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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한규목사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삼상 3장 1-10절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
삼상 3장 1-10절

< 순수하고 조용히 헌신해야 합니다 >

우리가 잘 아는 옛날이야기가 있는데, 제가 약간 변형해보았습니다. 옛날 어떤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괴 두 개를 발견하였습니다. 둘은 하나씩 나눠 가졌습니다. 그리고 계속 길을 가다가 갑자기 강물에 형이 금괴를 내던졌습니다. 동생이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형님! 왜 금괴를 버리십니까?” 형님이 말했습니다. “동생! 금괴를 보니까 ‘동생이 없었으면 내가 금괴를 다 차지할 수 있었는데...’하는 마음이 들었네. 금괴 때문에 우리의 우애가 깨질까봐 버렸네.”

그 말을 듣고 동생도 말했습니다. “형님! 저도 그런 욕심이 들었습니다. 이 물건은 필경 나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동생도 금괴를 버렸습니다. 둘은 편안한 마음으로 각자 집으로 갔습니다. 그날 밤, 형은 조용히 금괴를 버린 강으로 가서 금괴 두 개를 찾아내서 큰 집을 짓고 떵떵거리며 잘 살았고, 동생은 노동일을 하며 힘들게 살았다고 합니다.

극히 일부분의 얘기이지만 교회에도 가끔 이런 형님과 같은 리더가 있습니다. 좋은 말로 성도들의 극단적인 헌신을 유도해서 교회를 짓고, 작은 왕국을 건설합니다. 나중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를 확장한 것입니다.

서울의 어떤 목사님은 헌신을 잘 시키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 청년 중에서는 안구를 돈 받고 팔아서 교회 건축에 썼다는 청년도 몇 명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도 주님의 몸이지만 사람의 몸도 주님의 몸입니다. 그 몸을 잘 관리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나는 순교할 운명이다! 나는 순교해야 된다!”고 순교 콤플렉스와 헌신 콤플렉스에 빠져서 분별없이 헌신하다가 인간 왕국의 도구가 된 불행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잘못된 순교는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모슬렘에서 자살폭탄을 하는 신도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그들 뒤에는 그들을 사주하는 말발이 센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냉전 시대 때는 이념을 위해서 자기 몸을 내놓고, 자기 부모를 고발해서 총살시키는 자녀가 헌신의 표상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들은 헌신이 아니라 몰록 신에게 자녀를 불태워 바치는 이방 의식들입니다.

물론 자발적인 헌신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교회건축을 위해 특별 부흥회를 열고 극단의 헌신을 강요하고, 분위기를 띄우고, 천국의 보상을 내세워 한 채밖에 없는 집을 내놓고 월세로 가게 하는 것은 기독교의 개혁 과제 제 1호입니다. 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까? 약 120년에 걸쳐 지었던 베드로 대성당의 엄청난 건축비 마련을 위해 돈 받고 면죄부를 판 것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었습니다.

물론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해서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건축이라는 목표를 세워놓고 헌신을 강요하는 것이나 장로가 되려면 3천만 원 이상, 권사와 안수집사가 되려면 천만 원 이상이라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현대판 면죄부를 파는 행위와 똑같습니다. 그처럼 분별없는 헌신 콤플렉스에 빠지면 천국 확장의 도구가 되기보다는 종교인들의 왕국 건설의 도구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 교회 건축을 한다고 눈을 뺍니까?

옛날 독립문 성결교회의 임영재 목사님이 부흥회에서 눈 빼는 얘기로 교회 건축한 예화를 들려줬을 때 저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물론 처음에 교회 건축을 위해서라면 눈이라도 빼겠다고 전주 예수병원을 찾았던 사람의 헌신은 자발적이고 순수한 헌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얘기를 하며 성도들이 눈을 빼고 신장을 팔고 아파트를 팔도록 유도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정말 교회 건축의 감동이 넘쳐서 못 견디겠으면 성도들의 눈은 보호해주고, 차라리 자기 눈부터 먼저 빼야 합니다.

사이비의 3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교주가 신도들의 재산을 약탈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부흥되었다는 종교 공동체들은 거의 모두가 부동산 재벌이 됐습니다. 곧 종말이 온다고 하면서 재산을 긁어모으고, 건축을 한다고 하면서 재산을 긁어모읍니다.

둘째 교주의 보디가드가 반드시 있습니다. 왜 보디가드가 필요합니까?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재산을 약탈하고, 멀쩡한 아내와 자식을 잘 교육해서 가정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가정으로부터 빼앗아서 많은 가정을 깼기 때문에 원수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신변 위험을 느끼니까 보디가드가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 교주를 맹신하고 지나치게 추앙합니다. 사람이 단순히 존경받는 것 이상으로 높아지면 정상적인 교회라도 점차 사이비로 변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종의 위치에 서야지 신의 위치에 서서는 안 됩니다. 그런 교주의 모습은 인간적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천국에서는 자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분별없는 헌신 콤플렉스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헌신이 없는 교인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분위기와 영웅심에 젖어 헌신 콤플렉스에 빠져 헌신하는 것도 피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헌신하지 않으면서 편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자발적으로 교회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수하고 조용히 헌신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 >

오늘 본문에 사무엘의 자세를 보면 헌신이 무엇인지, 또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지를 잘 알려주는 본문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사무엘 당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무엘이었습니다. 어떻게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매사에 공명정대한 사람

당시에 왜 말씀이 희귀해졌습니까? 가장 큰 원인은 당시의 최고 지도자였던 엘리 제사장의 잘못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2장을 보면 엘리는 자식 관리를 못했습니다. 그때 그의 아들들은 제사를 멸시했고, 제단에서 수종을 드는 여자들과 동침까지 했습니다. 자식들이 그러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혼을 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얘기를 듣고도 엘리는 강하게 야단치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왜 그랬니? 소문이 좋지 않구나. 백성들이 보니까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라(삼상 2:22-25절).” 그런 식으로 지도자가 가족과 친인척 관리를 못하니 누가 그를 신뢰합니까? 지도자는 매사에 공정하고 친인척 관리에는 더 엄격해야 합니다. 공명정대함은 지도자의 필수조건입니다.

원래 사단은 하나님 보좌 가장 가까이에서 찬양하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반역하자 하나님은 사단의 잘못을 더 엄격히 처리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에서도 하나님은 그 민족을 가장 사랑했지만 그들이 잘못된 길로 가니까 어떤 민족보다 더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얼마나 공명정대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엘리에게는 그런 공명정대함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지도력의 상실을 가져 왔고, 결국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막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도자가 바로 설 때 그 공동체에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공명정대하게 살고 자식 사랑이 잘못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남의 자식이 잘못된 행동을 하면 속으로 “자식 하나도 제대로 못 키우나!”라고 하면 됩니다. 그러나 내 자식이 잘못된 행동을 하면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끔 전도사님이 우리 아이들을 야단칩니다. 어떤 때에는 제가 있는 곳에서도 야단을 칩니다. 저는 그렇게 눈치 보지 않고 야단을 치는 전도사님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왜냐하면 어른들이 아이들 야단을 치는 것은 대개 아이들이 잘 되라고 야단을 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예배 시간에 떠들고 야단맞을 행동을 하면 부모가 야단을 쳐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의 할 일을 대신해 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어느 날, 우연이 교회의 누가 자기 아이 야단치는 것을 목격하면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 “왜 내 아이 기죽여!”라고 하면 그 아이의 앞날을 죽이는 나쁜 부모가 됩니다. 그때에는 야단치는 선생님이나 어른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해야 합니다. 그분들이 있기 때문에 내 자녀에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자기 자녀를 야단치는 분이 있으면 그분에게 가서 말씀하십시오. “오늘 시간 있으세요? 제가 식사 한번 대접하고 싶습니다.”

세상에서는 내 자녀를 억울하게 야단치는 경우도 혹 있지만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습니다. 어른이 아이들을 야단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내 자녀를 야단치면 고마워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공명정대한 삶입니다. 공명정대함이란 내 것을 버리고, 내 이기심을 버리고, 내 인간적인 사랑과 자랑을 버리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2. 윗사람에게 헌신하는 사람

사무엘상 1-3장을 보면 당시 엘리 제사장은 영성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사무엘상 1장 12-14절을 보면 아기가 없어서 한 맺힌 한나가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니까 술에 취한 줄 알고 술을 끊으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기도하는 것을 술에 취한 것으로 알 정도로 그는 영성이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또한 자녀 교육도 제대로 못하고 제사장이라는 화려한 타이틀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타이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용입니다. 어떤 영화를 보면 볼거리는 있지만 줄거리가 없습니다. 그처럼 볼거리는 있지만 줄거리가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본문의 엘리가 그랬습니다. 엘리는 영성이 떨어진 게으르고 나태한 제사장이었습니다.

본문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이 구절을 보면 자기 처소에 누운 엘리의 안일한 모습과 하나님의 전에 누운 사무엘의 헌신된 모습이 대비가 됩니다.

이 장면을 보면 사무엘이 얼마나 기도하는 사람이었으며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적인 사람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무엘은 자신이 기도하고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엘리 제사장을 우습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헌신하는 사람 중에 가끔 자기를 높여서 교회 리더를 우습게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헌신은 자기를 높이는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헌신을 자랑하려는 마음이 바로 헌신 콤플렉스에 빠지게 만듭니다. 사실 엘리도 젊었을 적에는 사무엘처럼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은 간과하고 자기가 현재 헌신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윗사람을 멸시한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신앙과 영성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윗사람도 옛날 신화적으로 헌신했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영성과 헌신의 정도는 때에 따라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과 열심이 높아졌을 때 영적 우월의식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런 때일수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자기가 기도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나는 이렇게 성전에서 기도하는데 엘리 목사님은 잠만 자!”라고 생각하면서 묘한 영적 우월의식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무엘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훈련 받는 입장에 있으니까 여호와의 전 안에서 이렇게 불편하게 지내더라도 엘리 목사님은 연세도 많으신데 침소에서 편히 쉬셔야지. 엘리 목사님도 젊었을 때는 끝내주게 헌신했을 거야.”

그런 마음을 가졌기에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에게 절대 충성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무엘의 그런 충성스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본문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간밤에 사무엘은 누가 자기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줄 알고 “야밤에 왜 불러! 노망 드셨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즉각 엘리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말도 “무슨 일이십니까? 왜 그러십니까?”라고 하지 않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만 들어도 그가 엘리 제사장에게 얼마나 충성스러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본문 6절과 8절 말씀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그처럼 세 번이나 똑같이 일이 벌어지니까 엘리 제사장이 지침을 내렸습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그러자 본문 10절 말씀을 보면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이런 모습들이 사무엘의 충성심을 잘 보여줍니다.

이 장면을 보면 성도가 어떤 음성을 들을 때 그것이 마귀의 음성인지 하나님의 음성인지 분별하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음성 듣고 자랑에 빠지고, 교만하게 되고 지도자를 우습게 알면 마귀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음성을 듣고 겸손하게 되고, 여전히 지도자를 높여드리고, 지도자에게 충성하는 사람은 바로 진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자기의 헌신적인 삶과 영성을 자랑하지 않고 지도자에게 최대한 순종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처럼 지도자가 분명한 도덕적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생각의 차이나 열심의 차이로 인해 지도자를 비난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항상 지도자를 높여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3.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

사무엘은 윗사람에 대한 헌신도 잘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께 헌신적이었습니다. 윗사람에 대한 헌신은 절대 요소가 아니지만 하나님에 대한 헌신은 절대 요소입니다. 결국 누가 은혜를 받습니까? 결국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 이면에는 신앙 좋은 어머니 한나의 역할도 컸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헌신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화려한 타이틀이나 과거의 체험이나 전통이 아닙니다. 가끔 모태신앙을 자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을 보면 ‘못해 신앙’을 가진 경우도 많습니다. 모태신앙이라면서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순종하고 헌신하는 성도에게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네 번째 들렸을 때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가르쳐준 대로 본문 1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그처럼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제가 듣겠습니다.”라고 순종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말씀이 들릴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잘 들으려고 애쓰는 자세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가끔 보면 설교를 받아 적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 설교하는데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모릅니다. 그런 분들 중에 은혜가 없는 분들은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 은혜를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1984년에 은혜 받으면서 목사님 말씀을 받아 적는 일부터 했습니다. 그런 태도에는 말씀대로 살겠다는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그처럼 말씀을 잘 받고 말씀대로 살겠다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말씀도 주시고, 은혜도 주십니다.

어느 날, 한 집사님이 설교 중에 무엇인가 열심히 적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설교 시간에 눈을 반짝이면서 밝은 표정으로 목사님을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열심히 적고, 다시 목사님을 쳐다보고 또 다시 열심히 적었습니다.

목사님이 신이 났습니다. “이제야 저 집사님의 가슴에도 성령의 바람이 불었구나!” 예배 후에 목사님이 그 집사님과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집사님! 오늘 아주 은혜롭게 보입니다. 무엇인가 열심히 적고 있던데요.” 집사님이 쑥스러운 듯이 말했습니다. “예? 오늘 종이에 적은 거요? 죄송해요. 요새 곗돈 붓고 있는데 잠깐 그것 받을 날을 계산하고 있었어요!”

우리 교인 중에는 예배 중에 그런 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부터 시작이 됩니다. 반면에 신앙생활에서 모든 잘못된 태도는 말씀을 잘못 듣는 것에서 시작이 됩니다.

예전에 찬송가가 많이 없을 때 시골 할머니들은 찬송가의 가사를 엉뚱하게 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찬송가 502장을 보면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속에 차고도 넘쳐.” 그러면 시골 할머니들은 ‘험곡’이란 말이 뭔지, ‘영광’이란 말이 뭔지 잘 모르니까 이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태산을 넘어 홍콩에 가고 비가 온 데로 걸어가면.... 하늘에 영감 하늘의 영감 나의 맘속에 차고도 넘쳐...”

그렇게 하늘에 먼저 가신 영감님을 생각하면서 찬송하니까 얼마나 은혜가 됩니까? 그러나 전혀 다른 가사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한번 잘못 들어서 영적으로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선교회 회원 목사님들이 춘천으로 일일 야유회를 갔습니다. 제가 일정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일정은 이렇습니다. 아침 10시에 저희 선교회 사무실에서 출발해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드라이브 코스라는 양수리를 거쳐 양수리 동치미 국수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소양강에 도착해서 배를 타고, 산림욕을 즐긴 후에 오후 5시에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올 예정입니다.”

문구가 그럴듯해서 여러 목사님들이 기대를 하고 야유회에 오셨습니다. 그 중에서 미국에서 오래 살다 귀국한 이창영 목사님이 간편한 복장을 하고 목욕타월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고 오셨느냐?”고 했더니 산림욕을 한다고 해서 산에서 목욕하는 줄 알고 그렇게 오신 것입니다. 그처럼 메시지를 잘못 이해해서 곤경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새 일부 교회에서 구역 모임보다는 목장 모임을 가집니다. 어느 날, 한 목장이 토요일 10시에 어느 가정에서 목장 모임을 가지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모였는데 그 중에서 한 초신자 부부가 등산화를 신고 등산복을 입고 왔습니다. 알고 보니까 목장 모임이라고 해서 대관령 목장에 가는 줄 알고 그런 차림으로 온 것입니다. 모르면 이렇게 실수가 많습니다.

영적인 문제에서 그런 오해를 하면 얼마나 영혼이 심각한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습니다(호 4:6). 말씀을 모르면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사모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잘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종하는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기분 좋게만 들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때로는 희생을 요구하고, 때로는 자존심을 철저히 버리라고 하고, 때로는 우리의 소중한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에도 순종하려고 해야 합니다. 지키기 어려운 말씀일수록 힘써 지키면 하나님이 더욱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보다 잘해야 할 고백이 바로 본문 10절에 나오는 고백입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 주는 것이 있어야 받게 됩니다 >


사람도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 가장 정이 갑니다. 하나님께서도 말씀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사람에게 가장 정을 주시고, 가장 축복을 많이 내려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순수하게 드린 것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헛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한나가 어렵게 얻은 아들을 한명 바치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무엘상 2장 2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한나는 한 생명을 바치고 다섯 배의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결코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냉수 한 그릇의 헌신도 반드시 보상해주실 것입니다(마 10:42).

분별없는 극단적인 헌신도 문제이지만 오늘날 더욱 큰 문제는 아예 헌신이 없는 것입니다. 헌신이 없으면 진정한 복은 없습니다. 드리는 것이 없으면 받는 것도 없습니다. 버리는 강도가 강할수록 은혜의 크기도 커집니다. 복된 삶을 살려면 받는 것에 대한 관심은 점차 줄이고, 주는 것에 대한 관심은 점차 늘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드릴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줄까?”

요새 선교사님의 전화를 가끔 받습니다. 특히 어떤 긴급한 필요가 있는 분의 전화를 받으면 마치 빚쟁이가 된 기분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는 영적 빚쟁이들입니다. 우리도 모두 선교해야 되는데 우리 대신 그분들이 대표로 힘든 곳에 나가 선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빚쟁이 의식을 가지고 선교사님들의 필요를 힘써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선교사님들의 다급한 기도제목을 들을 때마다 솔직히 부담은 되지만 그 부담은 후방에서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가 당연히 져야 할 부담으로 생각하고 힘써 선교에 동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고자 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십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식당에서도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주려는 사람에게 사람들이(복이) 몰리는 법입니다.

그처럼 헌신의 역사가 있을 때 받는 역사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꼭 갚아야 하는 채무자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의 헌신에 대해 후히 갚아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항상 사무엘처럼 겸손하고 조용히 헌신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받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