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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함께 주님의 집으로 지어집니다" 2019년 7월 28일 주일예배 에베소서 2 : 11 - 22 ; 전도서 4 : 9 - 12

 "우리는 함께 주님의 집으로 지어집니다"  2019년 7월 28일 주일예배
                            에베소서 2 : 11 - 22  ;  전도서 4 : 9 - 12


이탈리아 사람들의 행복은 애인과 파스타를 먹으면서 축구를 구경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국사람들의 행복은 짓궂은 농담이 적중했을 때라고 하고, 독일사람들의 행복은 계획대로 일이 진행될 때이며, 스페인 사람들의 행복은 맛있는 식사를 하고 낮잠을 잘 때라고 합니다. 일본인의 행복은 식사를 빨리 끝내고 다시 일을 시작했을 때이며, 러시아 사람들의 행복은 집안으로 들어온 비밀경찰이 집을 잘못 찾은 것을 알고 돌아갈 때랍니다. 그렇다면 요즘 한국인의 행복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요즘 대다수 한국인의 행복은 일본의 아베 수상이 사람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국과 캐나다 사이의 대서양쪽 국경에는 세계의 3대 폭포 중에 하나인 나이아가라 폭포(Niagara Falls)가 있습니다. 인디언의 언어로 '천둥소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이 폭포는 말 그대로 땅을 뒤흔드는 거대한 굉음과 하얗게 피어오르는 물안개, 그리고 주변의 절경 위에 늘 걸려있는 아름다운 무지개로 수없이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습니다. 이 폭포의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매력은 레인보우 브리지(Rainbow Bridge)라는 전장 244미터의 긴 무지개 다리입니다. 그런데 이 다리에 올라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의문이 있습니다. '폭포의 지류 양옆의 가파르고 험한 협곡 위에 어떻게 이렇게 튼튼하고 길다란 다리를 놓을 수 있었을까?'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다리의 건설은 의외로 간단했다고 합니다. 1847년, 현수교 설계시공 전문가인 찰스 엘렛 주니어(Charles Ellet Jr.)는 이 협곡 사이에 다리 건설의 요청을 받고 고민했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교량건설 기술이나 장비가 발달되지 못했고, 또 헬리콥터나 드론이 없었기에 긴 협곡 사이를 곧장 건널 방법도 마땅히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폭포주위를 서성이며 방법을 찾고 있는데, 한 어린 아이가 협곡 둑에서 연을 띄우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연줄을 보는 순간 그에게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먼저 연을 띄워 연줄을 협곡 건너편으로 날려보냈습니다. 그러고서 연줄에 코일을 매달아 건너편에서 잡아당겼고, 다음에는 아주 가는 코일에 약간 더 강한 철사를, 그 다음에는 철사에 밧줄을 매달아 당겼습니다. 마지막으로 밧줄에 쇠로 만든 케이블을 매달아 잡아당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양쪽을 연결하여 쇠줄을 이용해 구름다리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나이아가라 폭포의 협곡 위에 무지개 모양의 레인보우 브리지가 건설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44미터나 되는 협곡 사이에도 가느다란 줄 하나가 연결되자, 그곳에 끝내 거대하고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가 놓일 수 있게 된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는 도저히 맞닿을 수 없을 듯한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서로 이질적인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여, 이 땅에 아름다운 무지개를 피어 올리는 가교의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왜 교회에 나오고, 교회를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에 안 나오자니 왠지 찜찜하고, 그렇다고 나와보니 별 것 없어 그냥 마지못해 나오지는 않습니까?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는 교회관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회가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을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영원히 사느냐, 영원히 죽느냐 하는 문제가 달려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 오리겐은 "교회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는데 가정의 돌봄이 필수적이듯, 그리고 건강한 사회인으로 이 땅에서 행복한 삶을 위해 가정이 필요 불가결하듯, 우리의 영적 신앙생활의 성장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의 유지를 위해서도 교회는 필수적입니다. 교회 없는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신앙생활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든 교회를 통해 말씀을 받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봉사의 생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며, 현실적인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첫째,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 열두 살 된 어린 예수님도 성전을 생각할 때, '이곳은 내 아버지 집이고, 여기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교회에 대한 생각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그리고 초대교회 전통대로 교회를 어머니로 생각하는 그런 고백 속에 신앙인의 바른 교회관이 있고, 구원의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교회관이 중요합니다.


둘째, 교회는 성도의 모임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고전1:2)이라 하여, 교회를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성도들의 모임'으로 정의합니다. 교회란 하나의 조직이나 건물이 아닌,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단순히 사람들의 친교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께 선택받아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에 감동되어 서로 사랑을 나누며, 이웃과 세상까지도 섬기는 데 교회의 교회 됨이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외적인 박해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인본주의와 세속화로, 교회를 과거 유산으로 여기는 것이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무서운 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며,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리스도의 현존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교회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폴 틸리히는 말했습니다. "나는 교회를 떠나서 기독교를 생각할 수 없다. 비록 교회에 문제가 많다 하더라도 기독교가 교회를 떠나 존재할 수는 없다."


1917년 레닌은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을 일으키고 천년이 넘도록 지속돼오던 러시아교회의 문을 모두 닫아 버리고, 그곳을 공산당 당사와 노동자 숙소, 심지어 스케이트장 등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때 공산당 지도자들이었던 사람들이 지금 와서는 이렇게 말한답니다. "교회 문을 닫았더니 모든 문이 닫혀버렸다." 교회 문을 닫으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원과, 축복과, 은혜의 문이 닫아버리십니다. 북한을 보더라도 저들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평양을 비롯한 북한 전역의 교회를 다 폐쇄하고 얻은 결과가 과연 무엇입니까? 밥도 못 먹을 정도로 가난해지지 않았습니까?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 밖에 있던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되어 교회의 일원이 된 과정을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 이스라엘 밖에 있는 사람,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 밖에 있어, 아무런 소망도, 하나님이 없는 사람'으로, 철저히 하나님의 은총 밖에 있었는데, 이런 우리에게 일대 전기가 찾아옵니다. 13절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2:13),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화목케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새로워진 신분이 되었습니다. 19절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2:19) 하여,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가정에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가족이란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의 관계는 영영 끊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 권속이 된 것도 절대 끊을 수 없는 영원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권속이 된 성도들이 하나로 모여서,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으로 세워져갑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엡2:21).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라며, 성도의 모임 중에 계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어져갈 때 어떻게 지어질까요? 첫 째,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집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엡2:20a). 이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닦아 놓은 신앙의 전통 위에 교회가 세워짐을 뜻합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철저한 복음적인 신앙 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간혹 그리스도를 사랑이 많은 인도주의자나, 혹은 인생의 스승으로 이해하지만, 사도들의 고백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낳으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했습니다.


교회는 내가 뭔가 열심히 하여 깨닫고, 은혜 받고, 내 생각대로 힘쓰는 곳이 아니라, 철저히 사도적 전통 위에 세워져야합니다. 고대 인도의 구비설화를 엮은 백유경(百喩經)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돈 많은 장자가 절간의 3층 누각에 올라가 보고 자기 집도 3층으로 지어달라고 목수에게 의뢰해놓고, 건축이 늦어지는 것을 탓하자 목수는 기초를 든든히 하지 않으면 3층을 지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 후 다시 찾아가 "아직도?"하자 "2층을 짓는 중입니다"라고 하니, 장자는 "나는 3층을 주문한 것이지 1층 2층은 소용없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1, 2층 없이는 3층을 세울 수가 없고, 기초 없는 건물은 쉽게 무너지듯이, 우리의 신앙도 무언간 화끈하고 뜨거운 체험만 있으면 좋은 믿음이라 여기는 사람이 있으나, 사도적 전통의 터전이 없이는 교회가 바로 설 수 없고, 바른 뿌리가 없는 믿음은 올바로 설 수 없습니다.


둘째, 모퉁이 돌이 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세워집니다. 20절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20). 여기 '모퉁잇돌'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하나는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28:16)말씀에 근거하여, 건물의 '기초석'(coner stone)으로 보는 견해와, 또 다른 견해는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시118:22)는 말씀에 따라 '머릿돌'(head stone)도 보는데, 둘 다 타당성이 있습니다. 결국 교회는 그리스도를 기초로 세워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건물은 기초가 튼튼해야 견고히 서게되지, 기초가 부실하면 곧 무너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기초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하여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의 신앙에서 세 가지 중심화가 이루어진 생활입니다. 첫째는 하나님 중심, 둘째는 성경중심, 셋째는 교회중심입니다. 이 세 가지 중 한가지만 잘못돼도 우리의 신앙은 변질되거나 잘못되게 되어있습니다. 내 자신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 내 상식이나 세상의 철학의 중심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중심, 그리고 기도원이나 특별한 집회, 혹은 사설모임이 아니라 교회생활 우선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의 중심점을 분명히 할 때, 우리는 세상에서 방황하거나 실족치 않고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성도들의 함께 연합하여 세워집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2). 여기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란 '예루살렘 성전'이나 '하늘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참여하는 '교회'를 뜻합니다. 이 교회는 성령에 의해 성도들이 함께 함으로 지어져갑니다. 하나의 건축물이 되기 위해선 여러 건축자재가 유기적으로 한데 모아져야 합니다. 건축자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 결코 건물은 되지 못하는 것처럼, 성도들이 함께 하지 않고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있으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겠습니까?


캐나다의 한 농촌 마을에서 한 어린아이가 실종되었습니다. 아이가 옥수수 밭에 들어갔다가 그만 방향을 잃고 그 속에서 헤매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밖에서 불러대도, 바람이 불어 우수수 부딪치는 옥수수 잎 소리로 이 아이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점점 더 옥수수 밭 깊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널따란 옥수수 밭을 이 아이의 부모 두 사람으로는 도저히 다 헤매며 찾을 수 없어, 그 날 밤을 지새고, 다음 날, 인근 학교에 연락하자 보이스카웃대원이 달려와, 한 줄로 늘어서서 옥수수 밭을 전부 훑었습니다. 얼마 안 가서 옥수수 밭 한가운데서 이 어린아이를 찾았는데, 이 아이는 밤새 두려움과 추위로 인해 심장마비로 죽어 있었습니다. 죽은 아이 시신을 안고 나오며 보이스카웃대장이 오열하는 부모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진작 이렇게 손을 잡았더라면, 이 아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요." 우리 모두가 손을 잡는다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살려내고, 얼마나 위대한 일들을 해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성전이라는 좋은 건축물이 될 수 있습니까? 첫째, 건축 자재가 좋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고전3:12). 여기에 '금과 은, 보석, 나무 풀, 짚' 등 여섯 가지 자재를 두 가지로 구분하면, '금과 은과 보석'과 같은 고급자재와, '나무와 풀과 짚' 등 하급자재로 나뉘어집니다. 이 말씀과 연관된 말씀을 디모데후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2:20-21).


여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고 했는데, 깨끗하다는 말은 온전하다는 말이기도 하여, 깨진 그릇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실과 청결, 인내와 순종과 충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릇에다 무엇을 담았는데 그냥 새어버리면 무엇에 쓰겠습니까? 우리 주위에는 이렇게 깨어진 인격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인격에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필요한 그릇은, 깨끗하고 진실과 인내에 기초하여, 한 번 말씀을 받아들이면 꾸준하고 변치 않는 사람입니다.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 쉬고 있는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이 동네는 사람 살기 좋은 동네인지요?" 이 물음에 노인은 나그네에게 되묻습니다. "당신이 살던 동네는 어떤 곳이었소?" 나그네가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말도 마십시오. 제가 살던 동네는 허구한날 싸우고 욕하고 헐뜯고 하여, 사람 살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이 대답합니다. "이 동네도 사람 살만한 곳이 아니라우." 얼마 후 또 다른 나그네가 노인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이번에도 노인은 나그네에게 같은 질문을 합니다. "당신이 살던 마을은 어땠소?" 나그네가 환한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는 참 살기 좋은 동네였습니다. 인심이 좋아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어 늘 웃음이 넘쳤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대답합니다. "이 마을도 참 좋은 동네라오." 왜 할아버지는 똑같은 마을을 두고 두 나그네에게 다르게 말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어떤 동네에서 사느냐 하는 것보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에 따라 좋은 동네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과 우리가 섬기는 교회도 우리가 갖는 마음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아름다운 마을, 아름다운 교회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 가갑니다.


둘째, 자기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고전12:28-30). 서로 은사가 다른데, 어떤 은사가 더 좋고, 나쁘고가 없이 각기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에 따라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 건물에는, 철근과 모래와 시멘트도 있고, 유리와 벽돌도 있듯, 교회에도 많은 은사와 직분이 있어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해야합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쓸모 없는 존재는 없습니다.


자동차에는 2만 개의 부속품이 있다고 합니다. 그 2만 개의 부속품 하나 하나가 모두 제 구실을 해야지 어느 하나라도 말썽부리면 안 됩니다. 전에 한양교회에서 교우들과 목요일 밤에 기도원을 가는데, 퓨즈가 나가서 방향을 표시하는 시그널이 작동이 되지 않아, 카센터도 모두 문을 닫은 시간이라 기도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되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에도 모든 성도가 각자 자기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하지, 누군가 자기 역할을 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는 자칫 마비될 수 있습니다.


셋째, 건물의 모든 자재가 든든하게 결속되어야 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엡2:21). 아무리 좋은 자재를 쓰더라도, 모든 자재가 튼튼히 연결되지 않으면, 그 건물은 쉽게 무너집니다. 대부분의 건축물 붕괴는 연결이 견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수대교 붕괴도 지반하고는 상관없이 다리의 연결 강도 저하로 무너진 예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무너지는 것도 성도간의 결속이 없이 분열과 다툼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분열로 몸살을 앓던 당시 영국 교회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상하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마귀와 더불어 싸워야할 성도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다니...."


[행복을 찾아서]라는 영화는 본래 ABC TV에서 한 흑인 비즈니스맨의 인생을 다큐로 방송한 것이 놀라운 반향을 일으키자, 이것을 아예 영화로 제작한 것입니다. 주인공 '크리스 가드너'(Chris Gardner)는 계부의 폭력으로 어린 시절을 살아가는데 폭력을 견디지 못한 그의 어머니는 가드너가 8살 되던 해 계부가 있던 집에 불을 지르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가드너는 결국 남의 집에 입양되는데, 그의 어린 시절은 가정폭력, 알코올중독, 아동학대 등의 상처로 얼룩진 삶이었습니다. 청년 시절 세일즈맨으로 새 인생을 향한 몸부림을 해보지만, 생활고로 세금도 못 내고 자동차마저 압류 당하자 셋집에서 쫓겨나 거리로 내몰리고, 그의 아내는 아들까지 버려둔 채 떠납니다. 졸지에 싱글 대디가 돼버린 1980년대 을씨년스런 샌프란시스코 거리에서 그는 어린 아들과 때로는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때론 노숙자쉼터에서 처절한 생존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는 어머니의 유일한 유산인 기도만은 잊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하는 한 인생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 하나로 버텨냅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어느 날 주식중개인을 만나 인턴이 되고 천신만고 끝에 가드너 앤 리치 컴퍼니를 설립하여 1억 8천만 달러의 윌가의 신화적 사업가가 됩니다. 그는 한 크리스천 기자로부터 "당신은 현실의 벽을 넘어 행복을 찾기 위해 하나님을 얼마나 찾았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노숙자의 삶을 살 때나, CEO의 삶을 살 때나, 항상 저는 교회에 있었습니다. 저는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이 주실 꿈을 바라보았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항로에 때로 거친 파도가 몰려와 금방이라도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듯 할 때, 무엇이 우리 삶을 지켜주고 끝까지 길 가도록 돌봐준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모든 비극은 아버지의 집을 떠난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했던 에덴에서 쫓겨남으로 뼈빠지게 수고하고 고생해야 먹고살게 되었고, 탕자는 아버지 집을 떠나면 행복할 줄 알았으나, 돼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물질적인 기근뿐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영적 기근이 필연적으로 닥쳤습니다.


1888년 4월 16일 8살 된 헬렌 켈러가 처음 교회에 나가던 날, 설리번 선생의 부탁으로 주일학교 학생들은 헬렌을 축하해 파티를 열어주었고, 일일이 헬렌에게 키스를 해주고 안아주었습니다. 헬렌은 믿음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지만, 그 날 교회에 대한 인상을 묻자 '교회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곳'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전4:9-10). 교회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성도의 교제를 돈독히 하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뤄갈 때, 우리는 주님의 가족으로 행복을 누리고 천국을 경험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