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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풍성한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
마태복음 9:9-13 2002. 4. 21. 설교방송 (설교본문)
1992년 올림픽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미국에서 목회를 하시는 선배 목사님 한 분이 한국에 나오셨습니다. 오전에 호텔에서 텔레비전을 보시다가 한국의 청소년들이 10만원이 넘는 고가의 운동화들을 신고 다니는 것이 사회적인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모양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10만원이 넘는 운동화는 정말 고가의 운동화였습니다.
그 목사님이 놀라셔서 저에게 ‘김 목사 정말 한국의 아이들이 그렇게 비싼 운동화들을 신고 다니나?’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 때 아이들이 그런 운동화들을 신고 다닌다는 것은 둘째치고 그렇게 비싼 운동화가 있는 줄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정말 그렇게 비싼 운동화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무슨 표 운동화가 10만원이 넘는다라고 아이들이 대답했습니다. 너희 학교에도 그런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우리만 빼놓고는 다 신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너희들은 왜 사달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사달라고 해 봤자 안 사주셨을껀데요 뭐’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사무실에 나와 아이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렇게 비싼 운동화를 사달라고 조르지 않아서 고맙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왜 그렇게 비싼 운동화를 신어서는 안 되는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쓸데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였습니다. 그때 황영조 선수가 소속되어 있는 회사에서 그 선수의 발에 맞는 마라톤 화를 만들어 주면서 1억 원이라고 하는 돈을 썼었습니다. 당시에 그것이 사람들에게 토픽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옳다 그르다 말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서 황영조 선수 같은 사람이 1억 원 짜리 운동화를 신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유는 쓸데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억 원이 작은 돈은 아니지만 그와 같은 운동화를 신고 기록을 다만 몇 십 초라도 단축하여 은메달 딸 것을 금메달을 따게 됐다면 그것은 절대로 지나친 일이 아니라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들에게 그러나 너희들이 10만 원 짜리 운동화를 신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그것은 기록을 단축하기 위함도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자기는 10만 원 짜리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일러 주었습니다. 자기의 사람됨을 자랑하지 못하고 기껏 자기가 10만 원 짜리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신발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너희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소유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치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만큼의 가치를 소유했는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만큼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는가에 우리의 행복과 성공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이유와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과 이유는 소유가치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존재가치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소유가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치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되고 다 건강해 지는 줄로 잘못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고 그 기도하는 목적이 합당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도 얼마든지 가난해 질 수 있고 예수를 믿어도 얼마든지 약해 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존재가치가 높아집니다. 예수는 존재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존재가치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도대체 가치란 무엇일까요? 가치는 어디에서부터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요?
가치는 ‘쓸데’ 즉 ‘유용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쓸데가 있으면 가치가 있는 것이고 쓸데가 없으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이 마이크는 쓸데가 있음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고장이 나서 고칠 수가 없게 되면 쓸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치가 없어져서 내다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쓸데’ 즉 ‘유용성’은 존재목적에서부터 생겨납니다. 모든 존재에는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존재하는 목적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마이크의 존재 목적은 작은 목소리를 크게 하는 것입니다. 작은 목소리를 크게 하는 것이 이 마이크의 존재목적이고 이 마이크의 가치는 바로 그 존재목적에서부터 발생하게 됩니다.
마이크라고 하는 존재가 그 존재하는 목적을 잘 수행하고 있을 때 마이크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마이크라고 하는 존재가 그 존재하는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고 엉뚱한 존재가 되어 있을 때 그 마이크는 쓸데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존재의 목적은 누구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일까요? 마이크 자신일까요 아니면 그 마이크를 만든 사람일까요? 모든 존재의 목적은 그 존재로부터 말미암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의 목적은 안에서부터 주어지지 아니하고 반드시 밖에서 주어집니다. 그런데 그 밖은 그것을 만든 즉 그것을 존재케 한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원칙이 우리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소유에 있지 않고 존재에 있습니다. 우리 사람의 존재가치는 존재목적으로부터 말미암는데 그 존재목적은 우리 인간 자신에게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되려면 우리의 삶이 우리의 존재목적과 일치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뜻과 욕심대로 살아서는 안 되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와 소원이 우리의 기도와 소원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로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자기 자신에게 두면 안 됩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지 말고 자기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가치는 교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모이는가?’ ‘예산은 얼마나 되는가?’ ‘땅은 얼마나 넓고 건물은 얼마나 큰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가치는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가에 그 가치가 달려있습니다.
교인들의 수와 예산 그리고 땅과 건물은 그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도구일 때만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많은 교인들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무조건 작은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하는 주장도 그런 의미에서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기들끼리 친교하기 좋다고 작은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건물과 예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날 많은 교회들의 문제는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교회 자체를 꾸미고 섬기는 데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자체에 관심을 두고 투자함으로 교회는 많이 부흥하고 성장하였지만 그리하여 교인들의 숫자로만 보았을 때 세계 50대 교회 중에 절반 이상이 우리 한국에 있다하리만큼 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부흥이 아닙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속은 것입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높은 뜻 숭의교회 자체에 관심을 갖고 투자하는 교회가 아니라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높은 뜻)에 관심을 가지고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데 관심을 두고 투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진정 하나님께 인정받는 좋은 교회가 될 줄을 믿습니다.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선교입니다. 예배도 중요하고 교육도 중요하고 봉사도 중요하고 친교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선교입니다. 선교가 없다면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배와 봉사와 친교는 천국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보다 천국에서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는 천국에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이 땅에서만 필요한 것이고 가능한 것입니다.
선교를 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상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것을 막습니다. 사탄은 우리와 교회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냥 교회에서만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저 교회에만 초막을 짓고 거기에 도취되어 살기를 원합니다.
오늘 날 우리 한국교회는 그와 같은 사탄의 시험에 빠진 교회 같아 보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예수 믿는 사람끼리 모여서 열심히 찬송하고 친교하고 예배하는 것을 너무 지나치게 즐기고 있습니다. 그 즐거움 때문에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잊어 버렸습니다. 세상을 잊어 버렸습니다. 세상으로 나아가는 잊어 버렸습니다. 선교를 하려면 교회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요즘 보면 배 모양으로 건축을 한 식당과 카페가 유행입니다. 모양은 꼭 배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양과 무늬만 배 이지 실상은 배가 아닙니다. 그 배는 바다에 있지 아니하고 육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우리 한국 교회가 마치 그와 같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육지에 있는 배와 같습니다. 도무지 바다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다와 같은 세상에 무관심하다가 바다와 같은 세상을 두려워하더니 이제는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세상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예수님은 마태의 집에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신 까닭은 저들과 같이 되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저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들을 구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저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비난하였습니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행동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날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는 세상에 대한 소명을 잊어버리고 오직 교회에만 관심을 가지고 투자한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을 잘 훈련시켜서 세상으로 내 보내려고 하지 않고 잘 훈련시켜서 오직 훌륭한 교회의 일꾼으로만 만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그냥 교회로만 부르고 있습니다.
세상에 우리 한국 교회 교인들처럼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세상에 우리 한국 교회처럼 예배와 자체 행사가 많은 교회가 없습니다. 주일 낮 예배, 주일 저녁 예배, 수요 기도회, 금야 철야 기도회, 새벽기도회, 구역예배, 권찰공부등등 그 모든 예배와 기도회에 참석하려면 세상에 나아가 제대로 일할 시간을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관심이 세상에 있지 아니하고 교회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교회에 대한 예배와 행사를 줄여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교인들을 교회 밖으로 내 몰아야만 합니다. 교인들끼리만 몰려다니게 하지말고 오늘 본문의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있게 해야만 합니다. 훈련이 필요하다면 좋은 교회 일꾼을 만들기 위한 훈련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세상 사람 닮아가지 아니하고 저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훈련을 시켜야만 합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여자의 경우 권찰 3년을 해야만 집사를 임명했습니다. 제가 통장 3년 해도 준다고 하였습니다. 교인들을 권찰로만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권찰보다는 통장으로 키워야 합니다. 통장 훈련을 잘 시켜서 세상으로 내 보내야만 합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보다 동네와 이웃을 섬기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 여러분 너무 교회에 열심히 오지 마세요.(?)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봉사하는 것 절제하세요. 그리고 보다 많은 힘과 시간을 세상에 투자하세요. 높은 뜻 숭의교회를 섬기려 하지 마시고 세상을 섬기려고 하세요. 안에서 초막 짓지 말고 나가서 노세요. 교회 안에서만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시지 마시고 세상에 나아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하세요.
오늘 날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는 교회에 너무 일꾼이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꾼이 없어도 문제이지만 일꾼이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아도 문제입니다. 걸리 적 거립니다. 그러다가 서로 싸웁니다. 조그만 일과 자리를 놓고 서로 그것이 자리 일과 자리라고 우기며 싸웁니다. 세상의 큰 일과 자리는 다 내 팽개치고 조그만 교회에 와서만 난리들입니다.
몇 년 전 KBS 방송국 신우회에 가서 예배를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서보니 그 방송국의 부사장이 장로님이셨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KBS 방송국의 부사장 자리는 선교적으로 볼 때 목사 100명이 감당할 수 없는 귀한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이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방송국 부사장 일이 얼마나 바쁜지 장로일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하나님과 목사님에게 얼마나 죄송하지 모르시겠다면 그 부사장직을 사표 내시려고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뭐라고 그 장로님에게 말씀을 드렸는지 아시겠습니까?
“장로를 사표 내시지요?(!!!)”
장로는 귀한 직분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직분은 더 중요한 직분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교회의 직분은 성직이고 세상의 직분은 속되고 더러운 직분 인줄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장로직은 봉사직이고 세상의 직분은 성직입니다.
저는 목사만 성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사만 주의 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건강하고 건전한 직업이 모두 다 성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목사도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직업을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직업이라는 말을 속된 것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래 전에 어느 장로님 한 분이 제게 ‘우리 장로들은 연보 내고 봉사하고 목사님들은 월급을 받고 봉사를 하시니 우리 장로들이 더 순수한 것 아닙니까?’라고 농담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장로님에게 ‘그러니까 장로님은 아마츄어고 저는 프로지요’라고 따끔하게 응수(?)했습니다.
저는 저만 성직자라고 생각하시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를 우습게 보시면 안 됩니다. 저는 제가 목회의 프로라고 하는 아주 대단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저와 같이 여러분의 직업과 직장에 대하여 자존심과 소명감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목사만 제사장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다 제사장입니다. 저는 교회의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서 놉니다. 여러분들은 세상의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목사처럼 교회에서만 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놀아야 합니다. 여러분 너무 교회에 열심히 오지 마세요. 너무 봉사 열심히 하지 마세요. 절제하세요. 힘을 비축하여 세상에 나가서 쓰세요. 저는 그것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높으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약해 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더 강해집니다. 교인들이 교회에서만 놀지 않고 세상에 나가서 놀게 될 때 믿음이 더 크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예배가 살아나고 기도가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려고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서 교인들끼리만 놀지 말고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 사람과 좀 놀아라. 그리고 저들을 교회로 불러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좋으시지요? 그래도 너무 좋아하시면 안 됩니다. 너무 사랑하면 안 됩니다. 교회 보다 여러분의 동네와 직장을 더 사랑하세요. 교회보다 세상을 더 섬기세요. 그 힘을 교회에서 얻어 가세요. 세상에서 돈 벌어 교회에 연보만 하려고 하시지 마시고 교회에서 은혜 받아 그것을 세상에 쏟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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