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7:11-19
찬송가 313장 ‘내 임금 예수 내 주여’
예수님께서는 각 성과 각 마을로 다니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순회전도 일정을 상세히 밝히지 않았지만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1-14절)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예수님께서는 공생애의 마지막 목적지인 예루살렘을 늘 의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대속의 피를 흘리실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을 때를 항상 염두에 두셨듯이 우리는 인생의 목적지와 죽을 때를 항상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때를 의식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이 필요로 한 곳으로 가셔서 전도하셨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두 지역의 경계 구역을 지나가실 때였습니다.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한센병이라고 하는 나병은 “피부에 반점이 생겨나 점점 짙어지다가 궤양으로 발달하고, 피부가 벗겨져 몰골이 흉해지고 몸이 마비되는 끔찍한 병”입니다. 나병환자들은 도시나 마을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거주하지 못하고 외곽 지역에서 격리되어 살아갔던 사람들입니다.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만났다기보다 예수님을 발견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멀리 서서’라는 표현이 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께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던 이유는 레위기 13장 45절의 율법에 의해 ‘나병환자들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 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누군가 접근해 올 때 자신의 차림새와 말로 자신들이 나병환자임을 멀리서 알려야 했습니다. 윗 입술을 가리고 외쳤던 이유는 비말감염을 막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나병이라는 질병 자체도 괴로운 일인데 가족들을 떠나 성이나 마을의 변방에서 철저히 격리되어 살아가는 불쌍하고 소외된 나병환자 열 명은 멀리서 들려오는 예수님과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소리는 그 자체가 복음이었습니다.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를 쳤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라고 하셨던 그 말씀(출33:19, 롬9:15)과 동일한 의미의 말씀입니다. 나병환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외침은 예수님이 신적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여겼기에 나올 수 있는 외침입니다. ‘예수 선생님이여’라고 불렀을 때 ‘선생님’으로 번역된 원어가 단순히 가르치는 교사의 뜻만을 가진 것이 아닌 주인을 뜻하기도 합니다. 절망적인 환자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생각하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애절하게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변방에 머물고 계십니까? 가족과도 쉽게 함께 할 수 없고, 직장이나 학교나 일터에서 사람들과 쉽게 함께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면 예수님께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으십시오. 주님께서는 부르짖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어떤 두려움 없이 한센병자들을 돌보고 치료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몸을 만지면서 돌보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사랑의 사역을 알지 못했더라면 실천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부정하다고 꺼리는 환자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몸의 부정함 뿐만 아니라 마음이 추악하고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주님께로 오는 사람을 막지 않으십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십니다(시34:18). 인생에 직면한 문제를 두고 주님께 부르짖으십시오.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열 명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멀리 서 있는 나병환자들에게 그들이 들릴 정도로 평소보다 목소리를 높이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부정한 나병환자이기에 멀리서 답하신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나병환자에 손을 내밀어 그 몸에 손을 대시고 치유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명에게 ‘어디서 왔느냐’라든지 ‘나병으로 고생하고 변방에서 힘들게 살아가는구나’ 등의 화두를 꺼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명료했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먼저 나병을 고쳐주신 후에 하셔야 했던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나병환자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일 때는 율법(레위기 14장)의 규정에 따라 나병이 완치되었음을 검증받을 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들을 고쳐주지 않으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쉽게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나병환자들은 신기하게도 예수님께 왜 먼저 고쳐주지 않으십니까 라고 되묻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가다가 나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함이 낳은 결과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얼마나 행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직면한 환경에 대하여 고민하다가 성경을 통해 적절한 주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이건 아니야’라고 반론을 제기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본문의 나병환자였다면 예수님께 말하기를, ‘먼저 병을 고쳐주신 후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처럼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들어갔다 나오는 과정처럼 몸이 먼저 낫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만을 소망할 수밖에 없었던 열 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명령에 어떤 토를 달지 않고 즉시 주님의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발 아래에 엎드리어(15-19절)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열 명 중의 한 사람이 나병이 나은 것을 보고 기뻐 소리를 질렀습니다. 17절을 보면 나머지 아홉 명 역시 나음을 입었지만 오직 한 사람만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를 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깨닫고 일상 속에서 감사한다면 그 감사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나병환자의 치유함처럼 기적만이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크게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나병에서 치유받은 한 사람이 돌아와 예수님께 엎드리어 감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다는 것은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 인정하는 경배와 감사입니다. ‘감사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카리스테오’의 다른 용례를 보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할 때와 예수님께서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실 때에 사용했던 말입니다. 예수님께 엎드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남 유다 사람들에게 경멸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경멸을 받았던 이유는 주전 722년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을 당한 후 식민지 정책에 의한 외국에서 이주한 사람들과의 혼혈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아홉이 오지 않은 이유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 통탄하셨습니다. 아홉 명은 나병으로 인해 받았던 고통에서 벗어난 기쁨으로 빨리 제사장에게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지라도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했어야 했습니다. 그 아홉 명은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시대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병환자들처럼 변방과 흑암의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 나병을 치료받은 것처럼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절박할 때 주님께 소리 높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어 주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아 문제를 해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어떻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아홉 명처럼 주님께 엎드려 감사하지 않을 때가 더 많지 않습니까?
나병환자 열 명 중에 한 명이 감사한 것과 나머지 아홉 명은 그렇지 못했던 일은 단순히 병 고침을 받은 후 감사한 사람과 감사하지 않은 사람에 관한 일이 아닙니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는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구원의 길을 모든 사람들이 제시받았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죄사함을 받고 구원의 길로 들어가는 사람은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되 택함을 입은 사람은 적으니라”(마22:14)는 주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께서 통탄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홉 명은 주님을 만나 육체적인 문제를 해결받았지만 영적인 문제를 해결받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믿음과 구원이 연관되어 있음을 주님께서 알려주십니다.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방인에 해당하는 원어 ‘알로게네스’를 직역하면, 다른 혈통 또는 다른 종족을 뜻합니다. 여기서 이방인은 사마리아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방인은 주님께 엎드려 감사와 경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그 믿음으로 육체의 고침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받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시편 50편 23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은 행함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와 경배를 하는 행함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은 머리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방인 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나머지 아홉 명은 유대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을 왜 이방인이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이는 혈통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는 것보다 다른 혈통을 가진 이방인에게 구원의 은혜가 더 빨리 임할 것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감사를 하지 못했던 유대인 나병환자들처럼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는 영적 교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열 명 중에 오직 한 명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구원의 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구원의 길로 들어가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아님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감사와 경배를 행하며 주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세워나가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부족함 없이 풍족하고 화려한 도시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했던 변방의 소외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에서 외면당하여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님께로 오는 것을 막지 않으시고,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고통의 문제를 해결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 나아가 엎드려 감사하게 하시옵소서.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일에 감사를 생활화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나병환자 열 명이 멀리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까?
2.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들에게 손을 대시며 치유하지 않으시고 먼저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3.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던 사마리아 사람처럼 감사한 적이 있습니까? 힘이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셨던 은혜에 어떻게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4.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5. 고침을 받은 사마리아 나병환자에게 주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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