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13-22
찬송가 505장 ‘온 세상 위하여’
사도행전 3-4장은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 모습을 그려줍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제구시(오후3시)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다가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사람, 곧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한 선천성 하반신 지체장애인이었던 40여 세 된 사람을 고쳐 주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어지는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로 인해 남자만 5,000명이 믿음을 갖게 되었음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맞은 편에는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 갖게 된 5,000명과는 다르게, 베드로 일행을 체포하여 가두고, 심문하며, 경고했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를 위시한 대제사장들에게 둘려싸여 있는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은 흡사 안나스의 뜰에 서서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연상하게 합니다. 대제사장들에게 둘려 싸여 있는 지금, 베드로는 당연히 당시의 예수님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혀갈 때, 그 곳에 베드로도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베드로는 철저한 관망자가 되기를 선택했고,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요한복음 18:17-18)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예수님과 같은 처지에 처하게 된 베드로가 요한복음 18장과 같은 베드로였다면, 두려워하며 벌벌 떨고 있었겠지만, 사도행전 4장에서는 담대하게 말했다고 증언합니다.
(13 상반절)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이전의 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경고하는 종교 지도자들(13-18절)
베드로와 요한은 종교지도자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용기와 확신에 차서 답변을 이어갔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담대하게 답변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며 놀랐습니다.
(13 하반절-14)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종교지도자들이 사도들을 보며 놀랐던 이유에 대해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학문이 없는”으로 번역된 단어는 원래 “문맹”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요한복음 7장 15절의 용례에 비춰볼 때, “랍비 교육을 받지 않았던 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범인”으로 번역된 단어 역시, “지식이나 활동의 어떤 분야에서 조직적인 정보나 전문성을 획득하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를 종합해서 말하면, 종교지도자들은 랍비들의 상급 훈련을 받지도 않은 베드로와 요한이 이 나라의 최고법정인 산헤드린 앞에서 그렇게 확신 있게 말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고, 그들의 용기와 확신 앞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배운 것도 없는 그들이 용기와 확신에 차 기탄없이 자신들을 변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 있는 자와 같되 서기관들과는 다른 놀라운 교훈이었습니다.(막 1:22) 그러한 예수님과 가까이 교제하며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들을 함께 보냈던 제자들은 많은 것들을 눈으로 보고, 경험하며 배웠던 것이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8절은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했다고 증거합니다. 당시 랍비들이 받는 높은 수준의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으로 배운 교훈이 있었고, 충만한 성령의 이끄심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즉 사도들은 예수님의 교훈으로부터 얻은 메시지에, 성령님의 이끄심이 더해져 담대하게 자신들을 변호하며 메시지를 선포했던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미문에 앉아 있다가 고침을 받은 선천성 하반신 지체장애인까지 증인으로 서 있으니, 더이상 사도들을 비난할 수도, 심문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제 그들을 가두고 심문할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대중들도 사도들이 놀라운 이적을 베풀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임의적으로 그들을 처벌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에게 공회에서 나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저 공회에서 풀어주는 것으로는 그들로 인해 백성들이 믿음을 갖게 되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개종할 것을 염려하는 종교지도자들은 더이상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처를 취하며, 사도들에게 경고합니다.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그것이 종교지도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조처였습니다. 그들은 40여년 동안 선천성 하반신 지체장애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 그가 치료를 받아,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영향력을 지키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과연 ‘누가 신약성경 시대에 더 효과적인 사역을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으로 표현된 사도들, 그리고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들로 표현된 산헤드린 공회원들, 즉 유대 종교지도자들, 이들의 대조를 통해 더 효과적인 사역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세상의 권위를 넘는 예수님과의 삶과 교훈을 통해 배움을 얻었던 사람들이었으며, 지금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은 아니었으나, 떠나시며 약속하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랍비들의 최고 학문을 배우고 터득한 자들로써, 로마와 결탁하여 대제사장의 직분을 얻고 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권력으로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태도의 차이는 사역에도 극명한 차이를 가져옵니다. 사도들의 사역으로 인해 40년간 걷지 못했던 선천성 하반신 지체장애인을 일어나 걷고 뛰게 되었으며, 구원을 얻었지만,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사역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원히 풀지 못할 율법의 멍에에 매여, 여전히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야 하며 계속해서 높은 종교성만 요구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도들을 보며, 이 시대를 책임지는 그리스도인인 우리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를 잘 이해하고 성령에 충만한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요구됨을 깨닫게 됩니다.
코로나19에 대한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한 몇몇의 한국 교회에 비춰, 사람들은 이제 한국교회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우리의 사역을 통해 손에 움켜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손에 권력이, 그리고 세속적인 가치가 움켜쥐어져 있다면, 이제 이 손을 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놓은 손에 예수님의 교훈과 하나님의 가르침이 담긴 성경을 붙잡고, 성령에 충만한 삶으로 사역의 자리에 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교훈을 따르며, 성령의 충만한 삶으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라오지 못하는 저급한 종교로 치부했던 우리를 보며 도리어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온전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기적의 간증들은 우리의 증거가 되어, 우리를 변호하며 우리의 옆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답변하는 제자들(19-22절)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종교지도자들의 그릇된 조처에 대해 제자들은 답변합니다.
(19-20)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사도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조처가 그릇되다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첫째, 종교지도자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권력자들의 제한된 권세보다 하나님의 한도 없는 권세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 권력자들의 기한이 한정된 권세보다 하나님의 영원한 권세가 더 먼저 염두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두 명 이상의 사람이 동시에 ‘보고 들은 것’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었습니다. 이 확실한 증거를 두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승천하심, 곧 복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기에 어떤 당근에도 회유될 수 없었고, 어떤 채찍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적을 통해 양식을 먹이시고, 육신의 고통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통해 병을 고치시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기적으로 통해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놀라운 사랑에 대한 확실한 경험이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베푸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멍에를 짊어짐으로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종교성을 따라가기 위해 삶을 쥐어짜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벼운 자신의 짐을 지라고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은혜의 선물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있기에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변호에 아무런 답변을 할 수 없었던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을 놓아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사도들의 담대한 선포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에게 벌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을 놓아주었고, 종교지도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또다시 위협을 선택했습니다.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의 권력 앞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사도들에게 이제 핍박은 자명한 일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받았던 박해를 떠올리면, 로마의 박해를 떠올리게 마련인데, 베드로와 요한이 겪었던 핍박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다양한 종교에 포용적이었던 로마가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한 것은 로마 대화재 사건 이후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와 요한의 초기 사역의 시기와는 일치하지 않으며, 그들이 받은 박해는 유대교의 핍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도들이 전하는 기독교가 구약성경을 온전히 계승한 신약을 믿음으로 정통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구약을 취하고 싶은 것들만 부분적으로 취하여 그 의미를 곡해한 유대교인들이 기독교를 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모독한다고 하거나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다는 식의 논리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이러한 핍박이 사도들에게 예고되어 있었지만, 사도들은 이를 담대히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담대한 사도들의 행보를 보고, 또 그들의 메시지를 들으며,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비록 핍박의 길을 간다고 할지라도 보고 들은 것은 전하겠다며, 담대히 곧은 길을 걸어갔던 사도들의 삶과 가르침을 보고 들은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더이상 예수님을 직접 보고, 예수님의 메시지를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직접 보고 들은 증인인 사도들의 글, 곧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간접적으로 보고 듣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서를 통해 우리에게 예수님과 그의 삶, 그의 가르침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를 통해, 이 모든 것이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 곧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사도들을 보고 들으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과 같이 이제 복음을 확증하고 선포하는 우리들을 보고 듣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받았던 핍박에 비춰볼 때, 이 시대에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삶은 오랑우탄에게 찢기고 던져지는 두리안이나 200도씨의 고온을 견디는 쉬오크 소나무나 뱅크스 소나무와 같이 고통과 아픔에 자리에 처하게 하거나 거절당함의 자리에 서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상황이 암울하고 절망적인 곳으로 나아간다고 할지라도 복음의 능력을 믿음으로 나아갈 때, 복음을 위해 사는 우리의 삶과 메시지를 보고 들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우리의 상황을 좌시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우리 사회를 위해, 온 인류를 위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행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들으며, 모든 사람들이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요한복음 18장과 사도행전 4장의 간극은 총 7장에 불과하고, 이 7장은 성경 전체 1,189장의 0.59%에 불과한 분량이지만, 그 사이 사도들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음을 묵상하며, 그 변화의 간극 사이에 성령의 충만함이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저희들도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살아간다면, 순간이라는 짧은 시간에도 저희의 삶이 완전히 바뀔 수 있음을 믿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게 하옵소서.
성령에 충만하여 복음을 위해 고난과 거절당함의 자리로 기꺼이 나아가는 저희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여 주시고, 저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모든 사람들이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목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기 전후 당신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묵상해 봅시다.
2.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일하심으로 다른 사람을 놀라게 하거나 도전을 주었던 경험이 있는지를 묵상해 봅시다.
3.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종교지도자들과 같이 여전히 당신으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럼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묵상해 봅시다.
4. 주님을 당신의 힘으로 삼아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삶을 살기 위하여 어떤 결단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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