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4:16-30
찬송가 151장 '만왕의 왕 내 주께서'
회당에서(16-21절)
광야에서 시험을 마친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십니다.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예수님이 가신 회당은, 과거 바벨론 포로 생활 당시, 예배를 드리지 못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린 모임이 발전한 것입니다. 당시 문헌에 따르면,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는 다음과 같은 순서를 가집니다. 먼저 쉐마(이스라엘아 들으라)인 신명기 6장을 복창했고, 이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오경과 선지서를 읽고, 이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회당에서는 그 지역의 방문자들에게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기회를 맡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아마도 회당 사람들은 고향사람인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소문 때문에, 성경을 읽고 설교할 기회를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글을 전달받았습니다. 당시 성경은 지금처럼 책이 아니라 두루마리였습니다. 이사야의 두루마리는 1장에서 66장까지 기록된 것으로, 두루마리를 모두 펼치면, 무려 8m 40cm였습니다. 성경 읽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본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정해진 본문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17절을 보면, 예수님은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셨다’고 합니다. 마치 이것은 예수님이 일부러 이사야 61:1-2을 찾으신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 쓰인 헬라어 원어가, ‘우연히 만나거나, 자연스럽게 발견하다’는 ‘휴렌’이란 단어를 썼기 때문에, 예수님이 일부러 다른 본문을 찾아 읽은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날 정해진 이사야61:1-2을 읽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은 두루마리 성경을 읽고, 맡은 자에게 성경을 건네주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과연 어떤 말씀을 하실지, 기대하며 주목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상세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은 이사야 61장에 대한 설교를 충분히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 말씀을 들은 회당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도 긍정적이었습니다. 22절에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큰 감탄을 하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받은 감탄과 은혜가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사야 말씀을 전하면서, 21절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무슨 말입니까?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가 ‘바로 나’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더불어 구약의 모든 말씀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성취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회당 사람들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합니다. 22절 후반절을 보면,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말하며, 앞서 받았던 은혜는 사라지고,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란 것에 초점을 맞추며 적대적인 반응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우리가 너를 그동안 알고 지냈는데, 더구나 나사렛 동네 출신인데, 네가 무슨 메시아냐?’ 이런 반응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은 어떤 곳입니까? 나사렛이 이스라엘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이라는 얘기가 많은데, 이 지역을 가장 쉽게 이해하는 핵심 구절이 바로 29절입니다.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라는 표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상상이나 되십니까? 어떻게 마을이 낭떠러지 위에 조성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말 그대로 산동네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당시 귀족들은 경관을 위해, 낭떠러지 인근에다 별장이나 집을 짓는 경우는 있습니다만, 나사렛은 마을입니다. 평지가 아닌 높은 곳에 조성된 마을은 당시 기반시설도 썩 좋지 않는 산 동네임을 의미합니다.
배척의 이유(22-30절)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나사렛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적대적으로 배척했는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은 다름 아닌, <선입견과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어도, 예수님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으로 인해, 그 은혜가 소멸되었습니다. <선입견과 편견>은 단순하고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근원은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선입견과 편견의 기준은 내 자신입니다. 내 자신이 기준이 되어 상대방을 주관하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큰 교만입니까?
잠21:24에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고 지칭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며, 요셉의 아들’이란 선입견과 편견으로 인해,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 안에 잘못된 선입견과 편견은 은혜를 받아도, 지속되지 못하게 만듭니다. 또한 그것으로 인해 내 주변인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만들어, 상처와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선입견과 편견은, 결국은 나 자신도 패망하게 만드는 악의 근원입니다.
복음은 <선입견과 편견>을 사라지게 합니다. 예수님이 읽으신 사61:1-2은 메시아가 와서 불행과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자들을 해방시킨다는 아름다운 소식이었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 결국 내 삶에 존재하는, 교만함인 선입견과 편견을 무너뜨리신다는 것입니다. 선입견과 편견으로 사로 잡혀 있는 모습, 선입견과 편견으로 눈이 먼 모습, 또 그로 인해 눌려 있고, 패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주의 은혜로 회복시켜 주신다는 선포입니다.
25-27절에, 예수님은 구약의 유명한 선지자인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를 실례로 들어 배척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만난 시돈의 과부, 엘리사가 만난 아람의 나아만 장군. 모두 이방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입견과 편견의 교만한 죄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에게로 흘러가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28-29)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예수님은 그들의 정곡을 찔러 지적하셨지만, 그들은 회개는커녕, 도리어 분노와 적의를 나타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쫒아내었고,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린 중요한 것 하나를 볼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말씀이 ‘들어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내 마음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들을 때, 회개하면 그 마음에 말씀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화를 내면, 그 안에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창4장에서 가인은 질투심에 동생인 아벨을 살해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냐고 물으십니다. 이때 하나님이 가인에게 물으신 것은, 동생의 행방을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인의 죄를 지적하여, 그가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가인은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화를 냅니다. 행7장에서도 스데반이 유대 지도자들에게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하지만, 그들 역시 모두 크게 분노하며 일심으로 달려들어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들을 때,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잘못 한 것을 알기에 부끄럽고, 잘못에 대한 정당성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입니다. 둘째로, 타락한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책망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 책망을 감사하고 귀중히 여기셔야 합니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여러 가지 많은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답답한 마스크를 착용하고, 외출도 삼가며, 철저하게 손을 씻는 등 위생에도 예전보다 더한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또 의심증세가 있는 분들은 힘들게 자가 격리를 해야 합니다. 저 역시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코로나로 인해 극장에 가지 못한지 3달이 넘었습니다. 이렇게 일상에서 불편을 감수하면서 다들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코로나19의 종식을 위한 것입니다. 더불어 내가 전염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아니면 나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조심하고 관리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상황에서 곰곰이 한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보이지 않는 작은 병균인 코로나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 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처럼, 과연 나는 삶의 보이지 않는 죄와 싸우기 위해 철저하게 싸웠는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고, 인내하면서까지 코로나 예방을 하고 있는데, 반대로 죄와 싸우기 위해 스스로 불편을 감수하면서 인내 한 적이 있는가?’ 그 죄로 인해 나도 영향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도 죄의 영향이 가는 것을 알면서도, ‘코로나를 미워하고 싸우는 만큼 죄를 미워하고 싸우지 못했구나.’라며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잠언 8:13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기 위해, 죄를 미워하고. 철저히 싸우는 습관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낭떠러지에 몰려 죽을 위기에 빠진 예수님의 상황을 기억합시다. 그런데 30절을 보니,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즉 유유히 지나가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그 사람들에서 벗어나셨는지 말입니다.
성경에는 그것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출14장의 홍해사건을 떠올렸습니다. 이집트 군대가 쫒아오는 위기의 상황에서, 홍해를 갈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건너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기적처럼. 낭떠러지에 가까이 갔던 예수님은,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을 홍해처럼 가르고, 그들 가운데로 유유히 걸어가지 않으셨을까? 란 추측을 말입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압도당해서 가만히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근데 예수님이 이 상황을 어떤 방법으로 이겨내셨던지 간에, 이 구절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큽니다. 우리 삶에도 낭떠러지에 내몰리는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최근 코로나 사태로 인해 경기가 안 좋아, 직장에서 무급휴가를 받게 되고, 운영하는 사업이 안 되며, 결혼이나 여러 계획들이 무너지고 손해를 보는,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 같은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낭떠러지의 위기에서 벗어나신 분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절대 삶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두 팔로 꼭 붙잡아 주십니다. 시편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0절에서 ‘가시니라’의 원어적 의미는 ‘가고자 하는 길을 계속 가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명대로 가야할 길이 있으셨습니다. 낭떠러지에 몰리거나, 해치려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것을 뛰어넘어, 구약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정해진 길을 가시고, 결국 완수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시는 고난의 길을 가고자 하셨기에,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가지 않으셨더라면,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었을 것입니다.
내 삶에 낭떠러지 같은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큰 위기에 처해있을지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이미 내게 주신 말씀을 이루시기로 작정하셨기에, “가시니라”로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와 동시에 우리는 주님처럼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선입견과 편견을 내려놓은 길입니다. 또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을 품어주고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힘쓰는 것만큼, 삶에서 영적으로 부단히 노력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성숙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 도
하나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선입견과 편견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선입견과 편견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는지 저희 자신을 뒤돌아봅니다. 이제는 그 선입견과 편견과 같은 죄를 내려놓기 위해, 영적으로 부단히 노력하는 삶이 되게 하시고, 내 삶에서 낭떠러지에 내몰리는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손 내밀어 그 위기에서 건저주시고, 우리가 가야할 할 길을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옵소서. 부활주일을 하루 앞 둔 오늘, 나를 살리시기 위해 그 고난의 길을 가신 주님을 묵상하는 하루가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내가 갖고 있는 선입관과 편견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2. 나의 선입견과 편견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경험이 있는지 떠올려봅시다.
3. 코로나19처럼 죄와 싸우기 위해 필요한 노력이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4.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 같은 삶의 위기에서, 주님께서 도우신 간증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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