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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죄를 사하는 권세 / 마 9: 1-8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풍성한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

마태복음 9:1-8

2002. 4. 14. 설교방송 (설교본문)

 

옛날 우리 동양의 선조들은 도(道)를 닦았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사는 길이 있다고 저들은 믿었고 그 길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동양의 선조들이 도를 닦을 때 서양의 선조들은 철학을 하였습니다. 철학의 목적은 진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진리를 로고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찾는 진리란 사람이 사람답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사는 식과 이치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동양의 도와 서양의 철학은 그 근본과 성격이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길과 진리가 되신다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바로 그 길과 진리가 되신다는 말씀을 믿습니다.

 

저는 모태 교인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은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였습니다. 어려서는 그저 자연스러운 생활로서 습관처럼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교회를 다니고 뿐만 아니라 목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고 있는 까닭은 제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바로 그 길과 진리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기가 막힌 삶의 이치와 법 그리고 식을 발견합니다. 저는 하나님 안에 내가 마땅히 가야할 삶의 길이 있고 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찾은 생명과 같은, 보물과 같은 진리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로마서 6장 23절의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못사는(사망) 이유가 가난 때문인 줄 알았는데 성경은 못사는 이유를 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하여 우리의 욕심을 채워 부자가 되어야 하는 줄로 알고 있는데 성경은 우리가 잘 살려면 바로 그 욕심과 죄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엉뚱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잘 살기 위하여 욕심을 부리고, 그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그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도 알지 못하고 엉뚱한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잘못된 길은 가면 갈수록, 열심히 가면 열심히 갈수록 더 힘들게 되고 못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잘 살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 못살게 되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길과 식이 맞습니다. 잘 살려면 가난과 싸우지 아니하고 죄와 싸워야만 합니다. 욕심을 채우려고 하지말고 그 욕심을 버리려고 하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정 반대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길과 식이 맞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길과 식은 틀린 것입니다. 빨리 잘못된 길과 식을 버리고 바른 길과 식을 찾아야만 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삶의 자리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가난이 아니라 죄입니다.

 

가난 자체가 무조건 다 귀한 것은 아니지만 가난 중에도 깨끗한 가난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청빈이라고 부릅니다. 그 깨끗한 가난은 오히려 우리를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가난이 우리를 못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한 것을 못사는 것이라고 부르면 안됩니다. 무조건 부유하게 사는 것은 잘 사는 것이라고 부르면 안됩니다. 우리를 못살게 하는 것은 가난이 아니라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는 지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높은 뜻 숭의교회의 목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설교를 들으려고 사방에서 모여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설교를 들으려고 저를 청하고 있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거의 쉬지 않고 전화가 옵니다. 저를 집회에 청하는 전화를 받지 않는 날이 정말 거의 하루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설교를 읽으려고 제 책을 구입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목사님들의 책꽂이에는 의례 제 책 한 두 권쯤은 거의 다 꽂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와 제 설교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사는 것이 꿈만 같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시편 8편 5절의 말씀과 같이 저를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저는 정말 그와 같은 삶을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삶을 살 자격이 사실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 속에 제가 있습니다. 저는 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 죄들이 살아서 나를 공격하면 나는 하루아침에 이 영광스러운 삶을 잃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제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영광스러운 삶은 사람들이 저의 죄와 허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제가 정말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저를 알지 못하고 저에게 속아서 저를 영광스럽게 만들어주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저를 알지 못하시고 저에게 속으셔서 저를 이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게 하시고 그와 같은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의 죄와 허물을 알지 못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저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의 그 치명적인 죄와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기 위하여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제 대신 돌아가시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십자가에는 우리의 주홍같이 붉고 진홍같이 붉은 모든 죄를 사하시고도 남을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죄는 사랑으로만 용서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어느 날 예수님이 형제의 죄를 일곱 번 까지 라도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일흔 번 씩 일곱 번 까지 라도 용서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그것을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용서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용서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꼭 한가지 경우에서만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부모가 자식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경우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죄를 정말 일흔 번 씩 일곱 번 까지 라도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제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제 아내에게 엄마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고 묻곤 했었습니다. 그때마다 제 아내는 '엄마는 아빠를 가장 사랑하고 그 다음에 너희들은 똑같이 사랑한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아내는 저보다 아이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 아내는 우리 아이들의 죄를 일흔 번 씩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해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제 아내는 아마 저의 죄를 그렇게까지 용서해 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은 제 아내가 누구를 더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만큼 사랑하는가가 얼마만큼 까지 용서할 수 있는 가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십자가의 비밀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그 이상은 있을 수 없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고등부 교육전도사를 할 때 어느 학생 하나가 새해에 카드를 보냈습니다. 한복 소매에 손을 꼽고 세배를 드리는 그림의 카드였습니다. 카드 전면에 '전도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얼마큼?'이라는 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카드를 열면 소매에서 손이 빠지면서 손이 벌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손이 벌려져 있는 카드 안에는 이와 같은 글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만큼'이라는 글이었습니다. 저는 그 카드를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십자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카드입니다. 그 십자가의 카드에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라는 하나님의 멧세지가 적혀져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사랑하시는가 물으시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실 겁니다. '이만큼....' 사랑하는 여러분 그 '이만큼'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이길 수 있는 죄가 세상에 없습니다. 여러분 지존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극악무도한 사람들이 사형 집행 전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살인마라고 불리던 고재봉과 김대두도 사형 집행 전에 모두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저들은 모두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도 사탄은 저들을 송사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사탄이 저들을 송사 했다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저울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한 쪽에는 저들의 죄를 놓고 다른 한 쪽에는 십자가를 놓아라. 그리고 어느 것이 더 무거운가를 달아보아라"

 

십자가에 죄 사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죄 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에게 죄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보여주시고 알려 주시기 위하여 그냥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하시면 될 것을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죄 사함의 능력이 있고 권세가 있습니다. 그 능력과 권세가 저의 죄를 사하셨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제가 오늘 이와 같은 영광스럽고 존귀한 삶을 살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저의 죄를 모르시고 저에게 속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로 저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탄의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탄은 처음에는 양심을 어기는 것으로 유혹을 하다가 막상 그 유혹에 걸려들면 그 양심을 들고 나와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것을 저는 사탄의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1980년 5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기 전 마음에 깊은 가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제게 준 가책이었습니다. 사탄은 양심을 통하여 저에게 '너 같은 것이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느냐?'라고 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제 죄를 기억나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 양심의 가책 때문에 몹시 고민하고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즉시 그것이 사탄의 속임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죄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속죄의 은총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탄이 다시 그와 같은 양심으로 저를 공격할 때 저는 사탄에게 마음으로 대답하였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는 그와 같은 죄인이다. 그러나 그 죄는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하여 주셨다'

 

그 대답을 하는 순간 저는 마음에 평안과 자유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제가 십자가의 보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새 사람이 되고 목사까지 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순간 사도바울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는 말씀과 '십자가 외에는 자랑치 않겠다'(갈 6:14)는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제가 누리는 이 영광스러운 삶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압니다.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능력은 저에게 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역사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헛된 부귀와 영광을 붙잡지 마시고, 헛된 욕심을 좇아 사시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욕심을 좇아 살지 말고, 그 욕심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아 장사지내고 길 되시고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과 그 분의 말씀을 좇아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 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저는 아이들이 잘못하면 아이들을 때려주곤 하였습니다. 서양에서는 그것을 미개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지만 저는 성경을 믿습니다. 잠언 13장 24절에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는 말씀을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이 잘못하면 매를 들곤 했었습니다.

 

아이들이 잘못 했다고 하면 매를 그치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훈계를 하고 보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금방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조금만 있으면 언제 매를 맞았나 하리만큼 까불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그럽니다. 저는 그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어른을 때려주면 평생 원수가 될 터인데 말입니다.

 

그런 일은 없었지만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면 여러분 어떠시겠습니까? 아이가 잘못하여 혼을 내 주었습니다. 아이가 잘못 했다기에 용서를 해주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타일러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기 방에 들어가더니 나오지를 않습니다. 저녁 시간이 되어도 나오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는가 하고 아이 방에 가보니 아이 놈이 책상에 앉아 자기 머리를 쥐어박으며 '아버지는 나를 용서하였지만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어. 나는 나쁜 놈이야. 나는 죽일 놈이야' 그러고 있다면 여러분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얼마나 괘씸한 일입니까? 아버지가 용서했으면 자기도 자기를 용서하고 다시 까불고 장난치고 밥 먹고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듯하고 양심적인 사람 중에 가끔 이렇게 어리석고 괘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대가를 치루시고 자신의 죄를 사하여 주셨는데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고 평생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의 종으로 평생을 영적인 중풍병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치명적인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그 죄가 우리를 송사하면 우리는 하루아침에 수치를 당하고 멸망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리 만큼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십자가를 붙들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에게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는 능력과 권세가 있으십니다. 그 사실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함 받은 죄의 종으로 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자리를 들고일어나 걸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도바울과 같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살고 십자가 외에는 자랑 할 것이 없다고 간증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출처 : 주님의 시선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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