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2:41-52

누가복음 2:41-52
찬송가 216장 “성자의 귀한 몸”


오늘 본문은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유년 시절 일화를 다루고 있는 유일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한 날, 십자가를 지기 위해 홀연히 성인으로 나타나신 게 아니라 아기로 오셨고, 평범한 부모의 양육을 받으며 30년을 보내신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일상 속에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오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여망이 사라져버린 시대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아들을 보내시고 긴 세월을 준비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소년 예수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이 은혜를 깨달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경건한 공동체 속에서 자라나신 예수(41~45)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유대인 남자들은 1년에 세 번,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때면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해야 했습니다. 남자들에게는 의무였지만 신앙이 좋은 가족들은 함께 여행을 함께하기도 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직선거리로도 100km 정도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사마리아를 우회한다면 그보다 훨씬 더 먼 130km 정도로, 4-5일은 족히 걸렸을 거라 추정합니다. 목수가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직업도 아니었던 터라 요셉은 가진 것이 넉넉하지 않았을 것인데도 온 가족을 데리고 성전에 가는 일을 번잡스럽게 여기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서는 꼭 가야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의 남자 아이는 열세 살 때부터 토라를 지키는 의무를 부여받았지만 예수님은 열두 살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직 성전에 가야하는 의무가 주어지지 않은 열두 살의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갔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이 자발적이었고, 또 깊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계급이 재산의 정도와 비례했던 고대 사회에서, 목수라는 비천한 직업을 가졌던 요셉은 그리 풍족하게 가정을 꾸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생업을 중단하면서까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했다는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신앙의 의무가 주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먹고사는 문제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상충될 때,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일을 우선으로 두는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둘이 상충될 때, 오늘 요셉이 열두 살의 예수님을 데리고 생업을 중단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것처럼 내가 아닌 하나님 중심의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로는 신앙생활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때에 신앙적인 결정들을 포기해 버린다면, 결국 그런 결정들을 보고 자란 자녀들은 하나님을 떠나고 맙니다. 한두 번으로는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정들이 결국 그 부모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으나 실상은 하나님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사는 실천적 무신론자임을 드러내게 되고, 자녀는 장성한 후에 하나님을 떠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시간이 끝나면 수많은 결정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작게는 무엇을 먹을까부터, 어떤 직장으로 가야할까와 같은 중요한 결정들까지, 내가, 우리 가족이 하는 수많은 결정들이 하나님을 도외시한 채 나의 사사로운 영달과 이익을 위한 결정인지, 하나님의 백성다운, 주님을 위한 결정인지 꼭 판단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결정이든 사사로이 행한 나를 위한 결정은 궁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식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결정을 해나가는 오늘이 모여 우리의 삶이 될 때, 우리 삶이 주는 울림이 자식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그들의 삶을 말씀의 반석 위에 세우게 될 것입니다.
유월절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예수는 부모와 함께 있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를 알지 못한 채 나사렛으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하룻길 간 후 아들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부모는 친족과 아는 자들 중에서 아들을 찾습니다.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일행 중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함께 움직였을 것입니다. 같이 움직이는 사람들 중엔는 당연히 친족도 있었고, 혈연 관계는 아니지만 아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예수가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많은 사람들과 돈독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들은 먼 길을 함께할 수 있는 확장된 가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형편으로 바꿔 생각하면, 우리 아이가 당장 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친척이든 구역식구이든 믿고 맡길 만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믿는 사람들끼리 연대가 필요합니다. 함께 경건의 삶을 연습하고, 부족한 부분들을 서로 채우며, 말씀으로 함께 다듬어져 가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오늘날처럼 인간 관계가 피상적으로 흘러 다수와 관계 맺지만 관계의 질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는 시기에는 더더욱 이런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신앙은 삶과 유리될 수 없습니다. 살아가며 느끼는 문제의식들을 혼자서 해결하려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어떤 선택과 결정이, 어떤 인생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것인지 모색하는 공동체입니다. 정답이 없고, 아무도 앞을 모르는 상황에서 마음을 모아 앞으로 살아갈 길을 더듬어갈 때, 우리는 단절된 개인이 아니라 소통하는 믿음의 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로 모이기 어려운 때이지만 함께 거룩을 열망하는 공동체를 소망하는 믿음의 지체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인 줄 알고계신 예수(46-50)
아이를 잃어버리면, 왔던 길을 역순으로 되돌아가면서 찾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렇게 사흘을 찾아나선 끝에 성전에서 선생들과 대화하는 예수님을 찾아냈습니다. 부모가 성전을 떠나려할 때부터 줄곧 그곳에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46-47)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은 선생들과 함께 앉으셔서 토론하셨습니다. “선생들 중에”라고 표현된 “엔 메소”라는 표현은 사람들 한 가운데 위치했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듣는 사람의 하나로 그곳에 계셨던 것이 아니라 율법교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그들에게 둘러쌓인 채로 토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 곧 통찰력 있는 답변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놀랐다는 말 “엑시스테미”는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날 때 이를 목격한 사람들이 느끼는 경이감을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단순히 신동이다, 영재다 이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씀에 대한 이해력을 드러내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권능을 엿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러는 사이 부모가 예수를 발견하고 나무랍니다. 잃어버린 자식을 찾으면서 겪는 불안감과 초조한 마음을 드러내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자식으로서 부모의 동선을 따라야 했다는 당연한 룰을 어긴 것에 대한 꾸중입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원문에는 집이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우리말로 집이라 한 것은 의역이며, 지금 계신 곳이 성전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이 표현에서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른 사실입니다. 고대 유대 문헌들을 살펴봐도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표현한 적은 있지만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 적은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것은 상당히 독특한 표현으로, 성자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이며,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정확하게 어떤 길로 나아갈지 알고 계셨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세례 요한이 이미 태어나기 전,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자기의 역할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1:39-56), 열두 살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고,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명절에는 민란이 일어날까 염려하여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감추려고 했으나 우리 주님은 그 길을 묵묵히 걸으셨고,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주님처럼 자기부인의 삶, 하나님이 부여해주신 사명을 따르는 삶은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올곧게 한 길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그 부르심의 첫단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처음으로 스스로 밝힌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부활을 기리는 사순절을 보내며 주님께서 목숨 바쳐 지셔야 했던 십자가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던 것인지 생각해봅니다. 참 사람이셨던 주님께도 그 한 목숨이 참으로 소중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셨으므로 목숨을 쉽게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 사람이었던 그의 또다른 진면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명을 알고 이루는 길을 알아 행복했지만 그 길이 험난한 길이었기에 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 “십자가”에서, 주님을,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부르심 따라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작업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이 명제에 대해 답을 내리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부르셨는가에 대해 답을 내리기 어려워집니다. 지금 나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고 있는가 고민하고 기도하기 이전에,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셨으며, 지금도 함께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오늘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신 예수(51-52)
(51-52)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는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셔서 자기를 낮추신 우리 주님을 잘 드러내줍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때가 도래하기까지 부모에게 순종하고, 성장하신 것입니다. 이제 이후로 18년의 삶을 어떻게 사셨는지는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대가족의 맏이로서 목수였던 아버지를 도왔고, 요셉의 사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은 키가 자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짊어져야 할 인생의 무게에 대해 깊이 체감하는 시간, 오늘 본문에서 지혜로 표현된 통찰력을 기르는 시간을 가지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주님께도 이런 시간이 필요했다면, 오늘 우리도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련받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두 번의 실패에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긴 호흡으로 우리 인생을 조망하며 스스로를 훈련시켜 나가는 과정입니다.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습니다. 좌절은 필연입니다. 가야할 길이 멀지만 주님께서 사명을 향해 긴호흡으로 하루하루를 성실히 사셨음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실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하늘에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성인의 모습으로 뚝 떨어지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아기로 오셔서 자기백성들과 함께 자라나시고, 인생의 결핍과 노고를 경험하게 하신 오늘의 본문을 보면서 생각할 것들이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고 사명을 위해 준비되는 인생을 사셨던 것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정확하게 알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고, 불가피한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발로였음을 인식하고, 그 사랑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코로나19 종식을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진행 중이나 갈수록 지쳐만 갑니다. 책임 있는 시민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예수님께서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갔던 명절은 언제였고, 몇 살 때였습니까? (41-42)
2. 돌아가는 길에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부모는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44)
3. 열두 살에 불과한 예수가 성전에서 선생들 가운데 있는 모습을 보면서 느껴지는 점은 무엇입니까? (46-47)
4. 예수님이 이 땅에서 30년이나 자라면서 평범하게 사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는 무엇입니까?

'새벽기도 > 누가복음(새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3:21-38  (0) 2022.11.16
누가복음 3:1-20  (0) 2022.11.16
누가복음 2장 21-40절  (0) 2022.11.16
누가복음 2장 21-40절  (0) 2022.11.16
누가복음 2:1-20  (0) 2022.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