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12-26
찬송가 427장 ‘맘 가난한 사람’
12제자를 사도로(12-16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 중에 12명을 사도로 세우신 일과 평지에서 말씀을 전하신 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2-16절이 제자 중에 12명을 사도로 세우신 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때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6:1-11에서 두 번의 안식일 논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이삭을 손으로 잘라 먹은 일로 인해서 바리새인들이 ‘하지 못할 일을 했다’라며 시비를 걸었습니다. ‘하지 못할 일’은 ‘남의 밀 이삭을 따서 먹은 일’이 아니라,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안식일에 타작을 했다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자기와 함께 한 사람들이 진설병을 먹은 일을 말씀하시며, 안식일을 어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때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것이 안식일을 어긴 것이라며, 시비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말문이 닫히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분노가 가득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지 의논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계략을 꾸몄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이 때에’는 예수님에 대한 반대가 점점 고조되고 있을 때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이렇게 증거합니다.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반대자들의 위협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서도, 기도하시기 위해서 산으로 향하셨습니다. 이 기도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함께 사역하고, 당신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당신의 뒤를 이어서 생명의 사역을 이어갈 사도들을 선택하시게 됩니다.
누가복음의 특징 중의 하나는 ‘기도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사도로 부르시는 장면은 공관(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모두 전하지만, 기도하시고 택하셨다는 것은 누가복음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그렇게 기도하셨다면, 우리 역시 기도를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신실하게 살기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치고, 기도가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 기도의 깊이와 넓이는 우리 신앙의 성숙과 정비례합니다.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신 후에 제자 중에서 열두 명을 불러서 그들을 ‘사도’라고 칭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중에서’ 열둘을 택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이 열두 명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상당수의 남자와 여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따를 수 있었다는 것, 그것만 해도 큰 복입니다. 그중에서 열두 명으로 택함을 받은 것은 말할 수 없는 은총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게 되고, 주님께 쓰임을 받는 것은 정말 큰 은총입니다.
그 열두 명의 이름이 이러합니다.
(14-16)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흔히 베드로는 제자 중에서 ‘수제자’로 불립니다. 그것은 그가 가장 연장자로 보이기도 하고, 제자 중에서 유일한 기혼자였고, 성격이 급해서 누구보다도 말과 행동이 앞섰던 것도 한몫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반면에 안드레는 제자 중에서 가장 먼저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에 관한 것은 공관복음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는 주로 연결하는 역할을 잘했습니다.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한 사람도 안드레였고, 사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유일한 표적인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날 수 있도록, 보리빵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온 사람도 안드레였습니다.
또한 야고보와 요한도 형제인데, 베드로-안드레 형제와는 달리, 이 둘은 닮은꼴이었습니다. 이 둘은 성격이 모두 급하여, 별명이 ‘우레의 아들’이었습니다. 또한 불타는 야망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신들을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즉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등극하면, 자신들을 ‘우의정’과 ‘좌의정’의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고보는 사도 중에 첫 순교자의 제물로 받으셨고, 요한은 마지막까지 살게 하여서 산 순교자로 받으셨습니다.
빌립과 바돌로매(나다나엘)는 친구 사이였는데, 빌립은 신중하고 이성적이어서, 예수님께 5,000명의 사람을 조금씩이라도 먹이려면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바돌로매(나다나엘)는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편견이 있었지만,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마태(본명은 레위)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던 세리였음에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도마는 흔히 ‘의심 많은’이라는 수식어가 붙곤 하는데, 그는 의심이 많았다기보다, 주님을 더 제대로 알고 싶어서 질문이 많았던 사도였습니다. 또한 도마를 ‘디두모라 하는 도마’라고 하는데, ‘디두모’는 ‘쌍둥이’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빌립과 바돌로매(나다나엘)는 친구 사이인데 같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쌍둥이 임에도 혼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참 신비합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은 성경에 이름만 나오고, 그들의 삶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도 주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인물, 야고보의 아들 유다(다대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는 이름이 같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은 삶을 산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은 주님의 제자로 남았지만, 또 한 사람은 배신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명을 남긴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격 없는 사람을 제자로, 사도로 삼으시는 주님의 부르심은 참 신비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주님의 제자에, 주님의 사도에 걸맞게 되는 것입니다.
평지수훈-4복과 4화(17-26절)
17-26절은 평지수훈이라고 불리는 부분 중, 복과 화를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전하신 말씀이라고 하여 ‘산상수훈(Sermon on the Mount)’이라고 불립니다. 반면에 누가복음 6:17-49은 ‘평지수훈(Sermon on the Plain)’이라고 불립니다. 17절에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라고 증거하고, 7:1에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라고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1-12에는 ‘8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 17-26절에는 ‘4복과 4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7-19)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산상수훈은 세 장, 111절이나 되지만, 평지수훈은 33절로 짧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기 전에, 예수께로부터 능력이 나와서 여러 병자를 고쳤다고 증거합니다. 그것은 이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이 전능하신 분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고, 부요한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함’과 ‘부요함’은 단지 물질의 많고 적음을 표현하는 말은 아닙니다. 욥도 부자였고,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다윗도 부자였고, 예수님께 무덤을 제공한 아리마대 요셉도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의 신실한 통로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자’는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힘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보다, ‘자신의 나라, 자신의 제국’을 누리려고 합니다.
동일하게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만을 자기 힘으로 삼는 사람,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21a)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25a)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주린 사람’은 가난한 사람처럼, 단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자기 스스로 채울 수 없음을 알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주린 사람이 얻는 복이 ‘배부름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이 문장은 수동태입니다. 즉 자기 스스로 자기 배를 부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힘이 배부르게 해 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외부의 힘_하나님’만이 배부르게 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배부른 사람’도 어떤 사람인지 자명해집니다. 배부른 사람이란, 단지 음식을 많이 먹은 상태에 있거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재물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어도 자기 인생을 자기 혼자서도 잘 꾸려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스스로 힘만으로도 인생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주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믿음이란 ‘하나님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세속적 가치관으로 만족할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21b)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5b)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우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죄에 대한 울음입니다. 자신에게는 도저히 소망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고, 자기 속에는 결코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웃는 사람’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인생을 의미 있게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스스로의 능력으로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런 사람은 마지막 때에 영원한 울음을 쏟아 내게 될 것입니다.
(22-23)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얻을 수 없으니까 과욕을 부리지 말라고 주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라면, 이 말씀은 처세술일 수는 있어도, 진리는 아닙니다.
구약성경에는 여러 선지자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나 엘리사 선지자에게는 여러 기적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선지자는 기적을 행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듣지 않으니까 “하나님 이제는 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더니, 그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 늘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진리를 행하다가 고난을 받게 되면 그것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바르고, 진실하게 살면 세상 사람들이 박수를 쳐 주기보다, 시기하고 반대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큽니다.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은 동일하게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일터(학교)를 오가는 것도 같고, 가정생활 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을 자기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중에서 열둘을 사도도 부르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부활의 증인으로, 하나님 나라의 통로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그 삶을 신실하게 살아감으로, 복음이 2천 년 동안 이어져, 오늘 우리에게까지 왔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종과 사도로 살아, 오늘 하루 주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한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는 사도로 보낼 사람들을 제자 중에서 열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세상적으로는 부족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시기 위해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렇게 부족하고 연약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주님의 통로로 삼으셨기에, 우리같이 형편없는 사람들도 불러 주심의 대상이 됨을 감사합니다.
바라옵나니,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우리가 가진 것을 힘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심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는 한없이 절망스럽지만, 우리를 영원히 배부르게 하시고, 영원히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소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진리를 따라서 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비록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하나님을 목적 삼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우리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종으로,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예수님께서는 밤이 새도록 기도하신 후에, 제자 중에서 사도 열둘을 선택하셨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까?
2. 예수님은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박해를 당할 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은총이 삶 속에 깊이 되새겨진 때는 언제였습니까?
3.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부요하고, 배부르며, 웃고, 모든 사람이 칭찬하면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오류에 유혹이 된 적이 있다면, 그때는 언제이었습니까?
4. 주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가진 것을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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