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5:17-39
찬송가 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누가복음 5장은 크게 네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1절에서 16절까지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셨던 이야기와 한센병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공통적으로 자신의 지식과 경험들을 내려놓고 예수님 앞에 간절히 엎드렸을 때 큰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5장의 17절부터 39절까지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야기, 예수님께서 직접 레위를 부르시고 식탁교제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심 (17-26절)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행하신 여러 이적들로 인해 연일 헤드라인 뉴스의 1면을 장식하셨기 때문에 종교적 권력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에는 인터넷으로 예수님의 영상을 다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갈릴리 각 촌에서 예수님을 직접 찾아왔습니다. 유대와 예루살렘만큼 먼 지역에서도 그들이 들은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기 위해 찾아 왔습니다.
(18-19)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당시 예수님 주변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풍병자를 고치기 위해 너무도 간절했기에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중풍병을 고칠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과 간절함은 적극적인 행동을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지붕까지 침상을 메고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침상째 환자를 아래로 달아 내렸습니다. 너무 극단적인 방법이지만, 그들의 간절함을 볼 수 있습니다.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사람들은 깜짝 놀랐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주님은 병 고침이 아닌 죄 사함에 대해 선언하십니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신성 모독이라는 겁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 사함을 어째서 당신이 하느냐고 수군수군 거립니다. 그 때 주님은 그들에게 다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주님은 단순히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병자의 몸만 고치신 것이 아닙니다. 죄 사함을 통해 그의 혼이 온전하게 되고 그의 삶이 온전해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단순히 육신의 의사가 아니십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온전히 고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죄의 용서함을 받을 때 주님은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그 집 안에 있던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예수님을 통해 놀라움을 넘어서서 두려움, 경외감까지 느꼈습니다. 이 경외감은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예수님을 보고 나타난 감정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서 실제로 기이한 일을 행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킨 것은 침상을 들고 지붕까지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침상을 내리는 그 친구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친구들의 믿음에 반응하여 그 사람을 낫게 해 주시고 죄사함까지 선언하셨습니다. 좋은 방향이든지 나쁜 방향이든지 주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힘들고 불가능해 보이는 여러 상황 속에 처했을 때, 삶 속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겠습니까? 중풍병자가 예수님으로부터 죄사함과 병고침을 받는 역사는 그냥 그렇게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변 친구들을 통한 믿음의 결단과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도전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은 안전한 곳에서 편안한 상황 속에서 성장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안전한 곳을 떠나서 도전 하려고 할 때, 익숙한 곳을 떠날 때, 자신을 제한하는 모든 한계의 장애물들을 이제는 넘어서려고 몸부림 칠 때, 우리는 새로운 은혜를 경험 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의 열정을 통해 지붕위에 올라가서 지붕도 뚫고, 중풍병도 고침받고 죄사함의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레위를 부르심과 식탁교제 (27-39절)
(27-28)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마태는 레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대부분은 이름을 서너 개씩 갖고 있었습니다. 즉 유대식 이름과 로마식 이름, 때로는 헬라식 이름도 따로 있었습니다. 레위는 유대식 이름이었고 마태는 로마식 이름입니다.
레위는 세리로서 로마시대 유대의 헤롯 왕을 위해 일하는 유대인입니다. 가버나움은 북동쪽으로는 다메섹과 서쪽으로는 지중해 사이의 대상로에 있는 세관 지역입니다. 레위는 마을을 통행하는 여러 상인들과 일반 백성들에게도 많은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중오 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속이는 일로 악명이 높았고 로마를 지지하며 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이방인들과 끊임없이 접촉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리들은 그들이 임의로 정한 세금에 따라 수수료를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세리들은 사람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높은 이득을 취하였습니다. 따라서 세리가 된 유대인들은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의 수치였고 회당에서는 출교가 되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의 모든 사람들은 세리 레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통행세를 지불해야 하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그를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세관의 높은 곳에 위치한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이때 처음으로 레위를 보신 것은 아닐 것이며, 레위도 예수님을 이미 본적이 있고 예수님의 소문을 익히 들어서 예수님께 관심을 갖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이 레위의 세관 앞까지 찾아 오셔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레위는 미처 생각하며 대답할 시간도 없었을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요청이 아니라 명령이었습니다. 권유가 아니라 부르심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것은 예수님이 걸어가는 대로 똑같이 따라오라고 하신 겁니다.
그 때 레위는 일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레위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고 욕먹으면서도 끝까지 붙잡고 있었던 많은 돈을 안겨주는 세금징수 일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레위의 돈에 대한 멍에를 깨뜨려 주셨습니다.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린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레위에게 세금징수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레위가 세관을 버려두고 떠났다는 것은 평생 보장되는 큰 재물을 버리고 떠난 것입니다.
아무리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도 그 마음에는 자신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 영혼의 갈망을 보시고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레위야, 그렇게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 나를 따라 오너라.”
지금의 우리들도 돈의 멍에에 매여서 참 힘들게 살아가며, 코로나19와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온전히 좇아서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할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29-30)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레위는 이제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친구들을 불렀는데, 전부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그 자리에서 오고가는 대화가 얼마나 세속적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훈계도, 설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그들과 더불어 즐겁게 식사하셨습니다. 그들의 가족,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현장을 보고 비난합니다. 랍비라는 자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도, 금식하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합니다.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금식은 기도하기 위하여 음식을 먹지 않고 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1년 중 단 하루를 모든 유대인들이 금식하는 날로 규정합니다. 그 날은 대속죄일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도 금식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제자들도 그들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와 같은 금식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말했지만 그 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비난도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금식하고 기도해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먹고 마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어찌 신랑과 함께 있으면서 금식하겠느냐고 말하십니다.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낡은 옷을 살리겠다고 새 옷을 찢어서 붙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주의라는 낡은 옷은 예수님의 파격적인 은혜라는 새 옷을 감당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합니다.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부대가 터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자체가 파격입니다. 영원한 시간 속에 임하는 것도, 기적이 일상에 나타나는 것도, 하나님의 임재가 죄인들에게 나타나는 것도 전부 파격이며 새로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한다면, 새 부대를 준비하고 마음을 새롭게 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기대한다고 하면서도 우리 스스로 정작 새 부대를, 새 마음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주님이 은혜를 부어 주시려고 해도 부대가 낡아져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셔도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예수님을 맞이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 하겠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기 위해 침상을 들고 지붕까지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침상을 내렸던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우리가 어떤 현실적인 장애물들을 만나게 되더라도, 거기에 안주하며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겁니다. 그 상황들을 바꾸어 나가기 위해 계속해서 몸부림치고 도전하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러할 때에 예수님의 큰 은혜가 임할 줄을 믿습니다.
세리였던 레위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지금의 우리들도 참 많은 문제와 어려움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늘 우리가 무익한 종일 뿐임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말씀 가운데 순종하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 가려고 할 때, 우리에게 평안과 소망이 있음을 믿습니다. 늘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부대를 준비하는 ‘나의 힘이신 여호와’를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리였던 레위처럼 우리들은 물질 앞에서 참으로 이기적이었으며, 나의 안위만을 위해 살아갈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중풍병자이며 늘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무익한 종일 뿐임을 고백하며, 납작 엎드리겠습니다. 어떠한 현실적인 문제와 어려움들을 만나게 될지라도 현실 속에 안주하지 않게 하시고 극복 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늘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부대를 준비하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 가운데 있는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있을 21대 국회의원 선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있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선출되게 하옵소서. 이 땅 가운데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당신은 말씀속의 ‘중풍병자’처럼 회복 되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중풍병자’를 도운 친구들처럼 당신에게는 주변에 돕는자들이 누가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3. 삶의 장애물들이 있을 때, 현실 속에 함몰되지 않고 지붕 위로 올라가기 위해 당신은 어떠한 노력을 해야겠습니까?
4. 레위가 예수님을 따를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 새 부대를 준비하기 위해 변화 되어야 할 부분은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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