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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마 7:15-21)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마 7:15-21)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노인이 갑자기 염라대왕에게 불려 갔습니다. 노인은 당황하면서 염라대왕에게 항의를 했답니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불러오면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이요, 내가 정리할 것도 있고 죽음에 대하여 준비했다가 와야 하는 거 아니요. 예고라도 해주어야 지, 날씨도 예고 해주는데 왜 죽음은 예고하지 않느냐?'고 따졌답니다.
  그때 염라대왕이 '이 사람 웃기는 사람이구먼. 내가 여러 차례나 예고해 주었지 않았오. 먼저 눈 밑에 잔주름이 있게 한 것이 일차 예고요, 머리색깔이 희어지게 된 것이 이차 예고요, 잔주름이 삼차 예고, 목 주름이 생기게 한 것이 다 죽음의 예고인데 무슨 딴전을 피우고 되레 큰소리냐?'라고 호통을 쳤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그렇게 덧없이 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가? 예수 밖에 있는가?'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 주님은 요15:5절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할/
  고유의 민족의 명절인 추석이 지나갔습니다. 올 추석도 행복하게 보내셨죠? /할/ 이젠 완연히 가을입니다. 가을은 열매의 계절입니다. 풍성한 과일, 오곡백화가 무루 익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갈릴리 근처에 있는 산에서 선포하신 그 유명한 산상수훈입니다. 중심내용은 '열매를 맺는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잎만 무성한 나무처럼 가르칠 때는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자기들은 책임 있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착한 행실의 열매가 없었습니다. 특히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은 잎만 무성한 가지처럼 의식과 형식은 푸르렀지만, 정작 믿음의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근본이 잘못된 사람은 겉으로만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삶과 나타나는 행위를 보면 그 실상을 알게 됩니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로 좋은 신앙의 사람을 비유하고 계십니다. 열매가 신앙과 인격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할/ 또한 이 비유는 '나쁜 나무와 나쁜 열매가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신 교훈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나무가 되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할/ ◀제목소개!▶
  
  물건을 살 때보면 나라마다 습관이 각각 다릅니다. 미국과 영국 사람들은 '이것이 실용적인 물건인가?'를 본다고 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것이 최신유행인가?'를 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련사람들은 '이것 공짜냐?'고 물어본답니다. 그 소련 사람들이 지난 88올림픽 때 한국 사람들이 선물을 많이 주니까 백화점에 가서 아무것이나 집어 가도 되는 줄 알고 있더랍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것이 진짜냐?'고 묻는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짜가 하도 많아서 그렇습니다. 지난 김장철에 중국산 소금을 국내산으로 속여 팔다가 쇠고랑을 찬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 추석에도 중국산을 국내산으로 속여먹다가 적발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영적 세계에서도 가짜가 너무 많습니다. 가짜 집사, 가짜 장로, 가짜 목사가 많이 있습니다. 가짜는 새롭게 거듭나면 되지만 기독교를 파는 이단사이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단들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아멘!/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시고 그의 결론을 마7:13절 이하에서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⑴13-14절 있는 말씀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그것은 진짜입니다. ⑵본문입니다. '그 사람이 영적인 열매'를 맺고 있으면 진짜입니다. ⑶21절의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진짜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듯이 좋은 신앙의 인격이 좋은 신앙의 행실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진짜와 가짜를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할/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결과가 좋게 나타날 것은 처음부터 그 기미가 엿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말은 '싹수가 노랗다.'는 말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나무가 되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란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이자 간단한 이치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둔다.'는 이 간단한 이치를 거스르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불한당'이라는 말은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재물을 마구 빼앗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한 마디로 땀을 흘리지 않는 무리들입니다. 나는 수고하지 않고 남이 땀 흘린 것을 거두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적 심보요, 강도와 같은 마음입니다. 진실을 심고 그 열매를 기다려야 옳은 것입니다. 거짓을 심고 옳은 열매를 얻겠다는 것은 강도요, 도적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가리켜 '슈바이처'는 '어리석게도 열매도 맺지 못하는 허무주의라는 나무 가지에서 진리라는 열매를 찾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믿을 만한 것도 없이, 사랑할 만한 것도 없이, 기대할 만한 것도 없이 살면서 열매만을 바라고 있는 어리석음을 꼬집은 말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그것에 걸 맞는 열매를 맺을 때 비로소 그 생명 됨이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할/
  오늘 본문에서 깨달아야 할 중요한 것은 '열매 이전에 나무'입니다. 예수께서는 '무작정 좋은 열매를 맺고자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며 먼저 '좋은 나무가 되라'는 것입니다. 나무는 가시나무인데 열매는 포도를 따겠다면 말이 안 됩니다. 나무는 엉겅퀴인데 열매는 무화과를 따겠다면 웃기는 이야깁니다. 예수님은 열매부터 말씀하시지 않고 나무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열매가 그 사람의 행위라면 나무는 그 사람의 됨됨이, 즉 '인격과 성품과 기질'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행동부터 바꾸라고 하지 않고, 속 사람이 변하면 행동은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행동을 먼저 고치라고 말씀하지 않고 사람이 먼저 바뀌라는 것입니다.
  즉 인격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순간적으로 보여 주는 행동에는 얼마든지 가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속 사람은 여전한데 행동만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가식입니다. 절대로 오래가지 못합니다.
  탐스러운 포도열매를 그럴싸하게 보이면서 가시나무 됨을 숨기려 하지말고, 열매 이전에 나를 포도나무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화려하고 예쁜 무화과를 보이면서 엉겅퀴인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들지 말고 근본적으로 나 자신을 무화과나무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아멘!/
  중요한 것은 보이는 열매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나무됨입니다. 그런데 나무 이전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는데 '좋은 씨앗'이 '좋은 나무'가 되고, 좋은 나무가 되고야 '좋은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심는 것은 선택이요, 자유입니다. 그러나 추수하는 것은 심판이요, 보상입니다.
  보이지 않는 생각은 씨앗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말은 열매입니다. 보이지 않는 의지는 나무요, 보여 지는 행위는 열매입니다. 속에 있는 인격은 나무요, 다른 사람들의 평판은 그 열매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나쁜 열매를 맺었으면 잘못 된 내 생각과 내 의지와 내 인격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환경이나 분위기를 탓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는 이런 말을 잘합니다. '내 의지는 그것이 아니었는데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환경을 탓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원망할 것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좋은 씨앗이 되고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지 그 외에는 탓할 것이 못 됩니다.
  과일나무는 심어만 놓는다고 해서 좋은 열매를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이른봄부터 가지치기를 해야 하고 거름을 주어 가꾸어야합니다. 나무의 모양을 만들고 열매가 충실히 맺힐 수 있게 곁가지는 모두 잘라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불필요한 가지들은 가지치기를 해야 합니다.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나에게 필요 없는 곁가지들은 어떤 것인지를, 신앙생활의 아름다운 모양을 해치는 삐저 나온 가지는 없는가? 그리고 또 좋은 열매를 위해서는 좋지 않은 열매를 솎아내는 것도 필요합니다.
  농업에서는 이것을 적과 즉 열매솎기입니다. 적당히 열매를 솎아내지 않으면 수확할 열매의 크기도 작을뿐더러 많은 열매들의 무게 때문에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이 가지치기와 열매솎기는 아름다운 열매를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불 신앙과 불순종을 속아내고, 인본주의를 몰아냅시다! /할/

 

  ①좋은 나무가 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은 거짓 진리를 버려야 합니다(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거짓 선지자들은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외식' 이라는 말로 이를 표현하셨습니다. 거짓된 내가 있는 한 진실하지 못합니다. 거짓된 나, 이것을 외식이라고 부릅니다. 현대는 속마음과는 달리 거짓으로 꾸민 외식이 판을 칩니다. 하나님 앞에서만은 가식과 외식을 벗어야만 합니다.
  꽃게가 다 성장하기 위해서 10번의 허물을 벗어야 한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크면 더 크기 위해서 허물을 벗습니다. 우리도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내가 아닌 내가 자꾸 나를 감싸는 외식을 벗어야 합니다. 계속 벗어야 진실한 자기가 드러납니다. 하나님 앞에 보이는 외식을 벗어야 결국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할/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만 경건한 척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철저히 하는 체 했습니다.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며 구제하였으며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였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할 때는 얼굴을 흉하게 하고, 슬픈 기색을 띄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그들의 중심을 보시고 그들의 외식을 단호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현재 우리의 모습이 이러한 것은 아닙니까? 외식을 벗어야 합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려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거짓의 옷을 벗는 순간 진실하게 됩니다. 외식의 탈을 벗는 순간 거룩하게 됩니다. 위선을 벗는 순간 평안이 임합니다. /할/
  주님은 가짜가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먼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독일에는 예수를 믿지 않는 목사들이 수두룩하답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이 목사가 되겠습니까? 독일은 국민들이 교회를 가든지 안가든지 누구나 종교 세를 납부합니다. 그 종교세로 교단이 유지되고 교단에서는 목사들에게 봉급을 지급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업으로서 목사의 직업은 높은 지위요, 안정된 직업입니다. 그래서 목사 직업이 가장 인정된 직업입니다.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신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줄을 서서 신학교는 항상 만원이랍니다.
  ▶본문은 거짓 선지자의 특징을 몇 가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바로 전하지 못하고 왜곡해서 전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유혹에 빠지게 하면서 참된 선지자같이 가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받은 것처럼 예언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렘23:16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예의 바르고 인간미가 넘치고 인정도 많습니다. 성경에 대해서도 해박합니다. 이론도 정연합니다. 설교도 잘합니다. 그 사람의 설교에는 심리학도, 사회학도, 철학도, 정치, 경제도 있습니다. 또한 인권도, 민주화도 인간화도 있습니다. 거기다가 애국도 있고, 통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복음이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5중 복음이 빠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설교는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가 빠진 복음은 능력도 없고, 축복도 없습니다. /믿/
  거짓 선지자들은 예수의 구원도, 부활도, 재림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억눌린 자를 위해서 오셨다.'는 말만 단골메뉴로 나옵니다.
  기독교의 핵심진리를 자꾸 피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중요하게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천국과 지옥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재림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란 신앙의 외식 자, 잘못 교훈 하는 자, 이단자, 진리의 훼방 자 같은 사람들이요, 그들은 진리를 거스르면서도 자신의 주장이 옳다하며 그럴듯한 논리로 성도를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왜 생겨날까요? 실상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진품이 있으면 모조품이 생겨나는 것처럼 진리 운동이 있으니 거짓의 역사도 있는 것입니다. 사탄에 근거를 둔 거짓선지자는 모세 때에도 있었고, 열 왕기 시대에도 있었으며, 예수님 때도 있었고, 또 말세에는 더욱 강성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마24:11/벧후2:1).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을 보겠습니다.
  ⑴겉과 속이 다른 이리라고 했습니다. '겉에는 양에 옷을 입고'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리라는 동물은 처음에는 양을 살살 데리고 가서는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갑자기 탁 잡아먹습니다.
  그러니 거짓 선지자의 특징인 이단은 영혼사냥꾼들입니다. 양은 순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이리는 사납고, 양을 상하게 하고 잡아먹는 짐승입니다. 이와 같이 거짓 선지자, 거짓 지도자, 거짓된 인간들은 겉으로는 착한 척하고 자기가 제일 얌전하고 의로운 척하면서 실상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 양같이 순진한 성도들을 꾀어서 생명을 빼앗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리가 양의 옷을 입고 나오기 때문에 성도들이 그 속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해서 영안을 열어야 하고 분별력을 받아야 합니다. /아멘!/
  ⑵물질을 탐하고 노략질합니다.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여기 노략질은 이단들의 특성입니다. 통일교도 그렇고, 구원파도 그렇고, 대순진리도 그렇고, 감옥에 있다가 죽은 조회성의 영생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강원도에 박 선생님이라고 하는 자칭 예수 선생이 있습니다. 엘리야 제단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전 재산을 팔아 가지고 들어오라고 강요합니다. 옛날 우리 시골 옆에 용화교라는 불교 이단이 있었습니다. 그 교주가 서백일인데 신도들의 재산뿐만 아니라 여승들의 몸까지 빼앗아 신도에게 칼을 맞아 죽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구약에도 신약에도 있었습니다. 요일4: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했고, 주님은 마24:4절 이하에서 '많은 적 그리스도들이 일어 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⑶거짓 선지자들은 그 목적이 다릅니다. 요10:11-13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지만, 거짓 목사나 거짓 선지자들은 양을 늑탈하고 해치려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할/

 

  ②나쁜 나무(거짓 진리)는 열매가 가짜입니다(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방법은 열매를 보아 안다는 것입니다. 말이나 글이나 행동을 가지고는 구별이 안 됩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드러납니다만 제일 중요한 시금석은 열매입니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는 것은 그 나무와 열매가 일치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경솔하게 잘못해석하면 속이야 어떻든 겉만 좋으면 되고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해석까지 비화될 수 있습니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했으니까 열매만 좋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과정을 보시고 결과도 보십니다. /믿/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포도나무에서도 포도만 열리고, 무화과나무에서도 무화과만 열린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가시나무에서 포도 열매를 딸 수 있습니까?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삿9장에 보면 나무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삿9장의 배경은 기드온의 아들인 요담이 세겜 사람들에게 외친 말인데 요담은 왜 이러한 나무들의 비유를 들어야 했는지 당시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당할 때에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니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세우시고 그의 3백 명의 용사로 메뚜기 떼와 같이 몰려오는 미디안 군대를 쳐부숴서 승리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에게 와서 그와 그의 아들과 그의 손자가 나라를 다스려 줄 것을 건의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고 하며 그 호의적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죽은 후에 기드온의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자기가 왕이 되려는 욕심으로 음모를 꾸몄습니다. 자기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기드온의 아들 70인을 한 반석 위에서 몰살시켰습니다.
  그러나 말째 아들 요담만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홀로 화를 면할 수가 있었습니다. 요담은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을 수가 없어서 세겜 남쪽에 있는 그리심산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나무의 비유를 들어 세겜 사람들에게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여러 나무들이 무화과에게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무화과나무가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를 위에 요동하리요' 하며 거절했습니다.
  또 포도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버리고 어찌 나무를 위에 요동하리요'하며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게 해 달라고 했더니 '너희가 나를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처럼 과연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던 세겜 사람들은 나중에 아비멜렉의 손에 의해 진멸되었고, 아비멜렉 역시 부끄러운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거짓 선지자는 가시나무인데 그 가시나무가 사람을 죽이고 자기도 죽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데 참 진리의 열매를 가르칩니다.
  거짓 선지자는 참 진리를 가르치지 아니하므로 참 진리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물질주의, 정욕주의, 세상주의, 인본주의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러한 열매가 맺힙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할/

 

  ③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17).
  하나님은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압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성도의 신앙의 행위를 보고 그 신앙의 척도를 재십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나무는 그 나무의 종류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 나무와 전혀 다른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열매를 원하시기에 좋은 나무되기를 바랍니다. 자연은 진실합니다. 심는 대로 열매를 거두게 합니다. 심지 않고 거두려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콩을 심었으면 좋은 열매를 나쁜 씨앗을 심었으면 나쁜 열매를 결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아름다운 열매 착한 열매, 좋은 열매는 무엇입니까?
  ⑴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갈5:22-23절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사랑은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낱말이며 최대의 덕목입니다. 희락은 구원받은 자의 거룩한 기쁨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의 외적인 표현은 바로 희락입니다. 화평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웃과 나 사이에 화평함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은 대인관계에 나타나는 미덕의 열매입니다. 오래 참음은 분을 더디 내는 인내를 가지고 자기를 헤치려는 사람에 대해서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오래 참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자비는 부드러운 성품이요, 양선은 친절과 덕행을 뜻입니다. 그 다음에 충성, 온유, 절제는 자유에 대한 열매입니다. 충성은 변함 없는 신앙의 절제를 말하고 온유는 하나님 앞에서 잘 길들여진 상태를 말하고 절제는 모든 생활에 지나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와 반대되는 열매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갈5:19절 이하에 보면 육체의 열매가 나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고, 성령의 열매를 거두려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것을 거두고 좋은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좋은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벧전1: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할/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우리 심령 속에 끊임없이 뿌리십시다. /아멘!/ 그런데 약1: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마음 밭에 욕심이라는 씨를 뿌리면 죄를 낳고 결국 죽음이라는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미움을 심으면 미움을 낳고 살인을 거두게 됩니다.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다가 결국 최대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탐심을 심으면 도적질을 거두고 거짓을 심으면 거짓을 거두고 결국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자기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결국 자기 아들들이 아버지 야곱을 속이고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야곱에 아들들이 자기 동생 요셉을 애굽으로 팔아버리고 요셉이 죽은 것처럼 거짓을 꾸며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아합 왕은 어느 날 왕의 수레를 타고 이스라엘로 가다가 나봇이 잘 가꾸어 놓은 포도원을 보고 탐이 나서 나봇을 거짓 죄인으로 꾸며 죽인 후에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종 엘리야가 아합왕을 향하여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는 곳에서 당신의 피도 핥으리라!'고 예언한 것처럼 그 장소에서 그대로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갈6:8-9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본문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할/
  ⑵입술의 열매, 찬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히13: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입니다. 찬양은 그대로 살겠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입술을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입술 가지고 원망하고 불평하면 안 됩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찬송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AD 64년 경 네로 황제의 무서운 박해 운동이 일어났을 때 맹수의 밥이 되면서도 초대 교인들은 하나님을 찬송했고, 그 찬송을 로마의 하늘에 가득 찼습니다.
  그 후 250년 동안 로마 하늘에 가득 찼던 찬송의 찬송은 콘스탄티 대제의 입을 열고 그 입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맞이하는 밀라노 칙령을 공포하게 됐습니다.
  기독교의 모든 행사는 찬송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찬송은 모든 예배 행위요, 모든 비중을 차지합니다. 역대서를 보면 레위인 중에서 따로 성가대를 두었으며 수금, 나팔, 제금, 비파 등 악기를 부는 제사장이 120명이었습니다.
  전쟁시에도 찬송을 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모압, 암몬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찬양대를 앞세워 나갔습니다. 찬양은 위대한 능력을 동반합니다. 대하20:22-23절에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에 살육하였더라' /할/
  마가의 다락방에 120문도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다가 성령의 불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도 찬송의 줄기를 타고 강림하십니다. 행16장에도 바울과 실라의 찬송은 옥문을 여는 기적이 동반됩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도 하나님의 찬송할 때였습니다.
  시150편의 결론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송할찌어다.' /할/
  ⑶거룩한 삶이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롬6:22절에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그런데 거룩한 삶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가능합니다.
  ⑷선한 행실의 열매입니다. 골1:10절에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⑸전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전도하면 신앙이 더 견고해 지고 하늘나라의 상급이 크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④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18).
  나무와 열매가 일치한다고 하는 것은 신앙과 생활을 분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사람은 잠시 동안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속이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척 하는 것처럼 큰 고문도 없습니다. 하루 이틀 흉내를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늘의 평화와 기쁨은 결코 모방할 수가 없습니다.
  가짜는 모방할 수 있어도 진실을 모방할 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이중적인 모습을 갖습니다. 머리로 믿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고 믿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머리로 알고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열매는 그 나무로 안다는 뜻은 신앙과 생활이 일치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할/
  오늘날 우리 기독교는 한 위기에 서 있습니다. 그 위기는 건물이 없어서 생기는 위기도 아니며 성도가 없어서 생기는 위기도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도 많은 것을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했으나 교회가 이제는 은과 금은 가지고 있는데 예수가 없습니다.
  또한 오늘날 성경공부가 없는 것도 설교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다운 태도와 성품이 부재합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본문에 좋은 나무에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입니다. 그리고 나쁜 나무에는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가리킵니다. 모든 나무가 왕이 되지 않으려고 했을 때, 유독 자기만이 왕이 될 수 있다고 했던 나무가 가시나무입니다. 가시나무는 그 옆에 가기만 하면 자꾸 찌릅니다. 옆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 엉겅퀴는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나무입니다. 다른 것이 자라지 못하게 땅을 많이 차지합니다. 자기만 잘난 체하고 자기의 세력만 확장해나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쁜 것이 더 잘 자랍니다. 곡식보다 가라지가 더 잘 자라는 것은 보십시오, 이것이 나쁜 나무들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더 생각해 볼 것은 가시나무, 엉겅퀴 나무가 포도나무, 무화과나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인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좋은 나무이기에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할/  

 

  ⑤열매로 하나님은 심판을 하십니다(19-20).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것이 가시나무와 엉겅퀴의 운명입니다. 거짓 선지자 거짓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포도나무, 무화과나무입니다.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결국은 찍히고 베어져서 연료용 땔감으로 불에 던지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여기서 불은 지옥을 상징합니다. 지옥 불은 꺼지는 법이 없습니다. 영영한 불입니다(계21:8). 그렇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은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기를 원하십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신앙의 결단이 있습니다. 엡4:22-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할/
  ⑴옛사람과 새사람이 있고, 또 겉 사람과 속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고후4: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여기서 옛사람과 겉 사람은 나쁜 열매입니다. 그러나 새사람과 속 사람은 좋은 열매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⑵그러면 겉 사람과 속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고후4: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여기서 보이지 않는 세계는 곧 영적 세계입니다. 이 영적 세계는 영안이 열릴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계입니다. 이렇게 영안이 열려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론적 모습이 바로 속 사람입니다.
  ⑶그런데 바울은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새로워집니까?
  엡3:16절에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요3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거듭난다는 것은 영으로 난 것이요, 8절에서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동화 백설공주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백설공주가 독 사과를 먹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일곱 난쟁이들의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생명은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먼 나라의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왕자의 입맞춤으로 백설공주가 깊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렇습니다. 원래 우리의 속 사람은 깊은 잠에 빠져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 심령 속에 오셔서 우리의 속 사람을 깨워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안이 열려 하나님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땅의 것을 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골3:2절에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속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땅의 것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땅의 것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욕망입니다. 이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땅의 것에서 눈을 띠지 못하게 합니다. 위의 것을 찾지 못하게 만듭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 높아지고 싶어하는 욕망, 유명해 지고 싶어하는 욕망, 성적인 욕망, 이런 욕망들이 속 사람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떨쳐버려야 비로소 위엣 것이 보입니다. /아멘!/
  또 하나는 옛 습관은 우리의 속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 사람이 제대로 활동하게 하려면 옛 습관을 던져버려야 합니다.
  ▶옛날 김유신 장군이 습관적으로 들르던 술집이 있었습니다. 그 술집에 이제는 안가겠다고 다짐을 했건만 그가 조는 틈에 말이 습관적으로 술집에 간 것입니다. 그래서 김유신이 잠에서 깨어나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칼로 베어 죽이면서 자신의 나쁜 습관을 해결했던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대도 조세형씨, 그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훔치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 습관을 완전히 뿌리뽑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간증하고 돌아다니니 남의 이목이 있어 습관이 잘 절제가 되다가 일본에서는 무의식중에 습관이 나온 것입니다. 대도라는 분이 좀도둑 노릇을 하다가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도적질하는 것만 습관이 아닙니다. 게으름도 습관입니다. 거짓말하는 것도 습관입니다. 또 남 흉보는 것도 습관입니다. 앉았다 하면 남 흉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버릴 때 좋은 신앙의 인격이 되어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마5: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아멘!/

 

  ⑥오늘 결론은 '주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좋은 열매'입니다(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기독교는 말의 잔치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믿음의 바른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마음에 없는 입술의 고백만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입니다. 불신자들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자를 가리킵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천국 가는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분명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잘 헤아려 봐야 합니다. '주여!'하고 열정적으로 주님을 부르면서도 정말 그 속에 헌신하고 순종함이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여 부르는 것이 그저 하나의 입술의 표현이요, 습관이 된 자가 있습니다. 본문은 그런 자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 '주여!' 이 말은 상대적으로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뜻도 내포됩니다. 쉽게 표현하면 '주님이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고,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주인과 종은 하늘과 땅입니다. 종은 조건 없이 주인에게 헌신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종은 주인이 내린 그 어떤 명령에도 이유가 없고, 불평이나 불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종은 자기주장이나 자기 생각이 없습니다. 종은 조건 없이 주인에게 헌신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주인과 종 사이는 오직 순종과 헌신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종인 자기가 주장할 것 다 주장하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우선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먼저입니다.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주장하고 자기 마음에 맞으면 행동하는 신앙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바로 본문입니다. /할/
  ▶오래 전에 어느 시골 교회에 연세가 좀 드신 목사님께서 새로 부임을 하시고 첫 설교로 사랑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입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지난주일 설교를 똑같이 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난 뒤에 교인들은 수군대면서 킥킥 웃으며 '아무래도 목사님이 기억력이 없나 봐 어떻게 지난주일 설교를 그대로 할 수가 있을까?' 그런데 그 다음 주일이 되었는데 또다시 똑같은 설교를 합니다. 성도들이 화가 났습니다. '우리가 시골 사람들이라고 목사님이 우리를 무시하는 모양이다.'
  결국 교회는 목사님을 내보내기로 결정하고 통보를 하자, 목사님은 아무 말도 없이 보따리를 싸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 성도들이 좀 안되었다 싶은 생각이 들어 다음 주일에 고별 설교라도 하고 가시라고 말합니다. 목사님은 다음 주일에 설교를 하셨는데 역시 그 날도 똑같은 내용으로 설교를 하십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 하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사랑 없는 모습을 보였으면 목사님께서 마지막으로 고별설교를 하시면서도 똑같은 설교를 하셨을까?' 그들은 자신들을 돌아보면서 회개하고 울면서 목사님이 못 가시도록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 교회에 그대로 남기로 하고, 그 다음 주일이 되자 성도들은 당연히 똑같은 설교를 하리라고 예상을 했는데 뜻밖에도 다른 설교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사랑하면서 살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봉헌생활에서부터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십일조생활을 하지 않는 성도가 있으면 이제부터 모두가 십일조를 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이 그 설교를 듣고 나서 십일조를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안 하면 1년 내내 계속 똑같은 설교를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많고 적고 간에 다 순종해서 십일조를 했습니다. 그 다음 주가 되자 목사님의 설교가 또 바뀌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전도에서 나타납니다. 모두가 전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가 나가서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 다음 주에도 설교가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이 떨어지자 모두가 앞을 다투어서 봉사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니까 교회가 놀랍게 바뀌어졌습니다. 교인들 스스로는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날이 갈수록 크게 부흥을 하게 되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천국은 입술로만 주여, 주여 외치며 형식적이요, 위선적인 태도를 용납하지 않는 곳입니다. 겉모양과 속 모양이 같은 자들이래야 천국을 소유할 수가 있습니다. /할/ 22절에 보면 그 날에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믿음이 뿌리라면 행함은 그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3년 9월22일 대예배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