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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사도행전(새벽)

사도행전 4:1-12

사도행전 4:1-12
찬송가 91장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사도행전 4장은 앞선 3장의 치유 사건과 베드로의 설교와 연결되지만 그 대상이 달라집니다. 3장이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였다면 4장은 제자들을 반대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기 위하여 습관적으로 성전에 올라가던 중,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을 고친 사건을 통해 모여든 사람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는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이들에 의한 핍박으로 연결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체포(1-4)
(1-3)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유대인 지도자들은 사도들 즉, 베드로와 요한의 가르침이 못마땅하였습니다. 그들이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을 걷게 만든 기적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모습을 이제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이르러’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적대적인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베드로와 요한이 군중에게 설교하고 있던 것을 중단시키는 행동을 묘사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하는 과정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관련되어 나타납니다. 먼저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들은 성전, 특히 제사에 관한 일과 유대인의 명절 예식 그리고 성전세 등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가진 유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로 ‘성전 맡은 자’입니다. 성전 맡은 자는 성전의 치안과 질서 유지와 관련된 제반 사항을 책임지고 있었으며, 성전 내에서 대제사장 다음가는 2인자에 해당하는 요직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를 체포한 것도 바로 이들이었습니다(눅 22:52-54). 마지막으로 ‘사두개인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의 관료 계층을 구성하는 제사장 문중에 속한 사람들로, 이들 중 대부분이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행동은 세 가지입니다. 먼저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칠 자격이 제사장들에게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선포한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다는 선언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부활의 선포가 문제였습니다. 베드로는 단순히 예수님이 부활하셨음 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바로 하나님의 궁극적 회복역사의 시작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전자는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관련된 문제이고, 후자는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과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대제사장들이 십자가형을 통해 죽인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유대인 지도자들의 심각한 실책을 통렬히 질책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로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을 당장은 처치하지 못하고 옥에 잡아 가둡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았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사도행전의 기자 누가는 1절에서 의도적으로 종교 지도자들과,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있는 백성들을 분리합니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대적할 때, 백성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4절은 이야기의 흐름을 중단하고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믿는’으로 표현된 단어는 ‘사실이고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 그리고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을 맡기다, 믿다, 신뢰의 대상에 전적인 헌신과 함께 신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자가 많았는데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투옥된 것은 분명한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것을 증인으로서의 삶을 위한 또 하나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고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모여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합니다.


공회 앞에 선 베드로와 요한(5-12)
(5-7a)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세 부류의 사람들이 이 공회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먼저는 ‘관리들’입니다. 이들은 6절에 열거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대제사장 문중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대제사장의 문중은 그들의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힘을 합하면 공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로들’입니다. 원로 관료들로 제사장들과 부유한 일반인들로 구성된 엘리트 유대인 집단입니다. 마지막으로 ‘서기관들’은 율법 전문가들입니다. 공회는 칠십명의 구성원과 현재의 대제사장이 모였습니다. 부를 소유하고, 학식이 높고, 예루살렘에서 막강한 힘을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이제 제자들도 이 공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6절은 대제사장의 문중과 관련하여 네 명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안나스는 로마 총독에 의해 임명된 첫 번째 대제사장입니다. 그의 다섯 명의 아들 또한 후에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로 예수님과 사도들, 스데반을 심문할 때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안나스 이후 18년 동안이나 대제사장 직을 수행했을 만큼 로마 총독의 마음에 들었던 존재입니다. 안나스는 원로 대제사장으로, 가야바는 대제사장으로 예수님의 재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민족을 위하여 죽음의 형벌을 내린 자에게, 이제 다시 그 사람만큼이나 영향력 있을법한 존재들이 나타났다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받으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발걸음을 눈으로 보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나도 따라가겠노라는 심정으로 공회 앞에 섰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7b)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할 때 들으셨던 말과 유사합니다.

(누가복음 20:2)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님을 대적하고 심문하였던 그들이, 이제 동일하게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재판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 부당한 판결을 내렸고, 결국 주님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정의로움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똑같은 운명을 당해야 하는지, 자신들 역시 로마 정부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에 무능력하고 겁에 질려있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감히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8-10)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지금 심문이 진행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에게 도움을 준 ‘착한 일’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유익을 끼치는 행위는 감사의 대상이지 심문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공회의 엄중한 질문 앞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베드로는 공회가 심문할 때 표현했던 ‘누구의 이름으로’에 정확하게 맞추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을 일으킬 때 사용했던 표현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와도 동일한 표현입니다.
이와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동시에 언급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선언하며 당시 가장 부유하고, 지성적이었으며, 막강한 힘을 가진 이들을 비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이름의 놀라운 능력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사도들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그들이 친숙히 아는 구약의 본문을 상기시키는 이야기입니다.

(시편 118: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지만 열방에게 버림받은 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있는 가운데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악한 포도원 소작인 비유의 결론으로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0:17-18)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이 비유를 통해서 고난 받으실 뿐 아니라 그 후 부활하여 이스라엘 집의 모퉁잇돌이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부활로 인해 실현되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이 모두 이루어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들이 깨지고 가루가 되어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위기에 처해 있는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종교 다원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기독교를 향하여 편협하고, 배타적이고, 교만하다고 손가락질 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타협과 양보를 보이며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얻을 수도 있는 것처럼 주장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가 두 가지 이상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진리는 교회가 정한 것이 아닌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가르침입니다. 교회가 인기를 위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다양성을 인정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은 구원은 오직 한 길뿐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늘 반대에 부딪힐 가능성이 있습니다. 구원 얻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선언은 결국 더 많은 반대와 핍박을 불러옵니다. 예수님에 관해 더 이상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는 명령을 거부하자 사도들은 더 많이 체포되고 매질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증인 된 우리는, 눈물 흘리더라도 끝까지 그 길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손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단 하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힘과 능력으로 인하여 오늘도 승리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끝까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쁨을 얻는 주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코로나19를 비롯한 우리를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상황 가운데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늘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살아가게 하여 주옵시고, 세상을 향한 바른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은 누구의 이름으로 이 모든 일을 행하였습니까?
3.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4. 유일한 구원의 길이시며, 힘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전하는 손이 되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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