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23-37
찬송가 366장 ‘어두운 내 눈 밝히사’
*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23-31절)
사무치듯 후회되는 날이 있습니다. “그때, 다르게 말하고 행동했다면 더 나아졌을까...” ‘만약’이라는 단어에 생각과 정서와 마음이 묶여, 과거에 매여 살 때가 있습니다. 현실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치명적 실패이자, 성공할수록 다시 무너질까봐 불안하게 만드는 하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초대교회에겐 그것이 ‘예수 십자가의 날’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당황했고, 도망쳤고, 숨었고, 부인하며, 멀찍이 서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완전히 무력했음을 철저하게 증명하던 위협과 폭력의 시간. “만약 그때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만약 예수님 옆에 끝까지 남아 함께 재판장에 섰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와 평안을 빌어 주셨지만, 그들은 혹시라도 다시 극한의 폭력과 공포를 마주하게 된다면 이전과 같은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걱정에 불안했을 것입니다.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렇기에 오늘 본문은 교회의 시작에 있어 중요한 지점입니다. 예수님의 재판장을 따라가지 못하고 도망쳤던 두 제자가, 성령을 받고 복음을 전하고 예수와 같이 되어 그와 같은 자리에 끌려갔다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폭력의 기운과 성난 말이 가득했지만, 베드로와 요한에게 그 법정은 예수 자리에 설 수 있는지 물어오는 ‘하나님의 두 번째 질문’이자 예수를 닮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였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고 말씀을 깨달아 울었던 밤을 잊지 못했기에(막14:72), 무덤을 향해 달리며 되뇌던 후회와 자책을 기억했기에(요20:3-8), 이제부터는 남이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던 예수님 말씀을 담아 두었기에(요21:18-19), 사람에 의해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려가거든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가르치실 것을 믿었기에(눅12:11-12), 마치 준비된 것처럼 물러서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예수의 길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의지였으며, 4장 13절은 이를 ‘담대함’이라 표현합니다.
그런데 죽을 각오로 들어갔던 그곳에서 살아 돌아옵니다. 전날 오후 3시경 성전 미문에 있던 선천선 하반신 지체장애인을 일으키고, 대중에게 장시간 설교했으며, 체포되어 구금된 후 산헤드린 법정에 소환되었기에, 긴장과 집중과 열정으로 몸의 진액이 빠진 상태였습니다. 사도들은 가장 힘든 그 때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습니다. 동료에게, 즉 교회를 향합니다.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는 대규모 회심으로 인해 수천 명이 넘는 규모였고(4:4), 성전 동편에 있는 솔로몬 행각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행2:46, 3:1, 5:12).
자신들이 끌려간 상황에서도 도망가지 않고 예수의 방식을 따라 기도함으로 저항하는 교회를 봅니다. 무사귀환을 애타게 구하는 사랑을 봅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위협은 오히려 교회를 하나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 감격으로 사도들은 법정 안에서 있던 대화를 전합니다.
한 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이르되(24-31)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13절에서 드러났던 사도들의 ‘담대함’이 확장되고 증폭되었고, 결국 31절은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고 증거합니다. 그 중심에는 초대교회의 기도문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용기가 복음 전파 운동이라는 큰 불길이 되는 비결. 바로 기도입니다.
(눅22:45-46)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눅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주님께서 죽음을 준비하시며 마지막 밤을 기도로 채우고 계셨을 때, 제자들은 슬픔에 짓눌려 잠들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고난에 대해 전혀 준비되지 않았던 제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을 뿐 아니라, 슬픔을 극복하고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고 권면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기도해 주시기에 시험을 이길 수 있음과 자신에게는 신앙의 형제들을 돌보며 굳게 세워줘야 할 책임이 있음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기도는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를 기억하면서 구체적으로 초대교회가 어떤 기도를 했는지, 조금 더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초대교회의 기도는 철저히 말씀을 붙잡고 말씀에 대해 응답했습니다. 먼저 ‘대주재’라는 단어의 원뜻은 ‘소유자’, ‘절대 통치자’입니다. 구약시대 남유다의 히스기야왕은 앗수르 침략이 임박한 때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대주재 하나님을 의지해 기도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받아들입니다.
(사37:16-20)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뜨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람을 보내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앗수르 왕들이 과연 열국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그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일 뿐이요 나무와 돌이라 그러므로 멸망을 당하였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니라
나아가 초대교회는 창조의 순간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했지만 하나님의 영은 그 세계 위에서 움직이고 계셨고,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창1:-5). 비록 지도자가 구속되어 법정에 끌려가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시간이었지만, 교회는 그 속에도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25-30)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세 번째로, 25절부터는 다윗이 기도했던 시편 2편을 근거로 예수 생애와 시대의 흐름을 해석하고, 고난을 통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붙잡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는 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렸습니다(눅3:22). 교회는 이 문구가 시편 2편 7절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기준삼아 예수님의 생애를 돌아보았습니다. 열방과 족속들은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으로,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은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로,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말씀을 재해석합니다(27절에서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라는 문구도 누가복음 23장 12절에서 예수님 심문과 관련해 헤롯과 빌라도가 협력했음을 기록했는데 이것을 예연의 성취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안락함을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29절에서 말씀 전파를 위해 ‘담대함’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30절에서 표적과 기사를 구한 것도 자기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이 전해지기 원해서였습니다.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을(29절) 준비하던 주의 종 다윗을 조상 삼아(25절), 초대교회는 ‘종들’이라는 단어를 자기정체성으로 삼았습니다(29절). 그들이 예수님 고난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갖게 되자, 자신들이 처한 고난의 상황도 바르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32-37절)
(32-37)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말씀에 근거해 기도로 신앙을 고백한다면, 말씀을 진지한 태도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게 됩니다. 초대교회는 자신을 이집트를 벗어나 사막을 지나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신명기 15장 1절부터 11절까지를 통해 명령하신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는 말씀을 구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재산을 팔아 어려운 성도의 긴급한 필요를 해결합니다. 유무상통(有無相通). 그들의 믿음은 구호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증언은 삶을 변화시킴으로 은혜를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눔의 은혜 가운데 ‘바나바’라는 위로의 지도자가 태어남으로 교회는 다음을 향해 도약합니다.
죽겠다고 들어간 법정에서 살아 돌아온 베드로와 요한이 목청을 높입니다. 죽어도 기도의 자리를 지키겠다고 성전에 모였던 초대교회가 생명의 기운을 받아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어떤 환경에서도 함몰되지 않으며, 어떤 삶의 자리에서도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용기와 연대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역사의 통로가 되어가길 소원합니다. 여전히 힘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말씀과 기도와 증언과 나눔과 연대에 힘쓰는 하루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실패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담대함이 기도를 통해 증폭되고 확산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때, 자기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같은 고백과 적용으로 하나된 것을 보았습니다. ‘종들’. 우리 또한 종들입니다. 날마다 이렇게 고백함으로 위협과 부족함을 기회 삼아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오늘도 말씀과 기도와 증언과 나눔과 연대를 위해 삶을 내어주기로 결단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 초대 교회의 담대함. 우리가 오늘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면 삶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 생각해 봅시다.
2. 초대교회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기도가 단순히 감정을 쏟거나 희망사항을 제안하는 시간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3. 좋아하는 말씀들을 적어봅시다. 그리고 그 말씀들이 ‘오늘의 내 태도와 감정과 시각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 봅시다. 한 구절이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여 기도하고 적용한다면, 삶이 바뀝니다.
4. 우리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헌신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초대교회가 신명기 15장의 말씀을 지나치지 않고 적용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을 기억하며, 우리가 지나치고 있던 말씀이 없는지 돌아봅시다.
5. 구역과 봉사팀과 교회와 '함께하기 위해 어디까지 나누어 줄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온라인으로 만나며 친밀감과 연대감을 유지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 어려운 시기에 함께함을 지킬 수 있는 ‘나눔’이 무엇일지 고민해 봅시다. 이 시대는 ‘바나바’를 필요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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