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손세용목사

"믿음으로 살아가는 생활" 2019년 8월 18일 주일예배 창세기 12 : 1 - 4 ; 히브리서 11 : 1 - 2

 "믿음으로 살아가는 생활"     2019년 8월 18일 주일예배
                           창세기 12 : 1 - 4  ;  히브리서 11 : 1 - 2


미국에서는 해마다 허풍쟁이를 뽑는다고 대회가 있다는데, 어느 해 이런 허풍이 상을 탔다고 합니다. "바람이 어찌 세게 불던지, 사진을 찍었는데, 바람에 화상이 모두 날아가 버려 사진이 하얗게 나왔더라." 또 어느 해에는 이런 허풍도 있었습니다. "그 해 여름 날씨가 어찌나 덥든지 밭에 서있는 옥수수가 뻥뻥 팝콘으로 튀는 바람에, 소가 눈이 오는 줄 알고 그만 얼어죽고 말았다"는 허풍이었습니다. 이런 얘기를 사실이라고 믿을 사람은 없겠지요. 이것은 그냥 웃자고 지어낸 허풍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믿음'과 '불신'과 '미신'에 대하여 이렇게 구분합니다. "믿음은 사실을 사실대로 믿는 것이고, 불신은 사실을 사실로 믿지 않는 것이며, 미신이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믿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참된 믿음은 어디까지 사실에 기초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사실로 믿지 못하여 불신앙에 빠지거나,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믿다가 미신과 이단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패션잡지 에스콰이어의 편집자 제이콥스(A. J Jacobs)가 [미친 척하고 성경말씀대로 살아본 1년]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700여 개의 계명들을 정리하여 성경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가를 알기 위해 일 년 동안 그 계명대로 실행해 보았습니다. 성경을 잘 알지 못해 매끄럽지 못한 면도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식당에서 가족과 식사하고 나오다가 부인의 동창생을 만났는데, 상대방이 아내에게 "조만간 또 다시 봅시다"하고 말하자 "그럽시다"하면 될 텐데,  생각해 보니 얼마 후에 다시 만날 수가 없을 것 같아 아내의 동창에게 정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럴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그냥 약속하지 말고 헤어집시다." 그 날 아내에게 엄청난 핀잔을 들었습니다. 성경의 뜻을 잘 몰라 실수도 있었습니다. 주일에 뉴욕 거리를 거닐면서 안식일에 일하는 자에게 돌을 던지라는 말씀대로 주일 날 일하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피상적으로만 해석해서 생긴 실수였지만 그만큼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미친 척하고 말씀 그대로 실행하고서, 일년 후에 얻은 것을 정리해보고 기도하면서 위로를 크게 받았습니다. 또 얼마나 무력하고 무능하고 흠이 많은 사람인가 깨닫고 또 안식과 기쁨을 누리고, 하찮은 것에도 감사하게 되는 부작용 아닌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어느 대통령을 위한 기도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대통령으로 하여금 자기 신념대로 살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진리에 겸손히 순종하는 믿음과 용기로 살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내 신념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온전히 순종할 때, 비로소 믿음의 성장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첫째, 자기 신념을 믿음이라고 오해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쓰는 '믿음'이라는 말과,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과 용어는 같지만 뜻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갖는 오해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믿음'이란 신념을 뜻하는데, 이 신념은 극히 주관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마음의 확고한 결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자기의 확고한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약속을 신뢰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종이라고 합니다.


둘째, 믿음과 종교를 혼동하는 오해입니다. 믿음이란 그 대상이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인데, 종교란 사람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낸 대상을 의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는 기독교도 종교의 한 부류로 여기지만,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차이점은, 다른 종교는 인간이 필요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낸 신을 믿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인간에게 구원과 은총을 내려주시는 것에 대해, 인간이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절대로 일반종교와 같을 수 없습니다.


셋째, 믿음을 어떤 선행으로 여기는 오해입니다. 물론 기독교의 열매는 선행으로 나타나지만, 그렇다고 선행 그 자체가 기독교는 아닙니다. 소에 뿔이 달렸다 해서, 그 뿔이 곧 소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성도는 그 사랑에 감격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아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사랑을 실천하지만 이런 윤리적인 선행이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믿음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하나님께 응답하며 사는 것이지, 어떤 인도주의적 생각으로 실천하는 선한 행위 자체를 믿음이라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 선을 행했다고 그것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고 정의합니다. 여기 '실상'이란 말은 헬라어로 '휴포스타시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증거물에 대한 확실한 신념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이 주신 증거를 가지고 그의 약속을 믿고, 그대로 될 것을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약속이 있으면 반드시 실현이 있고, 영원한 미래가 있는가 하면 현재적 성취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믿음에 대한 하나의 논리적인 설명이기에 구체적인 믿음의 사례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의 생활의 구체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을 예로 드는 것은, 아브라함이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었거나, 우리에게 완벽한 모델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실패도 하고, 실수도 하면서,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응답했던 모습을 통해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하는 예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 여기서 첫째, 믿음은 분리(separation)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상이 사업에 성공했고, 물질적 혜택이 풍성했던 도시에 살고 있었고, 가족과 친구들을 모두 그곳에 두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응답한다는 것은 이러한 과거의 유대관계를 끊고, 본 적도 없고 경험한 바도 없는 곳을 향해 위험한 여행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 동안 살아오던 삶의 방식, 맺어왔던 인간관계, 가지고 있던 모든 가치체계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의 출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세 가지를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는 '네 고향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네 잔뼈가 굵어왔던 그 삶의 터전을 떠나라는 말씀으로, 삶의 근거를 바꾸라는 주님의 도전입니다. 다음은 '네 친척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네게 영향을 주었던 과거의 영향력에서부터 벗어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다음은 '네 아버지 집도 떠나라'고 하십니다. 아버지는 소중하지만 그러나 새로운 가치관과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선 그 영향에서도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겐 새로운 삶의 주인이 되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안목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그 동안 그가 그의 삶의 토대요 터전이 되었던,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새로운 세계를 향해 떠나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우리는 새롭게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나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수용하고,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과거의 삶에서 떠나 그가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미래를 향해서 나아갑니다. 떠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떠나는 것은 옛것의 포기를 말합니다. 이 포기는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축복을 위한 포기입니다. 이것은 죄악뿐만 아니라, 때론 우리 생각에 나쁘지 않다고 여기는 것까지도 버려야 하기도 합니다. 이제는 자신의 의견이나 주변의 여론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생활은 하나님과 일차적인 관계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더라도 이전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거기에다 한 가지 더, 믿음이라는 것을 보태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전의 '죄악 된 생활을 청산하고' 믿음의 길을 걸어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말씀에서 '회개한다'는 말은 옛 생활을 청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옛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새로운 생활에로 접어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이전에 하나님을 모르던 세계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믿음이 분리를 요구한다면, 여러분은 믿음을 갖고서 어떤 것을 멀리하셨습니까? 우리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면, 좋지 못한 친구를 멀리해야 하고, 불건전한 취미나 놀이도 버려야합니다. 어떤 분은 토요일이면 낚시터에서 밤새우는 것이 예사였는데, 믿음생활을 하면서 그 취미도 멀리했습니다. 이것이 사람에 따라 운동일 수도 있고, 여행일 수도 있고, 사교일 수도 있고, 각기 다른 것일 수 있지만, 어떻든 우리가 옛 생활에서 얼마나 벗어났느냐에 따라 앞으로 나아간 정도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평남 평원 출신인 백사겸은 평범한 농부 아들로 태어나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아홉 살에 눈병으로 '장님'이 됐는데, 몇 해 되지 않아 어머니마저 잃고 거지생활을 하게 됩니다. 당시 '맹인'은 10명 중 8명이 점술에 종사했는데, 4년여 점술을 배워 열다섯부터 대동강을 따라 다니며 돈을 벌었습니다. 눈치가 빠르고 상황판단이 정확한 그는 '백 장님'으로 불리며 떼돈을 벌었습니다. 장가갈 나이에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자 '딸을 성한 사람에게 시집 보내면 일찍 죽는다'며 양갓집 딸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1897년 그에게 매서인 김제옥이 찾아와 전도지를 주며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도리를 적은 말씀인데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때 백사겸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나는 예수교에 반대한 터나 체면을 봐서 받기는 했는데 독한 벌레가 손에 닿는 듯이 선뜻하였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백사겸은 환상을 봅니다. "나는 예수다. 내가 주는 산통은 의의 산통이니 받아 가지라." 몇 날 며칠을 그런 꿈을 꾸자 백사겸은 아내에게 전도지를 읽어달라고 하여 그 내용이 꿈속의 예수의 말씀과 같은 것을 알고 "경 치는 일을 단연코 그만두겠소"라고 선언하고 김제옥과 함께 고양읍교회에 나갑니다. 그리고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행주교회에 가서 불의한 방법으로 번 재산 3000여 냥과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내어주고, 아내에게는 자신이 걸인신세가 될 테니 이혼해달라고 했으나 남편의 길에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행주교회에서는 그의 소문을 듣고 '회개한 고양읍 백 장님 오셨다'며 그를 강단에 세워 간증부흥회를 합니다. 백사겸은 그 후 장단읍교회와 개성남부교회, 포천 감암리교회 등을 개척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백남석은 연희전문 영문과 교수를 지내고 현제명 곡 가곡 '가을'의 작사가이며 우리나라 주일학교운동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둘째, 믿음의 생활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그 축복을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할 테니, 너는 복의 근원이 돼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여러 모로 형통하게 하셨고, 그를 창대하게 해주셨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아내 사라를 뺐으려했던 애굽 왕 바로와, 블레셋 왕 아비멜멕에게서 그의 아내를 지켜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까지 많은 재물을 공급케 하기도 하셨습니다(창12:16, 20:14).


아브람에게 주신 축복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창대케 되는 것이었습니다. 주변 왕들이 아브람을 존중히 여기고, 그를 멸시치 못하게 하셨고, 적은 군대로도 적을 파하고 탈취물을 취하여 오게 하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명성을 돌보시리라는 약속입니다. 그가 죽은 지 수 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그의 이름을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문화권 내에서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심지어는 회교권에서조차 아브라함을 존귀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가장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2:23).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가장 영광스러운 칭호가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습니다.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은 그 혼자서만 누리도록 주어진 축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는 복의 근원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조카 롯이 시날 왕 등 연합군이 소돔을 침략하여 포로로 잡아가자, 군대를 이끌고 쫓아가 롯과 그 가족을 구해내고, 그들에게 탈취해온 전리품을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최초로 십일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기도로 닫혔던 태가 열려 자녀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창20:17). 신앙인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이웃에게 나누고 끼치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탈렌트 김혜자 권사가 2011년 '제30회 세종문화상' 사회봉사부문을 수상한 뒤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녀는 처음엔 수상을 거절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인데, 상을 받는다는 게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각을 고쳐먹은 건, 상금 3000만원의 유혹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 돈으로 케냐 소말리아 난민촌에서 질병과 영양실조로 죽어 가는 아이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내전과 기근을 피해 목숨 걸고 난민촌에 왔지만 정작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영양죽을 먹이겠습니다. 나의 힘 되신 여호와 하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1992년 월드비전의 권유로 '여행 삼아' 간 에티오피아에서 지옥보다 더 비참한 현지인들의 삶을 목격한 충격이 그녀를 봉사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이후 비싼 식당에서 식사할 때나, 비싼 핸드백을 사려할 때 '이 돈이면 500명의 아이들을 하루 배불리 먹일 수 있는데, 이 돈이면 10명의 아이가 1년간 학교를 다닐 수 있는데'라며 전 세계 굶주린 아이들을 돕는 일은 또 다른 일상이 돼버렸습니다.


셋째, 믿음의 생활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3).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여 그들의 저주가 자신의 머리로 돌아가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아무도 함부로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저주하거나 해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애굽의 바로 왕도, 블레셋의 아비멜렉도, 시날왕도 감히 아브라함을 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아브라함에게 많은 재물을 제공하게 하셨습니다.


구세군 창시자 윌리엄 부스는 젊었을 때 열심히 전도생활에 힘쓰다가 중병을 얻었습니다. 의사가 심각하게 충고합니다. "이런 몸으로 전도생활을 계속하면 1년도 살지 못합니다." 그 말을 듣고 부스는 기도하고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그리고 더 열심히 전도생활을 계속했는데, 마침내 그는 병을 이기고 구세군을 창설하여 84세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길, "내가 젊었을 때 의사가 나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도 의사를 버렸습니다. 대신 나는 하나님만을 의지했더니,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책임져주십니다.


그러면 이 믿음을 어떻게 지켜갈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창12:1a). 아브람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믿음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너는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아브람의 믿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생명의 씨앗이 땅에 심어져야 나무가 자라나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야 믿음이 태어나게 됩니다.


둘째,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창12:7-8).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호를 부르며 기도한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개별적인 교제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내 생각과 소원을 아뢰는 것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의 열렬한 주창자였던 무신론자 토마스 헉슬리가 죽기 직전에 어느 할머니가 병상에서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났습니다. 그에게 전도했지만 그의 능란한 화술과 해박한 지식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말문이 막힌 여인은 조용히 병상 모서리에서 눈을 감고 헉슬리의 소매에 팔을 걸친 채 기도했습니다. 잠시 후 여인의 기도가 끝났을 때, 헉슬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기도가 그의 논리를 파하고 기도가 그의 방어기제를 허물어 버린 것입니다. 기도가 그의 차가운 마음을 녹인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4절에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히11:8)고 말씀합니다.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장래기업으로 받을 땅을 향해 믿음으로 나갔습니다. 본 훼퍼는 '믿는 자들만이 순종할 것이며, 순종하는 자만이 믿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전에 제법 큰 술집을 운영하여 돈을 잘 벌던 분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그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권리금도 포기하고 술집을 정리하여 빚을 갚고 나니 돈이 얼마 남지 않아 시장 입구에서 복권 가게를 했는데 그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아닌 것 같아, 결국 기도하며 떡볶이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10평도 안 되는 가게에 손님이 몰려들어 아르바이트생을 두 명이나 쓰게 됐습니다. 이분은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내가 사장이었는데…'하는 교만 때문에 아무 일도 못했을 텐데 '전도인의 사명을 갖고 손님들을 대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자 하나님의 도우심이 느껴졌습니다. 손님 한 분 한 분을 예수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니까 장사는 저절로 되었습니다." 주님 말씀에 순복해서 삶을 하나씩 말씀대로 고쳐 나가면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아무 것도 희생하지 않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믿음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말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영국 왕립연구소의 전기분해의 탁월한 이론가인 험프리 데이비 박사는 말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정신력 혹은 지성, 천재성, 권력, 위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을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종교적 믿음을 택할 것이다. 믿음은 인생의 선을 훈련시키며 희망이 쇠할 때 새로운 희망을 주고 삶과 죽음을 일깨워주며 굴욕과 수치를 천국으로 향하는 사다리가 되게 하고 영원한 기쁨을 준다."


갑자기 날씨가 변하더니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하자 어린 딸이 걱정된 엄마가 학원으로 전화했더니 조금 전에 아이가 혼자 집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딸은 오지 않아 엄마는 곧 우비와 우산을 갖추고 딸을 찾아 나섰습니다. 거리로 나간 엄마는 어린 딸이 가게 처마 밑에서 울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골목길 모퉁이를 돌자 아주 여유 있게 집으로 오는 딸이 보였습니다. 갑자기 번개가 치자 딸은 멈추어서 하늘을 보고 활짝 웃더니 또 다시 걷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엄마가 얼른 다가가서 두 팔로 딸을 끌어안자 아이는 엄마 품속에서 신나서 말합니다. "엄마! 플래시 터지는 거 봤어요? 하나님이 하늘나라에서 내 사진을 찍고 있어요!" 성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보상은 우리가 믿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울음으로 시작된 인생이 미소로 끝나게 하는 은총입니다. 우리가 옛 생활에서 떠나, 주님이 베푸시는 하늘의 축복을 누리며, 그 받은 복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면서, 환란 많은 세상에서 날마다 돌보시는 주님의 보호하심 속에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