 인내가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하면 희망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성공의 공식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공의 공식이 믿음의 세계에도 통할 수 있을까? 통합니다. 표현이 다르지만 원리는 같기 때문입니다. 두 주전에 저는 희망은 믿음에서 온다고 말했습니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믿음에서 희망이 나오고 희망은 믿음을 견고케 합니다. 지난 주에 저는 희망이 자라기 위해서는 평화의 환경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희망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으면 희망이 있다고 했는 데 그것은 어떤 희망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에게 옵니까? 벧전 3:15절 말씀과 같습니다. 벧전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사람들이 살면서 묻는 본질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둘째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유명한 성경 주석가 윌리엄 바클레이가 말했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할 일, 둘째 우리가 마음으로 사랑할 사람, 셋째 우리가 끝까지 붙들 희망“. 이 세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희망에 대한 책입니다. 교회는 이 희망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설교와 전도와 선교는 결국 희망에 관한 질문에 답변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만일 어떤 분이 여러분에게 예수믿는 당신이 가진 희망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고 하면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오늘 로마서가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희망, 그것은 무엇인가? 크게 삼단계로 우리에게 옵니다.
희망은 믿음으로 시작됩니다.
희망이 시작되는 출발점은 믿음입니다. 바울이 쓴 로마서는 모든 구원의 문제를 다룹니다. 1-3장은 구원을 방해하는 죄에 대해 다룹니다. 1장, 모든 이방인은 죄인입니다. 2장도 모든 유대인도 죄인입니다. 그리고 3장,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죄인이 스스로 할 일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른 대책을 세우셨습니다. 죄인인 인간에게 죄없는 예수님을 보내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롬3:25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죄없는 예수님이 죄있는 우리를 위해 대신 피흘리셨습니다. 하나님과 화목을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의로움”입니다. 24절, 롬3:24,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까지가 로마서 4장입니다.
5장으로 오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가를 설명합니다. 크게 두 가지 변화입니다. 먼저 오늘 말씀 1절입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예수님 믿어서 우리에게 온 첫 번째 변화는 화평입니다. 화평은 곧 관계개선입니다. 죄로 인해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님 때문에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이것이 “화평”입니다. 그런데 이 “화평”은 용서는 하되 다시는 이야기하지는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동네에 아버지 재산 빼돌려 집나간 아들이 있었습니다. 다 까먹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주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그를 평생 보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하나님은 다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가면 하나님은 용서는 하고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므비보셋을 아십니까? 사울의 손자입니다. 사울이 망하자 므비보셋은 다윗앞에 엎드렸습니다. 옛날 같으면 삼족을 멸할 때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할아버지의 밭을 더 그에게 다 주고 다윗 왕과 함께 먹게 했습니다. 다윗을 그렇게 괴롭혔던 원수의 손자와 함께 밥을 먹다니. 파격적인 용서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죄를 짓고 신부앞에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신부가 말했습니다. “3일동안 회개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오세요”. 3일후에 다시 왔습니다. “그래. 하나님이 뭐하고 하던가요?” 그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제 죄를 다 잊어버렸다고 하던데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다 잊어 버립니다. 스메데스라는 사람이 “용서”라는 책을 썻습니다. 거기서 그가 하나님의 용서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빚진 자를 용서하고 그 빚을 대신 갚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원수를 용서하고 그 원수와 함께 밥을 먹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죄수를 풀어 주고 그 죄수에게 자기가 가해자였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1절을 보시겠습니까?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다같이 “화평을 누리자”. 구원받는 것은 간신히 용서받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는 것은 간신히 지옥형벌 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첫 번째 변화입니다.
더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2절입니다. 롬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서 “들어간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세 번 밖에는 쓰이지 않았습니다. 로마서에 한번, 에베소서에 두 번 나옵니다. 이 말은 백성이 왕앞에 나갈 때 쓰는 말입니다. 왕궁에 가면 의전담당의 안내를 따라 천천히 왕앞에 나아갑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나 왕궁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을 갖춰야 하고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은 왕이신 하나님께 나갈 자격을 얻었고 허락도 받았습니다. 그 왕은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엡2:18에도 나옵니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믿고 구원받으면 왕이신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자격은 나에게 있지 않고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2절, “그로 말미암아”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자격을 얻었고 그로 말미암아 허락을 받았습니다. 다시 2절을 보시겠습니까? 롬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에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께 서겠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섭니다. 오직 은혜로 섭니다. 요즘 나온 찬양 “은혜아니면”을 아십니까? 너무 가사가 좋습니다. “은혜 아니면 나서지 못하네. 십자가의 그 사랑 능력아니면 나서지 못하네. 은혜아니면 나서지 못하네. 놀라운 사랑 그 은혜아니면 나서지 못하네”. 우리가 예수님 믿어 의로워지면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시 2절입니다. 롬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에 “영광”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이 “영광”이 우리가 얻게 될 희망의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희망은 간신히 밥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우리는 개털모자 쓰려고 천국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희망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고 모든 것이 빛으로 둘러쌓인 그곳을 향해 우리는 갑니다. “그 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그것이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고등학교때 앙드레 지드가 쓴 <전원 교향곡>을 읽고 감동받은 적이 있습니다. 1890년대 스위스의 한 불어권 지역을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주인공은 한 기독교 목사와 제르트뤼드라는 이름을 가진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소녀와의 관계를 썻습니다. 재미있는 부분은 목사가 제르트뤼드에게 알프스의 초원, 화사한 꽃들, 백설이 뒤덮인 산의 장엄한 경관 등을 묘사해 주는 장면입니다. 그는 강가에 핀 파란 꽃들을 묘사하는 중에 하늘빛을 끌어표현했지만 그의 말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다가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납니다. 근처 도시 로잔의 한 안과의사가 제르트뤼드를 수술한 후 시력을 회복시킨 것입니다. 지금까지 목사의 말로만 전해 들은 소녀가 자기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소녀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덕분에 시력을 되찾고 보니, 제 앞에는 제가 지금껏 꿈꾸어 왔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그래요, 정말, 저는 햇살이 그렇게 찬란하고, 빛이 그렇게 눈부시며, 하늘이 그렇게 광활할 줄은 결코 상상하지 못했어요.” 어릴 때 제가 이것을 읽고 생각했습니다. “아, 그래,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것이구나”. 그렇습니다. 바울이 말한대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희망이 그런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무슨 말로 표현해도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주실 희망은 더 크고 더 아름답고 다 위대할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영광가운데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믿음의 결과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 믿음으로 의롭게 되면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가 시작되고 은혜로 그 앞에 나가게 되어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희망은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희망은 고난을 통해 강해집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말한 희망의 두 번째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고난입니다. 3-4절 보실까요?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믿음으로 시작된 희망이 여기서 고비를 맞게 됩니다. 그러나 희망은 반드시 고난을 통하여 열매맺습니다. 요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실제 사랑하며 살았던 노부부의 가슴 절절한 이야기입니다. 한평생을 같이 살았던 부부의 사별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슬픔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부부를 위해서는 강을 건너지 말아야 하지만 희망을 위해서는 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 강이 고난의 강입니다.
왜 바울은 희망을 찾는 우리에게 고난을 이야기했을까? 환란과 고난이 없이도 희망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거기다 힘든 환란을 즐거워 하라고 까지 말할 필요가 있을까? 다시 3절 보시겠습니까?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즐거워 하는 데 “환란중에 즐거워 하라”고 말합니다. “환란중”이 무엇입니까? 환란이 한참 진행중인 때입니다. 태풍으로 말하면 태풍의 눈속에 있을 때입니다. 환란이 끝난 다음에 즐거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환란이 지나고 한 숨 돌릴 때는 누구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in the midst of the tribulation, 환란의 한 복판에서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그렇게 가르칠까? 실제 환난 자체는 어떠한 기쁨과 즐거움도 없습니다. 누구나 싫어하는 환난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병적 자기 학대일 뿐입니다. 옛날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자기 죄책감을 이겨내려고 채찍으로 자기를 내려치고 밧줄로 자기를 꽁꽁 묶고 아무 때나 금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에게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환란중에도 우리가 기뻐할 이유는 환란의 유익 때문입니다.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다시 3-4절입니다. 롬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란이 낳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환란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낳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연속적으로 이루어지고 반드시 일어나고 순서대로 일어납니다. 인내는 견디는 힘입니다. 연단은 견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풀무불에 쇠붙이를 넣으면 약한 부분은 물로 나가고 강한 부분만 남습니다. 찌꺼기는 사라지고 알맹이만 남습니다. 영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또 있습니다. “폭풍은 참나무가 더욱 깊이 뿌리를 박도록 한다.”
2010년 4월 초, 서울 서초동 가정법원청사 소년법정에서 있었던 어느 판결 이야기가 경인일보 칼럼에 실려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피고인은 서울 도심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난 혐의로 법정에 선 소녀입니다. 이 소녀는 1년전에도 14건의 절도, 폭행을 저질러 이미 한 차례 소년법정에 섰던 전력이 있었습니다. 법대로 한다면 “소년보호시설 감호위탁” 같은 무거운 보호 처분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장판사는 소녀에게 “불처분 결정”을 내렸습니다. 불처분 결정을 선고한 판사는 갑자기 소녀를 보더니 말했습니다. “피고는 일어나 봐”. 소녀가 쭈뼛쭈뼛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김판사가 말했습니다. “날 따라서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예상치 못한 재판장의 요구에 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면서 “나는 세상에서...”하고 따라 했습니다. “내 말을 크게 따라 해 봐.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에는 나 혼자가 아니다!” “이 세상에는 나 혼자가 아니다”. 재판장의 말을 따라 하던 소녀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김 판사는 울고 있는 소녀를 보며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가해자로 재판정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쉽사리 말하겠어요? 아이의 잘못이 있다면 자존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말을 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진 김 판사는 눈물범벅이 된 소녀를 앞으로 불러 세웠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할까? 그건 바로 너야. 그 사실만 잊지 않으면 돼. 그러면 지금처럼 힘든 일도 이겨 낼 수 있을 거야.” 그러고는 두 손을 쭉 뻗어 소녀의 손을 곽 잡았습니다. “마음 같아선 안아주고 싶은데 너와 나 사이에는 법대가 가로막혀 있어 이 정도밖에 할 수 없어 미안하구나.”. 결국 이 소녀는 이 일로 인해 변화되었습니다. 불우한 가정 때문에 잘못된 길로 나선 소녀였습니다. 그러나 판사의 용서로 그는 달라졌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환란당하고 고난당하고 실수하고 범죄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일으키신다”.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할까? 그건 바로 너야. 그 사실만 잊지 않으면 돼. 그러면 지금처럼 힘든 일도 이겨 낼 수 있을 거야.”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당할 때 이기게 하시고 끝까지 희망을 주십니다. 성경에서 고난당한 사람중에 망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사자굴에 떨어진 다니엘을 구원하시고,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건지셨습니다. 고래 배 속에 들어간 요나를 구출하셨고, 폭풍우에 허우적거리는 제자들을 건져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구하시고, 바울을 죽음의 사슬에서 건져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이기게 하시고 희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홍해를 건너 맨 땅을 걷게 하시고, 광야를 건너 가나안에 이르게 하십니다. 잠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려지느니라”. 시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아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세상에서 환란을 만나지만 우리는 인내와 연단을 통해 최종적으로 희망의 역에 도착합니다. 최후 승리는 환란이 아니라 우리자신입니다.
희망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집니다.
바울이 말한 희망의 마지막 단계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5절입니다. 롬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희망은 믿음에서 옵니다. 희망은 고난을 통해 더 강해집니다. 그렇게 해서 얻는 희망은 어떤 것입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여기에 “부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어느 여름날 하늘에서 소낙비가 쏟아지는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무더운 날 바케스에 물을 가득 채워 머리위에 붓는다는 뜻입니다. “붓다. 부었다”는 말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날 성령이 임할 때 쓰인 표현과 같습니다. 행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성령이 양동이의 물처럼 부어졌다고 말합니다. 요즘 루게릭 환자를 위해 전 세계적으로 아이스바켓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얼음물을 바게스에 가득 담아 머리위에 뒤집어 쓰는 것입니다. 한 여름에 얼음물을 뒤집어 쓰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33절에 또 나옵니다. 행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그렇게 가득 부으면 어떻게 됩니까? overflow, 차고 넘칩니다. 속에서 가득차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밖으로 흘러 넘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안에 충만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간신히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됨이니”. 하늘에서 소나기같은 은혜가 부어 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희망이 그렇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간신히 미래를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어쩔 수 없이 하루 하루 사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 졌습니다”. 그래서 overflow, 차고 넘칩니다. 그래서 5절,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했습니다. 우리의 희망이 어쩌다 온 것이거나 간신히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부끄럽지 않다”는 말을 어떤 성경은 “우리의 희망은 거리낌이 없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어떤 성경은 “우리는 희망 때문에 절대 실망하지 않습니다”라고 번역하고, 또 어떤 성경은 “우리는 희망 때문에 담대합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다 좋은 번역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희망 때문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실망하지 않습니다. 담대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롬8:26-39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먼저 바울은 우리가 당하는 현실의 고난을 열거합니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사망, 생명, 천사들, 권세자들, 현재 일, 장래 일, 높음, 깊음, 어떤 피조물들”, 이것들은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고난과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 모든 것을 열거한 후에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저는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제목은 “버티칼 리미트”입니다. 이 영화는 한 사업가가 가족들과 함께 파키스탄에 있는 K2 봉우리를 등반하는 영화입니다. 거대한 눈폭풍과 웅장한 자연앞에 인간의 도전은 약하기만 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아버지와 두 자녀들이 자일을 메고 산을 오릅니다. 그러다가 위험한 사고를 당합니다. 그 갑작스런 상황앞에서 아버지와 자녀들은 어떻게 합니까? 함께 보시겠습니다(영화).
어떻습니까? 아버지가 자녀들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보셨습니까? 자신의 생명을 주었습니다. 자기를 대신 죽여 자식들을 살렸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얻은 희망, 그냥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가로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희망의 시작입니다. 그 분이 목숨걸고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만일 이 영화 후편이 있다면 자녀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자신들을 위해 죽은 아버지를 위해 자식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고난이 올 때 더 이상 못살겠다고 인생을 포기했을까요? 조금만 어려워도 입버릇처럼 죽고 싶다고 했을까요? 자기들을 위해 아버지가 죽었잖아요? 그들의 남은 생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얻었잖아요? 롬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과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았고 그래서 우리가 희망이 왔습니다. 그 희망 때문에 여러분은 거리낌이 없습니다. 실망하지 않습니다. 담대합니다.
롬5:1-5 2015.1.18(일)
우리에게는 이런 희망이 있습니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믿음에서 희망이 나오고 희망은 믿음을 견고케 합니다.
희망이 자라기 위해서는 평화의 환경이 필요합니다.
벧전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희망은 믿음으로 시작됩니다.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롬3:24,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의 두 가지 변화
(1) 하나님의 화평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스메데스, “용서”
“하나님의 용서는 빚진 자를 용서하고 그 빚을 대신 갚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원수를 용서하고 그 원수와 함께 밥을 먹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죄수를 풀어 주고 그 죄수에게 자기가 가해자였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음
롬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엡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은혜아니면”(악보)
“은혜 아니면 나서지 못하네. 십자가의 그 사랑 능력아니면 나서지 못하네. 은혜아니면 나서지 못하네. 놀라운 사랑 그 은혜아니면 나서지 못하네”.
롬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앙드레 지드, <전원교항곡> (사진)
희망은 고난을 통해 강해집니다.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잠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려지느니라”.
시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아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희망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집니다.
롬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행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행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의 희망은 거리낌이 없습니다”
=“우리는 희망 때문에 절대 실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희망 때문에 담대합니다”.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버티칼 리미트”(영화).
롬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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