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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 2019년 8월 11일 주일예배 고린도전서 7 : 17 - 24 ; 이사야 61 : 1 - 3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        2019년 8월 11일 주일예배
                             고린도전서 7 : 17 - 24 ; 이사야 61 : 1 - 3


몇 해 전 인터넷에 올린 중국인의 글입니다. "신께서는 대통령이 부족하여 만델라를 데려가셨고, 핸드폰이 없어서 잡스를 데려가셨고, 댄스파트너가 없어서 마이클 잭슨을 데려가셨고, 운전기사가 없어서 폴 워커를 데려가셨다. 전능하신 주여, 혹시 개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아베 신조 좀 데려가시죠!" 이에 대한 한국 네티즌의 댓글은 '미친개는 신도 필요 없대요', '미친개를 어따 써요?'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베'를 '개'라고 한 것은 심했나요? 지난 7월 3일자 아사히신문 논설을 보십시오.


[하품, 전염, 수출규제] "함께 있는 사람이 하품을 하면, 영향을 받아 '하암~'하게 돼버린다. 하품은 전염된다라는 이 현상, 다분히 이유가 있는 듯하다. 유력한 설은 상대에게 공감하는 마음의 작용으로 일어난 다는 것이다. 하품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같은 기분이 되어버린다고 한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활동하는 전염력이 있는 걸까? 그런데 다음은 하품이라기보다는 한숨이 나오는 이야기이다. 트럼프 미대통령의 행동도 어쩐지 전염되는 것 같다. 미국이 중국에게 건 무역전쟁과 흡사하게 일본정부가 한국으로의 수출규제에 나섰다. 스마트폰이나 TV 화면 등에 필요한 재료를 수출하기 어렵게 한다. 일제강제징용 재판을 둘러싼 한국정부의 대응이 불만으로, 사실상의 대항조치를 취한 것 같다. 한국 측에도 문제가 있다해도, 이러면 에도의 원수를 나가사키에서 갚는 것처럼 사리에 어긋난 이야기다... 인간의 하품은 개에게도 전염되는 것 같다. 충성을 다한 주인에게 특히 영향을 받기 쉽다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일본 정부의 경우는 이쪽에 가까운가?" 아베는 트럼프의 개랍니다.


숱한 왜구들의 약탈과 임진왜란, 그리고 36간의 국권침탈도 모자라서 또 다시 우리나라에 경제적 침략을 하는 일본 아베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치솟습니다. 2차 대전을 거듭 사죄하는 독일과, 전쟁위안부나 731부대의 생체실험, 난징 30만 대학살을 여전히 부정하는 일본의 차이는 무얼까요? 첫째, 일본엔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가르치는 고등종교가 없기 때문입니다. 야스꾸니 신사는 A급 전범까지 수호신으로 숭배합니다. 둘째, 전쟁을 일으킨 일왕을 전범으로 처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독일은 나치가 아닌 양심세력이 권력을 잡았지만 일본은 극우세력이 집권했습니다. 1894년, 8천 명 군대를 끌고 와서 고종이 거하는 경복궁을 점령하여, 조선내각을 강제로 친일내각으로 만든 오오시마의 고손자가 바로 아베입니다. 셋째, 시민혁명이나 종교개혁과 같은 정신적 도약의 역사적 경험 없이 충성과 질서와 번영만을 추구해왔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 민간구호 단체나 구호기금의 90퍼센트 이상이 모두 기독교국가나 교회에서 나오고 있는데, 강대국 일본, 중국, 러시아에선 그 대단한 부와 힘에도 불구하고 평화봉사단체나 월드비전과 같은 구호단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인들의 예절과 질서가 탁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보호를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들은 세계 시민의식이라든지 자유와 평등, 정의와 박애, 혹은 구원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일본의 예절과 질서의 배경은 사무라이라는 무사계급에 의해 오랜 동안 붓이 아니라 칼이 지배했기에, 자기보호를 위해 극히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심성이 철저한 문화를 만들었고, 그래서 말끝마다 '스이마생'(미안합니다)입니다. 사람을 부를 때나, 비켜달라고 할 때, 스쳐지나가거나 불편하게 했을 때도 '스이마생'입니다. 태어나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도 '남에게 피해주지 말라'는 조심성 있는 방어적인 태도로 서로 간섭하지 않게 하는 교육이, 다른 나라의 '착한 사람이 되라, 용감해라'와 비교됩니다.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인들의 인간성을 연구하고 쓴 책이 [국화와 칼]인데, 그들은 국화처럼 미소짓지만 속에 칼을 품고 있습니다.


어떤 존재의 행복은 그가 누리는 자유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 사상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양심과 신앙에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독립운동가 페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생명보다도 자유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자유의 개념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와, '무엇을 향한 자유'(freedom for)로 분류됩니다. '무엇을 향한 자유'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보다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유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풀어놓았다고 해서 자유가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서지 못하면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은 너를 죄수로 가두고 희망은 너를 자유롭게 한다'는 카피의 명화 [쇼생크 탈출]에서 촉망받던 은행 부지점장 '앤디'(팀 로빈슨)가 아내와 정부를 죽인 혐의로 종신형을 받고 20년 간 수감 생활하다 탈옥하자, 교도소에서 모든 걸 구해주던 '레드'(모건 프리먼)가 가석방되어 이런 말을 합니다. "지난 40년 간 나는 허락 받고 오줌을 누러 다녔다. 허락 받지 않으면 오줌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버스로 앤디를 찾아가며 말합니다. "꿈을 갖고 살던가, 희망 없이 죽던가. 희망에 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 나는 무사히 국경을 넘었으면 좋겠다. 앤디를 다시 만나 포옹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태평양이 꿈속처럼 푸르기를 희망한다. 나는 희망한다." 희망조차 할 수 없었던 레드에게 이젠 희망할 자유가 생겨난 것입니다.


기독교는 자유의 종교입니다. 구약의 최대의 사건은 출애굽사건이면, 신약의 최대의 사건은 십자가의 사건으로, 이 두 사건 모두 자유와 해방의 사건입니다. 출애굽은 히브리 백성이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 받은 사건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을 죄와 사단의 죽음 권세에서 해방시킨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구속이나 억압에 매이길 원치 않으시고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 우리는 이전에는 자유가 없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롬6:17). 죄의 종이란 의식의 자유도, 사상의 자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전에 죄와 사망과 사탄과 율법의 종으로서 죄의 소욕에 매여 불가불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을 만큼 깊이 종이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얼마나 비참한 노예 상태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다시 그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되었던 지난날의 불행을 알아야만 다시는 죄의 종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매년 유월절이 되면 가정에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역사를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어린이들이 의식이 싹트면서 부모에게 처음 듣는 말이 '우리는 이집트에서 바로의 노예였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3천여 년 역사의 대부분이 바로 타향에서 유랑한 망국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예였다'라고 가르치는 것은, 우리는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니 이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며 현실에 순응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수치스런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다시는 노예의 비참한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 과거 치욕스러웠던 노예생활의 역사를 회상함으로 지난날에 대한 반성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된 이 자유를 지켜가려는 다짐을 새롭게 하려는 미래지향적인 가르침인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본문 23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는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자유는 내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였습니다. 노예는 무슨 방법으로도 스스로 자유할 길이 없습니다. 노예가 자유를 얻으려면, 주인이 그를 풀어 자유케 하든지, 누가 몸값을 치러줘야 하는데, 노예는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졌더라도 자기 소유가 아닌, 주인의 소유기에 스스로 자신의 몸값을 치를 길이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자유할 수 없었는데, 그리스도께서 보혈로 값을 치러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워싱턴 DC의 한국전 기념공원에는 판초우의를 입고 행군하는 랭크 게일로드의 조각작품과 "우리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 전혀 알지도 못했던 나라의 자유를 위해 달려갔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글귀에서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자유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희생된 미군이 5만4246명,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 사망자는 62만8833명이나 됩니다. 이때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벤프리트 장군,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등이 아들들을 잃었고, 워커 중장은 아들과 함께 참전했다 전사했고, 24사단 딘 소장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런 희생으로 우리가 자유를 누리듯,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셋째, 우리의 자유를 위해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었음을 알고 그 자유를 소중히 지켜야 합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7:23). 얼마나 비싼 값을 지불하고 주어진 자유인데, 그것을 잃어버리고 다시 종이 되어서야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모든 소중한 것은 그것의 가치를 아는 자만이 소유할 수 있고, 또 그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가치를 모르면 그것으로 인한 기쁨도 행복도 모르거니와, 그것을 그대로 지키고 유지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것을 위해 지불된 가치와, 그 가치의 소중함을 아는 자만이 소유할 자격이 있습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이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해 함락되자, 예루살렘에 살던 천 여명의 유대인들이 천연의 요새 맛사다(해발450m)로 피신합니다. 거기서 로마의 실바 장군이 이끄는 10군단과 대치하며 3년 간 항전하다 AD 73년 더 이상 버틸 수 없자, 지도자 벤 야일은 이런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동지들이여 우리는 지금까지 참되고 의로우신 야훼 하나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굴복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방인 로마의 손에 죽거나 아니면 항복하여 그들의 노예가 되는 길을 선택할 순간이 가까이 왔습니다. 동지들이여, 차라리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합시다. 우리 아내들이 수치를 당하지 않은 채로, 우리 자녀들이 노예 됨의 지식을 모른 채로 죽게 합시다." 그래서 그들 중에서 10명의 남자들에게 죽이는 임무를 맡기고 마지막엔 그들도 서로를 죽였는데, 극적으로 죽음을 면한 2명의 여인과 5명의 아이들 외에 960명 전원이 장렬히 집단 자결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자유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 자유를 지키며 누릴 수 있습니까? 첫째, 자유의 소중함을 알고, 주어진 자유를 귀하게 지켜야합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7:23).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엄청난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그 값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그 비싼 값으로 얻은 자유의 소중함을 알고, 다시는 죄의 노예나 사탄의 종이 되지 않도록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소중하게 지켜야만 합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모르면 그 자유를 다시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가 얼마나 큰 희생을 통해서 주어진 것인가를 알고 이 자유를 빼앗긴 채, 다시 죄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자유를 소중히 지켜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조그만 어려움만 만나도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출14:11)며 원망했습니다. 노예생활로 평생을 살기보다는 자유인으로 며칠만이라도 살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다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하여 끌려갔을 때, 원수들이 노래부르라고 조롱할 때 쓴 시편 137편을 김정준 목사님은 우리 역사에 빗대어 이렇게 의역했습니다. "북해도 탄광에서나 만주 벌판에서 서울을 생각하고 우리는 울었다. 저기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퉁소를 달았다. 우리의 장구도 달아버렸다. 아, 우리를 징용해온 이 자들이 즐기도록 어찌 양산도를 부르리! 어찌 아리랑을 부르리! 내 조국 노랫가락을 이 이역에서 부를진대, 내 혀여, 입천장에 붙어버려라! 내 겨레의 노래에 맞추어 장구를 칠진대, 내 손가락이여, 장구에 붙어버려라." ([시편명상] 시 137편, 김정준)


에이브라함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직후, 조지아주에 살던 한 흑인 노인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시내에 나와 새 파는 가게 앞에서 새장 안에 있는 새들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주인에게 값을 물어봅니다. 부르는 대로 값을 지불하고 새를 사서 잠시 새를 만져보더니 그 새를 하늘로 날려보냅니다. 그러더니 옆에 있는 새를 또 한참 쳐다보다가 값을 지불하고 나서 새장에서 꺼내 만져 보더니 또 푸른 하늘을 향해 날려보냅니다. 세 마리, 네 마리, 계속 그렇게 날려보냅니다. 이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던 주인이 "당신, 제 정신이오?"라고 묻자 이 흑인 노인이 이런 의미 깊은 대답을 합니다. "선생님은 두 가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선 노예의 비극을 알지 못합니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인가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선생님은 부자유에서 자유를 얻은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 사람은 새장에 갇혀 있는 새를 통해 과거 부자유했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이제 자기가 얻은 자유를 그 새에게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둘째, 진리 안에 행함으로 자유하게 됩니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전7:19).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의와 거짓은 사람을 억압하여 자유를 빼앗기에, 성경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고 행함으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3-5)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지면, 인간은 자유를 잃게 됩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헛된 것에 매여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날수를 따라 여기저기로 다니면서 방해하는 귀신(손)이 있어 음력 초하룻날과 이튿날은 동쪽에 있고, 사흗날과 나흗날은 남쪽에 있고, 닷샛날과 엿샛날은 서쪽에 있고, 이렛날과 여드렛날은 북쪽에 있고, 아흐렛날과 열흘, 열 아흐렛날, 스무날, 스무 아흐렛날과 그믐날은 하늘로 돌아가 버리니, 알아서 이사할 날을 잡으라." 아직도 이런 헛된 미신에 매여 자유를 누리지 못하거나, 무책임과 방종으로 죄악에 매여 불법에 얽매여 자유를 잃고 종노릇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미국 역사상 감사장을 제일 많이 받은 제인 로저스는 녹음 예술과,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계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편하고 재미있게 살 수 있었지만, 고아와 버림받은 아이들, 정신지체아 등 불행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자선행사를 무려 5천 번 이상이나 개최하고, 주관했습니다. 그녀는 [어려운 때의 하나님]이란 책에서 말합니다. "나는 마약에도 빠졌었고, 인생의 밑바닥에까지 떨어져 쓰레기같이 되었었다. 나를 구해낸 것은 성경이다. 성경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어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한 사람들이었다. 어려운 때를 이길 수 있는 해독제는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참된 진리를 행함으로 자유를 누립니다.


셋째, 인간은 그리스도께 매임으로 도리어 자유를 누립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7:22).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라고 말씀합니다. 그의 신분이 노예든 주인이든,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참된 자유자임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가장 큰 자에게 매이는 것이,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실 때,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욕망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만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독서의 바퀴]에서 말했습니다. "인간은 노예이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선택된 바에 의해서 노예가 되어야한다. 이제는 누구의 노예인가 하는 사실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 야고보, 유다 등, 모든 사도들은 철저히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롬1:1, 빌1:1, 약1:1, 벧후1:1, 유1:1)이라고 자기 존재의식을 천명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세상의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참된 자유인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매임으로 진정한 자유를 누립니다.


정채봉 선생의 [코뚜레가 일을 한다]는 글입니다. 두 마리 송아지가 자라서 코뚜레를 할 때가 되자, 맏 송아지가 농부한테 사정합니다. "저에게는 제발 코뚜레를 하지 말아주십시오." 농부가 대답합니다. "코뚜레하지 않으면 망아지처럼 되고 말텐데." "아닙니다, 주인님. 코뚜레를 해야 일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은 옛날 생각입니다. 두고보십시오. 코뚜레하지 않으면 곱절이나 일을 잘할 테니까요." 농부는 맏 송아지 말을 받아들여 동생송아지에게만 코뚜레를 했습니다. 맏 송아지는 말대로 코뚜레 없이도 스스로 멍에도 메고 쟁기도 끌었습니다. 코뚜레 한 동생송아지가 쉴 때도 맏 송아지는 힘내어 달구지를 끌었습니다. 이들이 어느덧 어른 소가 되자, 코뚜레 안 한 맏 송아지는 차츰 꾀를 내더니, 일을 피해 달아나기도 하고, 잡으러 오는 농부에게 발길질도 했습니다. 어느 날 코뚜레 한 동생 소가 보니 맏 소가 보이지 않아 행방을 묻자 주인이 대답합니다. "일도 안하고 꾀만 부려서 도살장으로 보냈지." 우리는 그리스도께 매여 선한 일을 위해 충성할 때,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전에 시카고에서 미술품경매가 있었는데, 값비싼 작품들이 다 경매된 후에 이름 모를 작가의 그림 하나가 남았습니다. 이것을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어 14불 75센트라는 싼값에 팔렸습니다. 그런데 뒤에 알고 보니 이 그림은 희랍 화가인 미네르바의 [애굽으로 가는 거룩한 가족]으로, 아기 예수께서 애굽으로 피난 가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아주 유명한 그림이었습니다. 이것이 17세기 이탈리아에서 잃어버렸는데, 시카고에서 나타날 줄 몰랐습니다. 후에 그 그림은 다시 5만 불에 팔렸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5만 불 짜리 이 귀한 그림을 14불 75센트에 산 사람이나 판 사람 모두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여서, 그 가치를 모르는 자는 소유할 자격이 없습니다.


미국 상원 전속 목사였던 피터 마샬(Peter Marshall)이 상원 개원식 때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자유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권리가 아니라, 옳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기회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옳은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내가 누구냐?'하는 것보다 '내가 누구에게 속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속했음을 알 때, 비로소 나의 정체와 나의 자유가 보장됩니다. 윈스턴 처칠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의 처음 25년 동안 나는 자유를 갈구했다. 그 다음 25년 동안 나는 질서를 추구했다. 그 다음 25년 동안 나는 질서가 곧 자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 책임을 다하는 질서 속에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D.L 무디의 매사추세츠의 노스필드 성경수양회(Northfield Bible Conference)에 영국에서 귀족 손님들이 방문하여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영국에서는 손님이 오면 복도에서 일하는 종(Hall servant)이 있어 밤새 손님의 구두를 닦아놓는 것이 관례였는데, 무디의 참모 중에 이런 관례를 아는 이가 있어 어떻게 할 것인가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여기는 미국이니 그만두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한사람이 무디에게 전하면서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묻자, 무디는 빙그레 웃으며 "글쎄, 주님께 물어볼까?"하더니 머리 숙여 한참 기도하고 잠자리에 드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영국 손님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와보니, 그들의 구두는 모두 깨끗하게 닦여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로 섬기는 종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자기 존재의 주인이 아니기에, 자신이 자기 인생의 목적도 중심도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엄청난 값을 치러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누릴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다시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무지와 의심과 미움의 종이 되지 말고, 사랑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죄의 권세와 유혹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