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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11:37-54

누가복음 11:37-54
찬송가 433장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정결례를 따르지 않으신 예수님(37-41)
앞선 문맥에서 예수님은 당시 세대를 가리켜 악한 세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오늘 본문은 그 현장에 있었던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마도 종교적 열심에 충만한 자신과 같은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비난에서 비켜나 있어, 이 세대에 속해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종교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만큼 이 세대를 바라보는 눈에서 예수님에게서 동질감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자신을 초대한 바리새인과 함께 초대받은 사람들을 향해 여섯 번에 걸쳐 “화 있을진저”라고 저주를 선포하십니다. 앉아서 2, 30분 만에 후다닥 먹고 각자 갈 길 가는 그런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음식을 나누며, 교제하는 데 꽤 긴 시간을 할애하는 그런 식사 자리였습니다. 이런 자리 초입부터 주님은 손씻기를 거부하십니다.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이상히 여기다”의 헬라어 “싸우마조”는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을 맞이했을 때 놀람을 동반한 황당함을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6절에서, 은혜의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편지의 수신인들을 향해 이 단어를 사용하여,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말한 바 있습니다. 단순하게 이상하게 여긴다는 말에 더해서 비난의 논조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손씻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바리새인의 시선에도 비난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손을 씻지 않으셨겠습니까? 1세기 당시 사람들에게 식사 때에 손을 씻는 것은 단지 위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함을 유지하지 위한 정결례로 취급되었습니다. 건강하기 위해 손을 씻어야 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음식을 먹기 전, 손을 씻어야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다는 교리적인 가르침이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손씻기와 관련해서는 마가복음 7장에도 나오지만 이 규례는 단지 “장로들의 전통”에 속했던 것일 뿐 하나님의 말씀, 곧 구약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부러 손을 씻는 정결례를 따르지 않으시고, 의도적으로 거부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자연스럽게 따르고, 또 모두가 따라야 한다고 해석하고 가르친 장로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으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더러운 내면을 지적하십니다.

(40-41)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드러난 외면을 깨끗하게 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인 반면 사람 안의 더러움, 곧 내면의 더러움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탐욕과 악독이 가득찬 내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잔과 대접의 겉만 깨끗이 하는 바리새인의 이중성을 예수님이 지금 통렬하게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말씀을 탐구하는 것도 좋고, 말씀을 내 삶의 현장에 효과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위계화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지나쳐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말씀의 참된 뜻에서 벗어나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며, 내면의 정결함은 도외시한 채 겉의 정결함만을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중요한 것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었고, 사소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둔갑시키는 우를 저질렀습니다. 이런 잘못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충분히 반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는 모든 일을 종교적인 영역으로 확장시켜 모든 일을,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로 구분하는 장로들의 유전이 오늘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말씀의 참된 정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는 마음은 갖지 못한 채, 그저 말초적이고 지엽적인 계명 준수에만 목숨 건다면 우리도 예수님께 비판받았던 바리새인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도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끊임없이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위로를 얻고, 자신을 꽤 괜찮은 신앙인으로 착각하는 경향입니다. 반대로 나와 같은 생각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 나처럼 열심을 내지 않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경멸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당시 세대를 향해 뼈아픈 비판을 가했음에도 식사 자리에 초대한 바리새인을 보면, 우리는 이 세대와는 다르다는 알량한 교만이 느껴져서 대단히 불편합니다.
아무리 고고한 척해도 하나님 앞에 죄인일 뿐입니다. 은혜를 구걸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우리만의 자의적인 규칙들, 본문에 드러난 손씻는 것과 같은 규칙들이 있다면 버려야 합니다. 이걸 붙잡고 있으면 정작 붙잡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식사 자리에는 예수님만 초대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포함하여 45절의 율법교사를 비롯한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어리석은 자들”, 곧 바보라고 꾸짖으십니다. 연이은 12장 20절에 내일 일이 어찌될지 알지 못하는 부자 농부를 향해서도 “어리석은 자”라고 꾸짖으신 바 있는 예수님은 그 어리석음을 탈피하는 방법 중 하나로 구제를 예로 드셨습니다.
구제는 측은지심에서 나오는 인간적인 차원의 행위가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내 밥그릇에서 밥 한 술 덜어 다른 이에게 준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떠올린다면, 구제는 자기희생을 필연적으로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일도 말씀에 나와 있듯이 구제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42-54)
예수님께서 연이어 “화 있을진저”를 외치십니다. 이는 예전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고발할 때 주로 사용했던 언어이며, 재앙을 경고하는 저주와 비슷합니다. 현재 행동이 계속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나 회개하고 즉시로 돌이킨다면, 파멸을 피하게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박하와 운향과 같은 향신료처럼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들의 십일조까지 일일이 챙기면서도 정작 중요한 공의를 저버리는 것을 고발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십일조를 세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공의를 행하지 않는다면, 그가 하는 십일조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씀 따르는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공의를 행하는 일, 곧 자신의 재물의 많은 부분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지 못할 때, 이 땅의 헛된 명성만 갈구하는 어그러진 길로 행하게 됩니다.
 
(43-44)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회당에서 높은 자리는 회중과 분리되어 높은 지위의 사람들만 앉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회당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강론하여 그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장소였지만 바리새인들은 본연의 목적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아있기 위해, 그들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회당을 출입했습니다. 이런 오염된 인식을 가진 바리새인들은 주님으로부터 평토장한 무덤, 곧 겉에서는 전혀 무덤인 줄 모르는 봉분을 갖지 못한 무덤과 같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민수기 19장 16절에는 무덤과 접촉하면 7일 동안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따라서 서로를 부정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이스라엘은 무덤을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주의 깊게 표시를 해놓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평토장한 무덤은, 겉에서는 전혀 무덤인 줄 알기 못하기 때문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부지불식간에 부정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오히려 다른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기 때문에 그들의 인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멸망으로 치닫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적 경건 행위가 아무리 세련되고 그 뜻이 좋아보인다고 해도, 결국 사람의 뜻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지려고 했던 짐이 너무 무거워 결국 아무도 지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하나님은 절대로 자기 백성에게 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워 지레 포기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압적으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 말씀이자 그 말씀대로 사는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신 예수님과 달리 바리새인들은 그 짐을 지지 않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할 뿐, 삶에서 실천이 전혀 없었다는 고발입니다.
실천이 없으니 지난 삶에 대한 성찰이 있을리 없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지 들여다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저 선대로부터 배운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배운 그대로 답습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다 오늘 주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보면 박해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한두 명을 죽인 게 아니라 51절에 언급된 대로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입니다.
 
(50-51)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아벨은 최초로 죽임 당한 의인이며, 사가랴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로, 말씀을 근거로 백성들을 고발했다가 돌에 맞아죽은 제사장입니다. 사가랴의 죽음이 기록된 역대하는 당시 구약 정경순서상 가장 마지막책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벨부터 사가랴까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알파와 오메가와 비슷한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담지자, 선지자들이 핍박 받고 고난 받은 역사가 계속되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마저 핍박합니다. 종교적 열심이 성찰의 힘을 잃어버리고 집단화될 때 이토록 위험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릇된 종교적 열심이 빚어낸 아픔입니다. 나만 옳지 않습니다. 과도한 자기 맹신에 빠져 산다면, 절대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치명적 실수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독점하되 자신도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율법교사들이 가진 지식의 열쇠는 성경 해석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인도되도록, 의의 길을 걷도록,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학자들의 그릇된 해석으로 인해 그들도,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도 모두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 머무시며 불의한 평화를 이루고, 그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사셨다면 오늘과 같은 말씀을 하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주님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적에 충실하게 사셨고, 식사 자리에서조차 이를 잊지 않았습니다. 옳은 일을 하다보면, 바름을 추구하다보면, 때로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툼의 여지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루를 살아도 보내신 목적에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당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야합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보여주셨던 주님의 결기를 본받기 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대로 해석하고,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많은 이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복된 삶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말씀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열어주신 복된 길,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우리의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구제하는 데 인색하지 않는 심령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 쓰임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예수님께서 손씻기를 거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38)
2. 화 있을진저 여섯 곳을 찾아 바리새인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나열해보세요.
3.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말씀하신 바른 삶의 한 예는 무엇이며, 나는 이를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세요. (41)
4. ”아벨의 피로부터 ~ 사가랴의 피까지”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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