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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16:14-31

누가복음 16:14-31
찬송가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누가복음 16장은 크게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인 1-13절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이며, 두 번째 단락인 14-18절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자세를 꾸짖으시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락인 19-31절은 부자와 나사로 비유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와 세 번째 단락의 내용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14-15)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6장 1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제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던 바리새인들은 이제 공개적으로 비웃습니다. 그들이 비웃었던 주제는 재물에 관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웃었다는 말에는 '경멸했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경멸하기까지 했던 바리새인들, 그들이 그토록 예수님의 가르침에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문은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기 때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돈을 좋아하다'를 좀 더 원문에 맞게 표현하면 '은을 사랑하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은(돈)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물질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웃음거리에 불과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에게 돈이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표시이자, 올바른 행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다 '부자'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자가 아니어도 누구든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생각해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돈을 좋아하는 자들'의 삶의 방식은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기보다 물질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 물질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만 집중하되 가난한 자들에게는 인색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언제든지 ‘돈을 좋아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을 살펴보십시다. 하나님을 우리의 힘으로 삼기보다 물질을 더 의지하며 힘으로 삼지는 않았습니까? 물질을 나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만 사용했을 뿐, 내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물질에 있어서 인색하지는 않았습니까? 뒤에 이어지는 15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자들의 민낯을 들춰내십니다.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외적으로 의로운 모습을 만드는 것이며, 이는 사람에게 공경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가짜 경건에 사람들은 존경의 눈빛과 감탄의 눈길로 바라보았으며, 그들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각 사람을 살펴보시고 판단하시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재물이나 명예로 사람 중에 높임을 받고, 사람들로 하여금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된다면, 바로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미움받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높임 받는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받는 것'이라 번역한 헬라어 '브델뤼그마'는 '가증한 것', '몹시 미운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이 단어를 주로 우상 숭배의 행위와 관련되어 사용했습니다. 즉,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며 명예와 재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부러움의 시선을 받을 때, 그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그들을 우상 숭배자를 보듯이, 가증히 여기시는 시선으로 바라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겉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을지 몰라도, 마음의 동기인 속사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우상숭배자를 바라보듯 가증히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람들에게 높임과 인정을 받고 있습니까? 돈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 자신을 뽐내고 자랑하는데 아주 좋은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 앞에 인정받고 높임 받기 위해 힘쓰는 그 행위를 가증히 여기시며 미워하십니다. 우리의 시선과 사고의 초점을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사람의 칭찬은 이 땅에서 잠깐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16-18)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라고 말씀하심으로 세례 요한이 구약 시대의 인물이었음을 나타내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오시기 이전인 구약시대의 한계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 성취하시고 완성하신 일이 무엇인지 증거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자신을 의롭다 여기는 외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율법으로 겉사람은 변화시킬 수 있었으나, 그 마음의 동기인 속사람은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이제 율법과 선지자, 그리고 세례 요한까지 증거했던 약속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를 좀더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풀어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오라는 일관되며 지속적인 간청(압력)을 받고 있다'
요한의 때까지인 구약 시대가 막을 내리고,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심으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오라는 계속되는 간청(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우리의 겉사람 뿐만 아니라 속사람을 변화시킴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히브리서 9:14-15)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시며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우리 구주께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통해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에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며 날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17-18)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시대를 여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더이상 아무런 소용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획'이란 뿔같이 삐쭉 나온 것을 의미하는데, 히브리어 글자에서 그 글자를 다른 비슷한 글자와 구분해주는 장식 선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변치 않고 하나님께서 모두 성취하실 것임을 확증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예로 결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결혼을 변치 않는 관계로 만드셨기에 어느 누구도 그 변치 않는 결혼 관계를 깨트릴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도 변치 않음을 증거하십니다.
변치 않고 온전히 이루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좌표로 삼을 때, 우리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을 먼저 택하는 삶,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물질과 비교할 수 없는 영생의 가치(19-31)
(19-2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어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한 부자는 하나님보다 자신이 소유한 물질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물질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쓰라고 주신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자신을 위해서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습니다. 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삶에 좌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부자의 삶의 좌표는 욕망이었기에, 가난한 자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율법)은 무시되었고, 대문 앞에 버려진 나사로는 그와 상관없는 자였습니다.
부자는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으며 부러움의 대상이었을지 모르나, 부자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는 우상 숭배자와 같은 미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풍족한 물질과 그것을 향한 욕망에 눈이 가려져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과 죽음 이후의 삶이 죽음 이전의 삶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고 살았습니다.

(22-24)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물질에 있어서 부자와 나사로는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건강한 몸으로 온 세계를 누빈 자도, 인생의 대부분을 병상에서 지냈던 자도 모두 동일하게 마지막 숨을 내쉬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물질을 자신의 힘으로 삼으며 삶의 길을 걸어간 부자는 마지막 숨을 내쉰 이후 음부에서 고통을 받으며 죽음 이후의 새로운 영원한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을 들어 아브라함 품에 안긴 나사로를 보고,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로 하여금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신의 혀를 서늘에게 해달라는 긍휼을 구하지만, 그 작은 긍휼조차 얻을 수 없었습니다.
죽음 이전이 삶이 공평하지 않았던 것처럼 죽음 이후의 삶 또한 공평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지만, 부자는 음부의 고통 가운데 영원히 괴로워하였습니다.

(25-26) 아브라함이 이르되 애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음부에서 고통 가운데 있는 부자에게 두 가지 절망적인 사실을 전합니다. 먼저 부자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살았을 때 고통을 받았으나, 이제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고 부자는 음부에서 괴로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라'라고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부자는 이제 영원한 고통 속에서 자신이 죽음 이전에 나사로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은 것과 자신이 잘못된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것을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말하기를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서 결코 건너갈 수도, 건너올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부자는 이제 영원한 고통 속에서 그 어떠한 기회와 소망이 없음으로 인해 절망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27-30)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부자는 자신을 향한 긍휼을 기대할 수 없고 자신에게 소망이 없음을 깨닫고, 아직 회개의 기회가 있는 다섯 형제들을 위해 간구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자신의 형제들의 잘못된 삶을 변화시키는데 부족하며 죽은 자가 전해야 형제들이 회개할 것을 다시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아브라함의 마지막 대답으로 마칩니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지금 이 땅에서 선포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결정짓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돈을 사랑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경고하십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물질의 풍요를 누리며 호화롭게 즐긴다 할지라도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아 하나님 말씀을 삶의 좌표 삼을 때, 우리는 물질의 욕망이 아닌 영원에 잇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이 땅에서의 물질은 정당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 아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데 쓰이는 도구임을 기억하며 선한 청지기가 되십시다. 내 주변에 나사로가 보이지 않으십니까? 다신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가 놓이기 전에 욕망과 탐욕으로 닫혔던 마음의 대문을 열고, 언제나 마음이 말씀으로 향하여 긍휼을 베푸는 자로 살아가십시다. 오늘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회개하는 것이 영원한 삶과 결코 관련 없지 않음을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오늘 주어진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하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이 정당한 삶을 살아온 대가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여기며 입고 먹고 마시는 일에 집중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이 이 땅에서 누리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도구였음을 기억하게 해주시며, 말씀의 좌표가 아닌 욕망의 좌표로 살아온 우리의 실상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사람이 변하게 하시고, 복음을 통해 초청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삶에 날마다 순응하며, 주어진 물질을 대문 밖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는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게 하소서. 지금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순종함으로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시고, 유한한 물질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며 영원에 잇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어떤 사람이 ‘돈을 좋아하는 자’인가요?
2. 구약(율법과 선지자)의 한계는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성취하셨나요?
3. 이 땅에서 부자가 잊고 살았던 것은 무엇인가요?
4. 죽은 나사로를 자신의 형제들에게 보내 증거하게 해달라는 부자의 부탁에 아브라함은 무엇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대답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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