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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1:1-11 우리 평생의 희망, 예수님 닮기 2015.2.1(일)

벧후1:1-11 2015.2.1()

우리 평생의 희망, 예수님 닮기

희망으로 출발한 2월 첫 주일입니다. 사람을 붙잡고 있는 가장 큰 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희망입니다. 제가 가정을 심방하면서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희망 때문에 산다는 것입니다. 가정방문때마다 제가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 가정의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그때 거의 단골로 나오는 대답이 있습니다. ”, 아들이 이번 주에 대학입시 발표가 있거든요. 아들이 대학에 최종 합격했으면 좋겠어요“. ”딸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대요. 올 가을에는 결혼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가 수술받았거든요. 빨리 회복했으면 좋겠어요“. ”요즘 사업이 너무 어려워요. 제발 경제가 회복되었으면 좋겠어요“. 내용은 다르지만 한 가지는 같습니다. ”희망입니다. 내일의 희망, ”오늘은 어렵지만 내일은 잘 되었으면 좋겠다”. 희망입니다. 희망이 우리를 미래로 인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희망을 빼면 남는 것이 있을까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한번은 베드로가 지옥을 견학갔답니다. 천사가 안내하는 데 한참 가다보니까 무기 창고가 있습니다. 거기에 많은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어서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이것들은 무슨 무기입니까?” 그랬더니 천사가 말합니다. “이 무기들은 마귀가 사람들을 유혹하는 무기들입니다”. 그리고 보니까 여자, , , 노름, 중독, 질병의 무기들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 한 곳에 갔더니 문이 꽉 닫혀 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여기는 어떤 무기가 있습니까?” 천사가 말했습니다. “제일 무서운 무기가 있습니다. 마귀가 보통 때는 안 쓰다가 결정적인 때 쓰는 데 한번 쓰면 끝납니다그래서 물었습니다. “그 무기는 무엇입니까?” 했더니 답변이 이렇습니다. “절망이라는 무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치명적인 무기가 절망이라는 무기입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무기입니다.

 

우리가 희망으로 나아갈 때 반드시 바라 봐야 할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입니다. 희망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단순히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희망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신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희망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희망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거룩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볼까요?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벧전1: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신약과 구약이 공통적으로 관심한 것이 있습니다. 거룩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전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저는 오랫동안 어떻게 하면 우리가 거룩해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 닮는 사람이 될까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베드로후서를 읽다가 베드로가 제가 찾는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서는 주후 60년경, 베드로가 핍박때문에 흩어진 받는 성도들에게 쓴 위로의 편지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희망을 주제로 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하는 희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난을 이겨내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하나는 일시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영구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후서 1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닮는 세 가지 과정을 말합니다. 그것이 첫째 피하라. 둘째 참예하라. 셋째 더하라 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가 가진 가장 큰 희망, 거룩하게 되는 법, 예수님 닮는 법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 닮아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피하라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예수님 닮는 첫 번째 과정은 피하는 것입니다. 4절 볼까요?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여기 앞 부분에 정욕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거룩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신의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거룩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라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피하는 것입니다. 여기 중요한 단어가 정욕이라는 단어와 썩어진다는 단어입니다. “정욕은 인간이 가진 모든 죄악성을 나타낸 말입니다. 7장의 표현대로 인간의 육신입니다. 지체입니다. 죄의 본성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닮기 위해 세상을 멀리 하나요? 거룩의 첫 번째 과제는 구별입니다. 역사적으로 구별에 두 가지 모델이 있습니다. 하나는 격리입니다. 격리는 공간적으로 자신을 성별하는 것입니다. 교회사에 보면 거룩을 위해 자신을 격리했던 운동이 수도원 운동입니다. 제가 쓴 박사논문이 유대광야의 수도원 운동입니다. 주후 4세기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하자 교회가 세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뜻있는 소아시아,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떠나 산으로 광야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유다광야는 예루살렘, 베들레헴에 가까워 성지순례온 사람들이 거룩한 땅에 남아 기도하다가 자연스럽게 수도원이 생겨난 지역입니다. 이들의 삶은 한마디로 세상과 격리된 삶이었습니다. 모든 욕심을 끊고 가난하게 살면서 썩어질 세상과 자신을 구별했습니다. 광야의 수도자들은 하루에 2식만 했습니다. 육식은 오로지 병자에게만 허용되었고 그들이 먹은 것은 광야에 난 야생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잤던 곳은 침대나 이불이 없는 맨 바닥이었고 가진 것도 옷 한 벌에 지팡이 하나, 성경 한 권, 그리고 책상, 램프가 전부였습니다. 심한 사람은 동굴에 들어가 일생 안 나오거나 살거나 심지어 기둥위에서 평생 산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이 늘 품었던 생각은 가난하신 예수님, 자기를 부정하신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원장을 아바라고 부르는 데 파스토르라는 아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도자가 미워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편안한 생활과 허영이다.” 암모나스라는 사람은 자신에게 분노심이 많은 것을 알고 그 분노심에서 해방되도록 14년이나 밤낮으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범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끼가 있는 여자가 수도자를 꼬이려고 길을 잃어버린 척하고 수도자의 방을 노크했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소?”하고 물었더니 길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집으로 들어오게 해서 안방에 들어가게 하고 자기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궜습니다. 그랬더니 이 여자가 짐승 때문에 무섭다면서 문을 열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안 열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춥다고 하면서 문을 열어 달랍니다. 그러면서 밤새 유혹합니다. 그러자 수도자의 정신이 사나워졌습니다. 그도 역시 사람인지라 마음에 유혹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마음이 죄로 불타자 수도자는 등불을 켜고 자기 손가락을 그 위에 올렸습니다. 손가락을 뜨거운 불에 올리자 손가락이 타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여자가 길을 떠나는 데 수도자가 잠시 기다라고 하더니 자기 손가락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보았더니 손가락 10개가 다 타고 남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때 여자가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서 기절했습니다. 수도자가 다가와서 기도하자 여자가 살아났습니다. 여자는 수도자의 거룩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했습니다. 자기가 거룩한 분을 몰라보고 유혹한 것을 용서빌었습니다.그 뒤 여자도 평생 수도하면서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이것이 수도원의 거룩입니다.

 

수도원은 공간적 격리와 금욕을 통해 거룩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나요? 만일 그렇게 하려면 가정과 직장을 그만두고 다 산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나오는 또 하나는 모델이 정신적 격리입니다. 이것은 몸은 떠나지 많으면서 신앙적으로만 자신을 격리하는 것입니다. 11:24-25 보면 모세가 그렇게 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 24, “거절하고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받기 전에 한 것은 자신을 세상의 낙과 구별시킨 것입니다. 무엇을 거절했습니까? 24절입니다.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애굽의 공주의 아들을 거절했습니다. 당시 애굽은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습니다. 아마도 지금의 미국, 중국, 러시아를 합쳐놓은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 나라의 왕자였습니다. 그가 왕자 자리에 있기만 하면 모든 부와 명예,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왜 거절했겠습니까? 애굽의 왕자로 있으면 세상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술과 향락에 젖어 살아야 합니다. 권력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합니다. 때로는 무죄한 자를 죽여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거절합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어떤 세상적인 삶을 거절합니까? 25절에 죄악의 낙이란 말이 나옵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거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기 위하여 술과 포도주를 거절했습니다. 느헤미아는 무너진 조국을 생각하면서 왕의 음식을 거절했습니다. 요셉은 순결하게 살기 위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울을 죽이는 감정의 충동을 거절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호의호식을 거절했습니다. 정욕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피할 것이 있어야 거룩해집니다. 특히 자기에게 약한 것을 피해야 합니다. 이성에 약합니까? 삼손처럼 불레셋 여자에게 가지 마십시오. 욕심이 많습니까? 먹음직한 선악과 옆에 가지 마십시오. 분노심이 많습니까? 사울처럼 창을 옆에 두지 마십시오. 돈에 약합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돈을 오래 가지고 있지 마십시오. 피하십시오. 이것이 거룩으로 가는 첫 번째 길입니다.

 

참여하라

두 번째가 있습니다. 세상의 죄를 피하라고 가르친 베드로는 이제 조금 본질적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다시 4절입니다. 벧후1:4, “이로써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에 신의 성품이란 말이 나옵니다. “신의 성품이란 곧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참여한다라는 표현입니다. 참여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 말을 어떤 주석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여기 넓고 큰 저수지가 있다. 농부가 어떻게 논에 물을 대나 궁리하다가 저수지에 파이프를 댓다. 물은 파이프를 통해 논으로 흘러갔다”. 농부는 저수지의 물을 받기 위해 파이프를 댓습니다.

 

저수지는 농부가 만들지 않았습니다. 저수지는 농부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농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저수지를 만들거나 바꾸는 것이 아니라 파이프 하나 대고 물을 받는 것입니다. 저수지는 생명의 수원지입니다. 저수지는 넓고 큽니다. 하나님의 생명도 크고 넓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생명의 저수지에 파이프 하나 대고 그 물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뿐이지 그 생명을 만들거나 없애지 못합니다. 저수지는 우리에게 주어졌고 우리는 은혜로 거기에 접촉할 뿐입니다. 저수지가 생명이라면 파이프는 경건입니다. 생명은 하나님 자신의 능력이고 경건은 그것을 우리에게로 잇는 믿음의 통로입니다. 4세기 성자 아타나시우스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처럼 되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괜히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처럼 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오신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그분처럼 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오신 것이 구원이라면 우리가 그 분처럼 되는 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구원받으면 성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려 오신 것처럼 우리도 성화되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구원은 성화의 시작이고 성화의 구원의 열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3절입니다. 벧후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다같이 주셨으니”. 하나님은 두 가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 생명은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입니다. 경건은 그것을 얻기 위한 영적 갈망입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를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미국에 줄리 디 로시란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가 어느날 차를 탔는 데 운전수가 음주 운전하는 바람에 사고를 내서 45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그가 죽자 그의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여러 사람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35명의 사람에게 나눠 주었는 데 각막, 시력, , 피부등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미국 풋볼리그 쿼터백의 전설 카슨 파머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2006년 무릎 부상으로 선수 생활이 끝날 뻔 했지만, 의사들이 그에게 죽은 줄리의 힘줄로 수술해주는 바람에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그가 타임지에 나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타인의 몸의 일부가 내안에 살아 있다는 것이. 죽은 사람의 몸이 내 안에 있어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한 일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읽을 때 문득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예수님의 생명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죽은 사람의 몸이 사람을 살린 것처럼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 내가 살아 있다는 것도 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성경은 말합니다.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11절입니다.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왜 우리는 우리를 산 자로 자신을 여겨야 합니까? 우리는 본래 죄와 허물로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죽은 줄리 로시의 생명이 35명에게 나눠져 그 생명을 받은 사람이 살아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기 때문에 우리도 살아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참예한다고 말합니다. “생명의 근원에 파이프를 댔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었으나 내 안에 들어온 예수님 생명 때문에 내가 살았다“. 이것이 참여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표현합니다. 연합의 신비를 아십니까? 시골에서 자라면서 고염나무를 보셨습니까? 고염나무를 감나무와 접붙이면 나무는 고염나무로 그대로 있는 데 열매는 감이 열립니다. 고염나무에 감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연합입니다.

 

17세기 프랑스에 유명한 영성가가 있습니다. 여성으로 이름이 잔느 귀용입니다. 이 분이 우리가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는 연합의 교리를 여러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먼저 강과 바다의 비유입니다(사진). 강이 흐르면 바다로 갑니다. 가령 한강, 금강, 영산강은 서해로 흘러 갑니다. 한강에서 흘러온 물, 금강에서 흘러온 물, 영산강에서 흘러온 물이 각각 다르지만 일단 바다로 들어가면 어느 강에서 흘러온 물이냐 묻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는 한강, 여기까지는 금강, 여기까지는 영산강 물이 없습니다. 모두가 서해바다입니다. 본래 개체는 있었지만 합치고 나니 다 사라지고 서해바다하나만 남았습니다. 이것이 연합입니다. 폭포의 비유가 있습니다. 작년 8월에 제가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습니다(사진).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폭포에서 떨어진 물은 결국 강을 거쳐 바다로 갑니다. 그때 바다가 너는 폭포에서 떨어진 물, 너는 강에서 나온 물, 나는 본래 바닷물, 이렇게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일단 바다로 왔으면 모두가 바닷물입니다. “연합된 것입니다.

 

빵의 비유가 있습니다(사진). 하나의 빵은 많은 밀로 이루어집니다. 밀이 수확되어 탈곡되고 부숴져 곱게 빻아집니다. 그것들을 모아 반죽을 하고 구어 빵이 됩니다. 그때 거기 모인 빵이 너는 김제에서 온 밀이고 너는 강원도에서 온 밀이다따지지 않습니다. 본래 다른 밀들이 모여 연합함으로 하나의 빵이 되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개체가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빵만 있습니다. 이것이 연합입니다. 여러분이 그 유명한 갈2:20을 아십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본래 내가 있었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자 나는 한강처럼, 금강처럼 사라지고 서해바다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자 0형을 가진 키 170센티의 이윤재는 사라지고 예수님의 사람 이윤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연합입니다. 이것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거룩은 달라진 나의 행실이 아니라 달라진 나의 존재입니다. 내 행실이 달라져서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 내가 거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3,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미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까? 그 분과 우리가 연합됨으로 이제 나에게는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믿습니까? 이것이 거룩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더하라

예수님을 닮는 거룩의 세 번째 원리가 있습니다. 5-7절입니다. 벧후1:5-7, “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여기서 중요한 말은 더하라입니다. “더한다는 이 말은 에피코레게사테인 데 이 말은 보탠다. 보충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있습니다. 죽을 우리속에 생명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예수님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 우리안에 예수님 들어오셨으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한 가지 할 일이 더 있습니다. 우리안에 예수님 들어오셨지만 우리안에는 아직도 남은 죄가 있습니다. 본성적인 죄는 용서받았지만 실재적인 죄가 남아 있습니다. 이 죄는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혜로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우리의 노력입니다. 그것이 더하는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더하는 것이지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없던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아니라 다 되었는 데 우리가 몇 가지 보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꼭 기억할 말이 있습니다. 미국의 영성가 달라스 윌러드의 말입니다. “은혜의 반대는 노력이 아니라 공로다. 노력은 또 하나의 은혜다”. 하나님이 다 하셨다고 우리가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반대는 공로지 노력이 아닙니다. 노력은 또 하나의 은혜입니다. 은혜 많이 받았으면 노력 또한 많이 해야 합니다. 그것이 더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성경은 그것을 더욱 힘쓰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룩하기 위해, 예수님 닮기 위해 더욱 힘쓸 일이 무엇입니까? 다시 5-7절입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모두 8가지입니다. 순서를 보면 믿음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마칩니다. 8가지중 하나도 빠져서는 안됩니다. 균형과 조화가 생명입니다.

 

거룩은 믿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믿음이 흔들리면 다 흔들립니다. 우리는 완고한 사람이 되지 말고 견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는 완고했고 모세는 견고했습니다. 자기를 의지하면 완고하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견고하게 됩니다. 샤를르 드 푸코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서면 완고하게 되고 하나님앞에 겸손히 서 면 견고하게 된다”. 고전15:58절입니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믿음으로 시작된 거룩의 삶은 으로 나아갑니다. 덕은 선한 행실입니다. 2천년 교회사에 흘렀던 세 가지 영적 주제가 있습니다. 올바른 기도-옳바른 믿음- 올바른 실천입니다. . 사람이 교회에서 수도원에서 기도합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더 좋은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옳바른 믿음은 올바른 기도에서 옵니다. 올바른 기도는 올바른 삶을 낳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이것이 덕입니다.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세상적 학문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곧 하나님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알수록 생명은 풍성해 집니다. 하나님에 대해(about)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of)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많이 알수록 더 거룩해집니다. 다음은 절제를 더해야 합니다. 절제는 헬라어로 엔크라테이아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안에를 뜻하는 전치사 을 뜻하는 크라토스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래서 절제는 직역하면 안에 있는 힘입니다. 보통은 힘이 밖에 있습니다. 속에 있는 것으로 밖으로 나오는 것, 그것을 우리는 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강한 힘은 안에 있습니다. 안에 두고 안쓰는 힘이 강한 힘입니다. 내가 가진 힘보다 성령의 힘이 강하면 그 힘이 내 힘을 누릅니다. 내 힘은 언제나 성령의 힘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힘이 항상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절제입니다.

 

다음에 인내를 더해야 합니다. 인내는 헬라어로 휘포모네라고 합니다. “휘포아래입니다. “모네머무르다. 서다라는 뜻입니다. 안내는 결국 아래에 서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래에 서 있으면 참게 됩니다. 성경에 그늘이 많이 나온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늘은 나무밑에 있습니다. 인내도 하나님아래 있는 것입니다.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아래 사는 자는 복이 있나니”. 고난은 우리를 전능자의 그늘밑에 서게 합니다. 하나님아래 있으면 승리합니다.

 

다음은 경건을 더해야 합니다. 요즘 말로 영적 훈련입니다. 성경에서 연습”, 혹은 훈련으로 번역된 말입니다. 이 말을 굼나제라고 합니다. 이 말에서 짐나지움”, 체육관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형제우애는 함께 사는 사람들과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완성입니다. 거룩의 완성이 사랑이요 예수님 닮는 최고의 상태가 사랑입니다. 8가지를 계속 반복해서 실천하는 것, 그것이 거룩으로 가는 우리의 노력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제가 말한 것을 알기 쉽게 도표로 그려 볼까요?

하나님(예수님)

 

세상()와 구별 영성 도덕성

피하라 참여하라 더하라

 

가장 위에 나오는 하나님(예수님)이 우리 거룩의 원천입니다. 영성은 내가 하나님과 관계하는 모든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 묵상과 감사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되려면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물론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고 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동화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한편으로 세상과 구별되고 한편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자동적으로 우리 삶에 열매가 맺힙니다. 그것이 도덕성입니다. 영성이 뿌리라면 도덕성은 열매입니다. 이것을 베드로의 말로 하면 먼저 세상의 죄를 피해야 합니다. 다음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깊히 참여해야 합니다. 날마다 믿음에서 사랑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삶의 실천을 더하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먄 우리가 거룩에 이르고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닮기 원합니까? 하나님께 더 가까이 거룩해 지기 원합니까? 우리의 평생 최고의 희망은 예수님 닮는 것입니다.

벧후1:1-11 2015.2.1()

우리 평생의 희망, 예수님 닮기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벧전1: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살전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피하라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거룩의 두 가지 모델

(1) 격리(공간적 분리)

 

(2) 구별(정신적 분리)

 

11:24-25,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참여하라

벧후1:4, “이로써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아타나시우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처럼 되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이 구원이라면 우리가 그 분처럼 되는 것을 성화라고 한다.

 

벧후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비유(잔느 귀용)

(1) 강과 바다(사진)

 

(2) 폭포와 바다(나이아가라)

 

(3) 밀과 빵(사진)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행실이 달라져서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 내가 거룩하게 된다.

 

더하라

벧후1:5-7, “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더한다=“에피코레게사테”=보탠다. 보충한다.

 

달라스 윌러드, “은혜의 반대는 노력이 아니라 공로다. 노력은 또 하나의 은혜다”.

 

더할 것

믿음

 

우리는 완고한 사람이 되지 말고 견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샤를르 드 푸코, “하나님을 대적하여 서면 완고하게 되고 하나님앞에 겸손히 서 면 견고하게 된다”.

 

고전15:58,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지식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절제=“엔크라테이아”=안에 있는 힘

 

인내=“휘포모네”=아래에 서는 것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아래 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절제=“엔크라테이아”=안에 있는 힘

 

경건=”굼나제“(짐내지움)=연습, 훈련

 

형제우애

 

사랑

하나님(예수님)

 

세상()와 구별 영성 도덕성

피하라 참여하라 더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