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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손세용목사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 2019년 8월 25일 주일예배 골로새서 3 : 12 - 17 ; 시편 16 : 1 - 3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        2019년 8월 25일 주일예배
                              골로새서 3 : 12 - 17 ; 시편 16 : 1 - 3


어떤 사람이 기차여행하며 장군과 함께 같은 칸을 탔는데, 장군은 2층 침대에 그 사람은 아래 침대를 잡고서, 승무원에게 자기는 중도에 하차해야 하니 새벽 4시에 깨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밤중에 장군이 몸을 뒤척이다 그의 상의가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다음 날 승무원은 새벽 4시에 그 사람을 깨우자 그 사람은 곧바로 옷을 주워 입고 중간 역에서 하차했는데, 기차에서 내려 거울을 보니 자신이 장군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승무원이 있나? 나는 그에게 나를 깨워달라고 했는데 그는 그만 장군을 깨웠구먼."


미국 경제주간지 포브스가 2002년 창간 85주년 기념호에서 1917-2000년까지 근대문명의 의식주패턴을 혁신적으로 바꾼 발명품 및 아이디어 85개를 다음과 같이 선정하여 소개하였습니다. 1917년 고무창운동화 스니커즈, 1924년 뮤추얼펀드 냉동식품, 1926년 로켓엔진, 1928년 페니실린, 1929년 합성고무, 1930년 제트엔진, 1933년 주파수변조, 1934년 나일론, 1938년 복사기술, 1939년 헬리콥터 자동차 자동변속기장치, 1940년 레이더, 1945년 원자력, 1947년 휴대전화 전자레인지 트랜지스터, 1948년 레코드LP판, 1950년 신용카드, 1951년 피임약, 1952년 홀리데이 인, 1955년 패스트푸드, 1956년 디스크드라이버, 컨테이너, 1961년 종이기저귀, 1968년 컴퓨터 마우스, 1969년 인터넷, 1970년 콤팩트디스크, 1971년 자동응답기, 1991년 WWW, 1995년 인터넷 비즈니스, 1998년 비아그라 등이었습니다. 이런 발명품과 발견들은 인간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기도 했지만, 그 중에는 해를 끼친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나 자신을 모르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모르고는 세상을 알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란 사실을 알아야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래야 이 세상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교육학자 파커 팔머는 말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하는 문제는, '내가 누구입니까?'라는 본연적인 질문에서 출발하며, '나는 누구입니까?'라는 문제는 '나는 누구의 것입니까?'라는 질문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 전에 유대인 랍비가 회당에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총을 든 러시아 군인이 갑자기 가슴에 총을 들이대며 "너는 누구냐,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느냐?"라고 묻자, 랍비는 군인의 갑작스런 질문에 이렇게 지혜롭게 되물었습니다. "여보게 군인, 여기서 총을 대고 이런 질문하는데 얼마의 급여를 받는가?" 그러자 군인 20코페이카를 받는다고 대답하니, 랍비가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매일 아침 내가 이곳을 지나 갈 때마다 동일한 이 질문을 해주게. 그럼 내가 더 많은 돈을 드리이다."


본문 12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3:12)라 하여, 그리스도인의 정체에 대해 신앙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선택받은 자, 거룩한 자, 사랑 받는 자'라는 세 가지 존재로 규정합니다. 이것을 근거로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정체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아인식이요,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이유를 분명하게 해줍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첫째,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받은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말을 칼뱅은 그의 [예정론]이라는 교리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칼뱅은 '이중 예정론'까지 주장했는데, 그 제자들은 평생을 배워도 납득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이해되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안 되는 것 같고, 이쪽으로 생각하면 말이 되고 저쪽으로 생각해보면 말이 안되고 무척 답답해하다가 칼뱅이 세상을 떠날 때 또 물어 보았답니다. "그 예정론이 정말 맞는 것입니까?" 칼뱅 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성경이 그렇게 말하느니라"(Bible says so)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선택된 것은 은혜에 의한 선택임을 말씀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불러낸 선택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레위기에서도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20:26)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은총에 의한 선택입니다. 이 '선택'은 무자격한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거나 남달리 똑똑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었습니다. 어떤 자격도 없고, 무슨 시험을 본 것도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의해 선택된 것입니다.


선택받은 자의 기본 자세는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마음가짐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나는 구원받을만한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나 같은 자를 강권적으로 선택하셔서 구원하셨습니다'하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게는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내게는 아무런 의로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었을 뿐이요, 주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선택된 것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도 은혜요 둘도 은혜입니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은혜 안에 내가 존재할 뿐입니다. 이것이 선택받은 자의 올바른 자아의식입니다. 이렇다하게 잘난 것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을 뿐입니다. 엄청난 은혜일 뿐입니다.


어느 날 토레이 목사님에게 어떤 부인이 찾아와서 상담하였습니다. "목사님, 저는 집회에 많이 참석하고 기도도 많이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실감나지 않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도 실감나지 않는데 왜 그럴까요?" 이 말을 듣고 토레이 목사님은 이 부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부인, 오늘부터 다른 기도는 하지말고 집에 가서 하나님께 부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달라는 이 한 가지 기도만 일주일 동안 계속 하십시오." 그래서 이 부인은 목사님의 충고에 따라 집에 돌아가 이 기도만 계속하였습니다. "하나님, 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십시오." 이 기도를 계속 하던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마나 더럽고 추한 죄인인지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부인은 자기의 죄악을 깨닫고 절망한 채 일주일 후에 토레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 저는 죽어버리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자, 토레이 목사님은 "이제부턴 주님의 십자가를 보여달라고 이 한가지 기도만 하십시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 부인은 집에 와서 두 번째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보여주십시오." 그때 이 부인은 십자가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나 자신이 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절망을 고백하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내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주셔서 이로 인해 깨끗하게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모습은 거룩한 자, 곧 성도입니다. 12절에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이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한 자, 곧 성도라는 말은 참으로 귀한 이름입니다. 기독교인의 맨 처음 이름은 '제자'이고, 그 다음은 '그리스도인', 또 그 다음은 '성도'라는 이름으로, '거룩히 구별된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 '성도'라는 말을 쓰기를 꺼려하고, 오히려 불편해합니다. 그 때문에 이 아름다운 이름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피장파장으로, 먹고 마시는 것에서부터 욕심부리는 마음 씀씀이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게 없어 성도라고 부르기가 어색하고 불림 받기도 거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성도라고 부르십니다. 어느 교회는 사람이 모인 곳이기에 문제가 없을 수 없는데, 특히 고린도교회는 성도간에 서로 다투며 분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서로간에 세상 법정에서까지 싸웠고, 성적인 부패로 근친상간까지 있었습니다. 이런 교인들이 있는 그 고린도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고전1:2)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도 됨은 그의 도덕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그 소속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족해도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이상 우리가 성도라는 것은 그 뿌리와 소속이 다른 것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소속이 다르고, 또 앞으로 나아갈 운명이 다르기에 세상의 가치들과 구별된 생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말할 때마다 '할렐루야!'나 '아멘!'을 연발하고, 몸에 커다란 십자가 배지를 달고 다니면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일까요? 구두장이가 하나님을 믿을 때 그가 믿는 구두장이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자기가 만드는 구두뒤축에 십자가를 새겨 넣는 것보다, 사람들이 편하게 신을 수 있는 좋은 구두를 정성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식당을 하는 성도라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는 성경 말씀을 걸어놓는 것보다, 깨끗하면서도 맛있고 음식을 만들고, 또 인색하지 않고, 모든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으로 그 신앙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세 번째 모습은 사랑 받는 자입니다. 12절은 '사랑하신 자처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사43:4). 우리는 간혹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거기에 비례하여 하나님도 나를 그만큼 사랑하신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그 사랑을 깨닫기도 전에 이미 부은 바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시각장애자로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엘렌 니콜스라는 자매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살 때 엄마는 시각장애자인 아이를 시장에 놔두고 잠깐 어디 갔다온다던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보호소로 갔고, 네 살 되던 해에 미국 볼티모어의 니콜스씨 가정에 입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니콜스씨 부부도 모두 시각장애자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장애를 가진 아이들만 넷을 입양해서 키웠습니다. 그 부모의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면서 곱고 귀하게 자랐습니다. 그 아이가 간증을 했습니다. "나는 부모가 나를 버렸다는 것이 무언지도 모릅니다. 거기에 특별히 미움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앙이 좋으신 부모님의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고 자라 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사탄이 내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네 부모도 너를 버렸는데 하나님이 너 같은 걸 소중히 여기겠느냐!' 그 때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외치면 또 말을 바꿉니다. '너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도 눈뜨고 살잖아. 근데 왜 너만 이 장애를 가져야 하느냐?' 그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승리합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정체에 따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먼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마음과 인격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12절 후반 절에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3:12b)라는 말씀에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는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또한 성령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이제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메시야 되신 분이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손수 씻어주신 다음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고 하시며, '너희도 당연히 그러해야 마땅치 아니하냐?'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용서했으니 너희가 서로 용서함이 마땅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가 이 사랑을 받았으니 너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 당연합니다. 기독교 윤리란 수평적 관계에서 서로 얼마나 주고받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이 내게 잘해주니 나도 저 사람에게 잘 대해주고, 저 사람이 못되게 구니 나도 그에게 잘못해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문제는 그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이고,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자세는 내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풀어 가는 문제입니다.


2011년 8월 12일, 국민일보 이태형 기자가 이어령 박사의 딸 고 이민아 목사가 입원해 있던 서울대병원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나요?" 그러자 이 목사는 단호히 말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그분을 알고 사랑할 때만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와의 사랑, 한 남자와의 지독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나 공허했다고 합니다. "늘 외로웠어요. 사랑은 상처가 됐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정체성의 위기 속에 자살 충동도 느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을 만났어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알면서 상처들이 사라졌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모두가 '땅끝의 아이들'입니다. 그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이후 겸손과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는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 닮는 축복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겸손과 온유, 용서하는 마음이야말로 하나님 닮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녀에게도 인생에서 용서할 수 없는 몇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을 결국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사랑을 알고부터 였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면 인간이 할 수 없는 희생을 할 수 있기에, 순교의 비밀도 사랑에 있고, 순교는 죽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신앙여정에서 묻는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는 순간 이뤄진다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이웃에 대하여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3:13-14). 주님이 용서하신 것 같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용서함으로 저를 자유케 하고, 내가 용서함으로 내가 증오로부터 자유케 됩니다. 내가 용서치 못하고, 용서하기 힘든 것은, 내가 아직도 엄청난 용서를 받아야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에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기가 힘든 것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엄청나게 큰 것임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하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엘살바도르의 어느 마을은 주민 70퍼센트 이상이 조직폭력단을 통해 공급되는 마약으로 마을경제가 유지되는데, 한 목사님이 가정집 마당을 빌려 교회를 세우고, 컴패션과 손잡고 어린이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폭력배들의 방해가 심했는데 6개월쯤 지나자 아이들이 교회에 어머니를 데려오기 시작했고, 아버지들도 하나둘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교회에 새로 나온 한 아버지가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조직폭력단에 소속되어 오랫동안 마약을 팔다가 잡혀 감옥에 갔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감옥에 가면 복역기간이 길어 아내와 아이들이 떠납니다. 그때 딸아이는 컴패션에서 양육 받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이가 집에 오자 아내가 가방을 싸고 있었습니다. 엄마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우리가 떠나면 예수님이 아빠를 사랑하시는 걸 누가 알려줘? 누가 아빠랑 함께 있어?' 그 말에 아이 엄마는 짐 싸던 손을 멈췄습니다. 아이가 울며 말합니다. '예수님이 아빠도 사랑하시잖아.' 아내는 감옥으로 찾아가 그 이야기를 하며 남편이 감옥에 얼마나 오래 있든 기다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모범수로 조기 석방됐고, 폭력단과 관계도 끊었습니다. "딸을 통해 제가 예수님을 알게 됐습니다. 저 같은 죄인도 언제나 사랑 받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랑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한 아이의 사랑으로 아빠가 감옥에 가고 엄마도 떠나려던 가정을 살려냈습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해선 감사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본문 15 - 17절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5b-17). 그가 얼마나 성령충만하고, 얼마나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는 그에게 얼마나 감사가 넘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현승 시인의 [감사하는 마음]이란 시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언제나 은혜의 불빛 앞에 있다. 받았기에, 부렸기에, 배불렀기에 감사하지 않는다. 추방에서 맹수와 싸움에서 낯선 광야에서도 용감한 조상들은 제단을 쌓고 첫 열매를 드렸다. 허물어진 마음에서 불 없는 방에서 빵 없는 아침에도 가난한 과부들은 남은 것을 모아 드리었다. 드리려고 드렸더니 드리기 위하여 드렸더니 더 많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 마음만을 받으시고  그 마음과 마음을 담은 그릇들은 더 많은 금은의 그릇을 보태어 우리에게 돌려보내신다. 그러한 빈 그릇들은 하늘의 집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주인이 누구인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감사, 오직 기쁨만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너무나 감사하여 나를 선택한 분께 나를 위탁합니다. 내일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선택된 것만으로 충분하고, 지금 받은 은혜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사를 모르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시고 사랑하고 계신데 대한 깨달음 없이, 아무 개념 없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프레드 크래독 목사 부부가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데, 한 사람이 다가와 인사하며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어머니는 결혼하지 않은 몸으로 자신을 낳았기에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들었고, 자신도 학교에서 외톨이가 되어 늘 혼자였습니다. 그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어머니와 함께 장을 볼 때면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저 아이의 아버지가 도대체 누구지?"하는 조롱이었습니다. 그가 열두 살 때 그 마을에 새로운 목사님이 오시자, 사람들은 그 목사님의 설교가 뛰어나다고 하여, 이 소년도 그 설교를 들으려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은 목사님 설교에 감동되어 흠뻑 빠져들었으나 교회에 갈 때도 사람들을 의식하여 늦게 몰래 들어갔다가 말씀만 듣고 슬며시 빠져나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그가 예배마치고 조금 늦게 예배당을 빠져나오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넌 누구니? 네 아버님이 어느 분이시지?" 깜짝 놀라 돌아보니 목사님이었습니다. 소년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목사님이 "잠깐만, 네 얼굴을 보니 너를 닮은 아버지가 누구신지 알겠구나. 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지?" 이 소년이 후에 두 번이나 테네시주 주지사에 당선된 벤 후퍼인데, 그는 목사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하신 그 한 마디가 제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시16:3). 세상이 뭐라고 우리를 비난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선택받은 소중한 자기정체를 분명히 알고, 그러기에 더 겸손하고, 더 경건하고, 더 참고 용서하며, 그러기에 이웃까지도 더욱 사랑하며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