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4) 잠언4:1-10 2015.1.25(일)
자녀는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아름다고 생각합니까? 꽃입니까?(사진) 호수입니까?(사진) 어머니입니까?(사진)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중의 하나가 어린아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사진) 예쁘지 않습니까? (손자 사진). 마지막 아이가 제 손자입니다. 잘 생기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이 저를 닮았다고 “새끼 목사”라고 부릅니다. 가끔 교회안에서 손자를 둘 셋 보는 권사님들을 볼 때마다 “왜 저렇게 힘들게 살지? 애기는 누구에게 맡기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해보니까 권사님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힘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예쁜 것은 얼굴만이 아닙니다. 이 아이들이 커서 무엇이 될까 생각하면 더 신기하고 아름답습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김연아같은 훌륭한 피겨선수, 반기문 같은 유엔 총장, 빌 게이츠같은 세계적인 사업가, 손양원 같은 목회자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정석주란 시인이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썻습니다.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폭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시인은 대추 한 알을 보면서 그것이 우연히 생기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가을에 빨갛게 익은 대추 한 알 속에는 여름의 수많은 천둥, 벼락, 무서리 치는 밤, 땡볕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추 한 알이 그렇다면 사람 하나는 어떻습니까? 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역사가 흐르고 얼마나 사람들이 왔다 갔습니까? “사과나무 안에 있는 씨는 셀 수 있지만 씨속에 있는 사과나무는 셀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작고 어린 데 그 안에 가능성을 타고 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시지 않습니까? “천국은 어린아이 같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겉으로 볼 때는 너무 예쁘고 속으로 볼 때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 그들이 바로 어린아이들입니다. 문제는 이 어린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인가 입니다. 삼손이 잉태하자 그 아버지 마노아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삿13:12, “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우리 부모의 일구원심 소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녀를 잘 기르는 것입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어떻게 행하리이까”. 하나님의 최고 선물인 자녀들, 그들을 어떻게 키워서 하나님의 희망이 되게 할까? 오늘 저는 잠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자녀가 어떻게 하나님의 희망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여러분의 자녀, 손자, 후손이 하나님의 희망이 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자녀교육은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잠4:1,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성경은 부모가 자녀 교육의 책임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잠언에도 부모에게 자녀 교육을 부탁한 말씀이 많습니다. 잠1:8입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여기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교육의 기능을 각각 다르게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훈계”를 맡겼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무사르”입니다. 징계하는 것입니다. 훈계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아, 그렇게 하지 말라”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안 되면 매도 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교육입니다
어느 기관의 조사를 보았더니 아버지와 자녀에게 물었습니다. 먼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아버지들의 대답의 첫 번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다”. 18.9%로 1위였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은 어떻게 대답한지 아십니까?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37.2%, 1위였습니다. 이렇게 다릅니다. 아버지들이 먹고 사는 데 바쁠 때 자녀들은 아버지가 없는 빈 자리 때문에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어떤 초등학생이 교회 건물에 돌을 던지다 붙잡혔습니다. 경찰서에서 “네 아버지가 누구냐?” 했다니 교회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왜 그런 짓을 했느냐 했더니 “교회가 자꾸 아빠를 빼앗아 가는 바람에 화가 나서 돌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런 일어나겠습니까? 그 아이가 우리 아들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존 킹이란 사람이 쓴 <잘되는 자녀는 아버지가 다르다>에 보면 가정에서 아버지가 제 역할을 못할 때 생기는 비극이 통계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가 제 역할을 못하면 자녀가 자살할 확률이 그렇지 않은 가정보다 5배가 높답니다. 감옥갈 가능성이 9배 높습니다. 약물중독에 빠질 가능성이 10배 높습니다. 남자의 경우 강간을 저지를 가능성이 14배 높습니다. 행동장애를 일으킬 가능성이 20배 높습니다. 가출할 가능성이 32배 높습니다. 물론 미국의 통계입니다. 그러나 한국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이것이 안되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녀를 위해 할 일이 세 가지입니다. 중심잡아주기, 보호하기, 방향제시하기. 아버지의 말과 생각이 가정의 중심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보호합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보고 자신의 삶의 방향과 가치를 잡습니다.
어머니는 또 얼마나 중요합니까? 다시 잠1:8,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여기서 “법”은 “토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훈육을 통해서 자녀의 방향과 가치를 잡아 준다면 어머니는 생명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합니다. 전 세계 어디 에서나 유대인이 되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부모가 유대인이면 아이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설령 아버지가 유대인이 아니어도 엄마만 유대인이면 아이는 자동으로 유대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머니가 토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교회학교가 얼마나 침체했는지. 제가 어느 세미나에 참석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 전국적으로 교회학교가 없는 교회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90%가 미자립교회인 농어촌은 교회학교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옛날 우리가 자랄 때 흰 구름 뭉게 뭉게 부르며 발걸음도 가볍게 달려 갔던 여름 성경학교, 성탄절에 언 손을 불어가며 새벽송하고 연극하던 추억, 주일학교때 “아 재미있어라. 선생님의 동화” 하며 들었던 기억은 지금 자라는 아이들에게 없습니다. 농어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 친구 목사가 서울 강남에서 목회하는 데 대부분의 신자가 서울 외곽 아파트 촌으로 이사를 가서 어린이가 없답니다. 그래서 교회학교를 유치부부터 6학년까지 통폐합으로 모이는 데 그것도 10명 안팎입니다. 정말 교회학교가 위기입니다. 그러면 이런 위기가 왔는가? 전문가들은 몇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저출산고령화입니다. 우리 나라 인구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해가 내년입니다. 내년 2016년이 되면 0-14세의 어린이 인구보다 65세 노인 인구가 많아집니다. 내년에 우리 나라 14살까지가 654망, 내년도 65세 이상이 659만, 소위 “인구역전현상”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도무지 자녀를 낳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혼도 늦게 하고 경제적으로도 힘도 들고 여성의 사회참여가 많아졌지만 가장 큰 문제는 개인주의입니다. “자식 낳아서 키워봐아 힘만 들고 차라리 우리끼리 오붓하게 살자”. 이런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초등학생 수가 30% 줄었습니다. 그만큼 교회학교도 줄어 한국교회 전체로 보면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는 대략 20-25% 줄고, 중고등부는 2009년부터 13% 정도가 줄었습니다.
교회학교 침체의 또 하나 원인은 주5일제와 지나친 사교육입니다. 토요일, 주일날을대부분 밖으로 나가 취미와 여가로 보냅니다. 사교육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2010년 한국교육개발원이 낸 자료를 보면 만 3세부터 취학 전 자녀 2527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했는 데 무려 99.8%의 미취학 자녀들이 사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간 자녀를 지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직 학교도 다니지 않은 자녀를 그렇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잘나가는 병원이 소아 정신과입니다. 보통 가정에서 3-4개 과외시키지 않은 가정이 거의 없습니다. 가정에 심방을 가도 아이들을 만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선생님이 교회에서 전화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우리 애 학원 갔어요”.
그런데 이러한 원인 말고 우리가 가진 본질적인 원인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을 신앙으로 교육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녀교육은 대부분은 학교나 학원에 맡기고 교회 다니는 부모는 주일날만 교회 보냅니다. 50:3000법칙을 아십니까? 교회를 일주일에 한 번 보내면 교회에 머무는 시간이 일년에 50시간입니다. 두 시간씩 있었다 해도 100시간입니다. 거기 비하여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은 3000시간입니다. 어디서 교육해야 효과적이겠습니까? 3절 보시겠습니까? 잠4:3,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 누가 이렇게 말한 것입니까?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왕중의 왕이요 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왕도 어릴 때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유악한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터 솔로몬왕은 없었던 것입니다. 전북 임실에 가면 박사마을이 있습니다. 임실군 삼계면 한 면에서만 박사가 157명 나왔습니다. 그중 한 명이 건대 유태영 박사입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가서 물어 보십시오. “이 마을에서 본래 박사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고개를 살래 살래 저을 것입니다. “본래는 어린아이였지요”. 누가 태어날 때부터 박사며 누가 태어날 때부터 솔로몬입니까? 다 어머니, 아버지에게는 유약한 어린아이였습니다. 다 키웠으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잘 가르쳤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혹시 자녀를 교회에 맡기고 교회만 다니면 저절로 자라겠지 하는 분들 있습니까? 소련의 스탈린은 교회에서 안 자랐습니까? 신학교까지 갔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이는 교회에서 안 자랐습니까? 그 어머니 강반석 집사가 다녔던 교회가 칠골교회입니다. 교회에 자녀를 맡기기만 한다고 부모의 교육의 책임을 다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자녀교육은 곧 부모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자녀를 가르칠 것이 아니라 부모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부모교실”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본 부러운 광경중 하나는 이스라엘은 학부모가 학교교육이나 회당교육에 적극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매달 학부모회의는 1회 이상 반별로 모이는데 특별한 일이 없으면 95% 이상의 출석률을 보입니다. 보통은 저녁 7시쯤 열리는 데 이스라엘도 우리처럼 부부가 거의 일합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들뿐 아니라 아버지들도 25%나 참석한다. 학부모회의는 교사가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가정에서의 협조사항을 전달합니다. 자녀에 발달 사항을 그때 그때 이야기해 줍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곧 부모교실을 시작하겠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잘 배우셔야 합니다. 최소한 내 자녀가 어느 교실에서 누구에게 배우는지는 알아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드리는 예배가 있습니다. 부모와 함께 하는 문화, 여행, 공연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보낼 신문, 자녀가 배운 학습자료, 가정예배 자료등을 참고해서 가정에서 자녀와 신앙적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잘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잘 때 부모님이 읽어준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안 읽습니까? 성경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 토론 주제가 많습니까? 교회가 가정처럼 되듯, 가정은 교회처럼 되어야 합니다. 잠4:1,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자녀교육은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교회는 자녀에게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어머니, 아버지는 육신의 부모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부모만 부모가 아닙니다. 영적인 부모도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육신의 부모에서 시작해서 영적인 부모로 나갑니다. 4절입니다. 잠4:4, “아버지가 네게 가르쳐 이르기를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아버지가 단순한 훈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그는 영적인 부모가 됩니다.
부모의 자녀교육을 영적으로 돕는 기관이 교회입니다. 성경적 교회는 영적 부모의 교육입니다. 살전2:11을 볼까요?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여기서 사도 바울은 교회의 기능을 아버지의 기능으로 설명합니다. “권면하고, 위로라고 경계하노니“. 영어 성경으로 보면 조금 더 분명합니다. ”encouraging, comforting and correcting“. ”encouraging, 격려하고, comforting, 위로하고, correcting, 고쳐주고“. 이것이 아버지의 기능이듯이 교회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기능도 있습니다. 사66:11절입니다.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어머니의 기능은 자녀가 배고플 때 젖을 먹이고, 울 때 안아서 위로해주고, 외로울 때 그 품에서 행복하고 만족해 하는 기능. 이것이 어머니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이 기능이 사라지고 학교 기능만 남았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본래 주일학교가 학교적 기능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주일학교가 처음 생긴 것은 1780년 산업혁명이 일어난 영국이었습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너도 나도 공장으로 나가고 주일날 집에 있는 아이들을 가르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로버트 레익크스라는 평신도가 글로체스터에서 처음으로 주일학교를 시작했는 데 그 이름이 sunday school이었습니다. 평일날은 학교에 가는 데 주일날은 배울 데가 없으니 일반교육과 함께 교회에서 신앙교육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것이 미국으로 가면서 교회학교, Church School이라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평일날교회에서 가르치니까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이 1890년 말입니다. 그때 우리 나라 상황에서는 학교가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새문안교회에서 주일학교가 생기고 1907년에 이미 한국의 주일학교수가 전국에 613개, 학생은 45,918명이었습니다. 가난과 무지속에 살던 민족에게 요원의 불길처럼 주일학교가 퍼져 갔습니다. 문제는 학교가 필요하던 시대에는 교회도 가르치는 기능이 강조될 수 밖에 없었지만 학교가 많아지고 지적 교육이 풍성해진 이 때에 이 학교 시스템은 성경적인 교육의 본질을 오히려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학교 시스템의 기본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종류의 사람이 교실에 있습니다. 교사와 학생입니다. 교사는 잘 가르치기 위해 있고 학생은 잘 배우기 위해 있습니다. 잘 가르치려니까 교사들이 늘 부담스러워 합니다. 연말에 “교사 하세요” 하면 ”나는 아는 것이 없거든요. 아이구, 그 공과 언제 배워서 가르치죠? 나는 성경 실력이 없어요“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에서 좋은 학생은 공과 공부할 때 안 떠드는 학생, 성경 많이 알고 성경암송 많이 하는 학생입니다. 둘 사이에는 오직 성경 지식뿐이고 믿음의 삶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교육의 본질은 교사가 부모가 되고 학생은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4절로 돌아갑시다. 잠4:4, “아버지가 네게 가르쳐 이르기를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아버지입니다. 교사가 아닙니다. 교수가 아닙니다.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부모가 많이 배워야 부모입니까? 부모의 최고 기능이 많이 아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학교 교사, 대학 교수들이 가장 좋은 부모입니까? 공부만 잘하면 좋은 아이입니까? 컬럼비아 공대 조승희가 공부를 못해서 총기를 난사했습니까? 칼 마르크스가 공부를 못해서 공산주의를 만들었습니까? 교회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공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사는 부모로서 그들을 하나님 말씀을 말과 삶으로 보여주고 학생은 교사를 부모처럼 보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할이 바뀌어야 합니다. 교사도 기본적으로 영적 부모로서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교사가 되지 말고 코치가 되어야 합니다”. 교사의 기본적인 역할은 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신앙의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른이 되면 저렇게 살아야 하겠구나”. 말로 가르치지 말고 삶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교사의 가장 큰 기능은 교육입니다. 코치의 가장 큰 기능은 삶입니다. 교사는 단상에서 가르칩니다. 코치는 같이 뛰면서 가르칩니다. 교사는 성경박사입니다. 그러나 코치는 성경대로 삽니다. 우리가 옛날 선생님들 생각할 때 기억나는 것은 그들의 유창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준 어머니같고 아버지같은 선생님들이기 때문에 기억이 납니다. 교사뿐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교회 자녀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18세에서 30세에 이르는 젊은이 천 명을 대상으로 어떤 기관에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이런 결론이 나왔습니다. “십대 청소년들 가운데 교회 안에서 적어도 한 사람의 성인-그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투자한 성인-과 관계를 맺은 청소년들은 계속 교회에 다닐 확률이 그렇지 않은 학생보가 훨씬 높다. 교회에 남은 대부분의 청소년은 다섯 명 이상의 성인과 개인적인 멘토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제가 어떤 교회 설교하러 갔는 데 그 교회는 장년은 1000명인데 교회학교 학생은 1500명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에서 어린이, 중고등부 아이들을 만나면 반드시 멈춰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수를 하든지 이름을 묻든지 내가 누구라고 소개하고 예쁘다고 쓰다듬어 준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전 교인이 학생들을 자식처럼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른들을 만나면 인사해야 한다고 배웁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어린이를 만나면 인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른은 다 살았지만 이 아이가 어떻게 될 줄을 누가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개발한 인사가 있습니다. 교회안에서 반드시 어린이, 중고등부 학생을 만나면 자동차 멈추듯이 일단 멈춥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름이 뭐니? 몇 학년이야? 너 잘 생겼구나. 나는 이명호 집사인데, 앞으로 나하고 친하게 지나자. 응. 다음에 또 만나”. 그리고 악수하고 헤어집니다. 다음에 만날 때 그 학생이 어ᄄᅠᇂ게 나올까요? 반드시 인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친해져서 카카오톡을 합니다. 가끔 선물도 사 줍니다. 그러면 그가 어려울 때 상담하러 오지 않겠어요? 그래서 교회안에서 부모와 자녀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앞에 나온 설문조사처럼 그는 평생 교회를 떠나지 않게 됩니다. 교회가면 자기를 알아주는 또 한 분의 부모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나이 먹은 교사가 많아요. <탈무드>에서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젊은 교사에게 배우는 것은 설익은 포도를 먹고 방금 저장한 포도주를 마시는 것과 같다. 나이 든 교사에게 교육받는 것은 익은 포도를 따 먹으며 숙성한 포도주를 마시는 것과 같다.” 유치원을 가봐도 우리처럼 미혼인 교사들이 거의 없습니다. 어머니 교사, 할머니 교사가 많아요. 그래서 우리처럼 문제가 없어요. 때릴 힘도 없잖아요. 손자사랑하듯 사랑해줘요. 제가 우리 교회 교사들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연령 미혼교사 30-50대초 교사 50대중-70대 85명
총 계 | 34 | 37 | 14 | 85명 |
통 계 | 40% | 44% | 16% | 100% 중 |
총 85명을 상대로 조사했는 데 50대 이상, 60대, 70대 교사가 16%였습니다. 젊어야 교사합니까? 아닙니다. 어머니요 아버지가 교사입니다. 나이 들수록 애들도 좋아하고 가르칠 것도 많아요. 우리 교회 권사님, 장로님, 교사를 자원하세요. 부모로서 자녀들을 가르칠 때 여러분같이 좋은 선생님이 어디 있습니까? 교회는 실력있는 교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밚은 어머니, 아버지가 필요한 곳입니다.
성경적 가치를 관계와 경험을 통해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어머니, 아버지로서 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크게 두 가지를 가르칩니다. 5절입니다. 잠4:5,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먼저 지혜를 가르쳐야 합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8절입니다. “그를 높이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지혜를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경외를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의 주제를 크게 둘로 말하면 경외와 지혜입니다. 경외는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하는 것이고 지혜는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의 핵심은 예배와 지혜입니다. 구약의 오경은 예배를 가르칩니다. 지혜서는 지혜를 가르칩니다. 신약의 핵심도 예배와 지혜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땅에 잘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르치는 방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설교나 강의를 통해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달라져야 합니다. 관계와 경험을 통해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됩니다.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잘 가르치는 것보다는 잘 지내는 것입니다.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과 물질입니다. 오래 같이 있을수록 아이들은 교사를 신뢰합니다. 교사가 학생과 잘 지내기 위해 돈도 써야 합니다. 교사는 시간강사가 아닙니다. 공과공부가 주 업무가 아니라 친구가 되는 것이 주업무입니다. 교회도 재정지원이 주업무가 아닙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주업무입니다. 이번주 중고등부 아이들이 수양회를 따났습니다. 광고가 약해서 그런데 아무도 안 나왔습니다. 장로님들이 나와야 합니다. 권사님들은 먹을 것 싸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방안에 앉아 있는 목회자들을 제가 나무랐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관계입니다. 관계가 될 때 아이들이 감동하고 아이들이 감동하면 교육은 끝납니다.
경험이 필요합니다. 요즘시대를 어떤 사람이 EPIC시대라고 불렀습니다. E, experince, 경험의 시대, P. participation, 참여의 시대, I, image 시대, 그리고 C, communication, 관계의 시대. 예배도 경험이고 학습도 경험적이어 합니다. 제 딸이 이스라엘 유치원에 다녔습니다. 한번은 갔더니 칠판에 이렇게 썻습니다.
5+5=( ).10=( )+( ). 5+5는 10입니다. 이것은 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10=( )+( )는 조금 생각해야 합니다. 둘을 보태서 10이 되러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어린이가 참여하고 창조적으로 사고할수록 하는 쉬운 방법입니다. 예배도 경험입니다.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새벽기도 오는 분이 있습니다. 아예 자녀 6을 매주 금요심야기도에 참석시키는 부모도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입니다. 아이들을 여름해외선교에 보내는 부모가 있습니다. 짧은 기간동안 엄청나게 배웁니다.
교회학교가 3월부터 토요학교를 엽니다. 토요학교는 주일날 못하는 신앙교육을 경험과 참여를 통해서 배우게 할 것입니다. 토요학교는 창의학교, 뮤지컬 학교, 체험학교, 영어학교등이 있습니다. 저는 토요학교가 주일예배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모이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7월에는 충남 서천에 전교인 봉사가 있습니다. 거기도 자녀를 보내세요. 남을 위해 땀흘려 일하는 경험은 학원 10개 가는 것보다 낫습니다. 8월에는 제가 이스라엘 체험학습을 가볼까 생각중입니다. 비싼 여행이 아니라 발로 걷는 체험 여행입니다. 아직 확정하지 않았지만 만일 한다면 부모와 자녀가 함께 참여하세요. 성경을 100번 읽는 것보다 낫습니다.
4:6절을 보세요. 잠4:6,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성경은 지혜를 경험적으로 묘사합니다. 잠24:13,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꿀송이처럼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은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 잠24:14,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이런 자녀를 키우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 자녀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고 지혜를 가르쳐 장래의 희망으로 키우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잘 자라 민족의 꿈이 되고 하나님의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희망(4) 잠언4:1-10 2015.1.25(일)
자녀는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꽃(사진) 호수(사진) 어머니(사진) 아이들(사진) 손자(사진)
정석주,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폭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삿13:12, “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먼저 자녀교육은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잠4:1,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잠1: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존 킹, <잘되는 자녀는 아버지가 다르다> (사진)
아버지의 세 가지 기능: 중심잡아주기, 보호하기, 방향제시하기.
교회학교 위기의 원인
(1) 저출산고령화
(2) 주5일제와 지나친 사교육
(3) 가정에서 신앙교육 시키지 않음
잠4:3,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
잠4:1,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교회는 자녀에게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잠4:4, “아버지가 네게 가르쳐 이르기를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살전2: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권면하고, 위로라고 경계하노니“ = ”encouraging, comforting and correcting“.
사66:11,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영국 미국 한국
주일학교 교회학교 주일학교, 교회학교
1780 1940 1890
교회교육의 본질은 교사가 부모가 되고 학생은 자녀가 되는 것이다.
잠4:4, “아버지가 네게 가르쳐 이르기를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교사의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 “교사가 되지 말고 코치가 되라”.
교회안에서 어린이, 청소년을 만날 때
“이름이 뭐니? 몇 학년이야? 너 잘 생겼구나. 나는 이명호 집사인데, 앞으로 나하고 친하게 지나자. 응. 다음에 또 만나”.
우리 교회 교사 연령분포
연령 미혼교사 30-50대초 교사 50대중-70대 85명
총 계 | 34 | 37 | 14 | 85명 |
통 계 | 40% | 44% | 16% | 100% 중 |
성경적 가치를 관계와 경험을 통해 가르쳐야 합니다.
잠4:5,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잠4:8, “그를 높이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설교나 강의를 통해서 보다 관계와 경험을 통해 가르쳐야 한다.
EPIC시대=E, experince, 경험의 시대, P. participation, 참여의 시대, I, image 시대, 그리고 C, communication, 관계의 시대.
5+5=( ). 10=( )+( ).
잠4:6,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잠24:13,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잠24:14,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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