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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길이 참으라! (야고보서 5:7~11)

길이 참으라! (야고보서 5:7~11)
   
약 5:7-11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서양에서는 결혼할 때, 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진주를 주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그 때의 진주를 가리켜서 영어로는 “Frozen Tears(얼어붙은 눈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 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얼어붙은 눈물”이라는 뜻의 진주를 주겠습니까? 아마도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얘야, 네가 이 다음에 시집살이를 하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을 것이다! 때로는 속상해서 눈물을 흘릴 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고 참고 견뎌야 한다. 그러면 네가 오늘 흘리는 눈물이 내일에 가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진주로 바뀔 수가 있단다!” 아마도 이러한 뜻으로 진주를 주는 줄 압니다. 여러분, 진주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진주는 땅에서 캐내는 보석이 아닙니다. 바다 속의 조개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어쩌다 잘못해서 모래알이 조개의 몸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깔깔한 모래알이 보드라운 조갯살 속에 박히게 될 때 조개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모두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깔깔한 모래알이 조개의 보드라운 살에 박히게 되면 조개는 본능적으로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된다고 합니다. 한 가지는 조개가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결국은 조개가 모래알 때문에 병들고 맙니다. 살이 썩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얼마가지 않아 그 모래알 때문에 조개가 죽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조개가 모래알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nacre(진주층)”라는 생명의 즙을 조개가 짜냅니다. 조개는 이 생명의 즙으로 자기 몸 속에 들어온 모래알을 계속해서 덮어 싸고 또 덮어 쌉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 동안을 계속해서 생명의 즙으로 모래알을 감싸고 또 감쌉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진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삶 속에도 이런저런 모래알이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시련”이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련이 우리에게 임할 때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체념해 버리면 우리의 삶이 그만큼 병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시련이 임할 때 “내가 지금 값진 진주를 품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당하는 시련이 크면 클수록, “내가 품고 있는 진주도 더 값지고 더 크겠구나!”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시 34:19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의인은 고난이 많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처럼 어두움 속에서 마음대로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고난 당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신앙 생활을 잘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오히려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 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더 크게, 더 귀하게 쓰시기 위해서 입니다. 고통은 결코 악이 아닙니다. 시련은 결코 저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더 귀하고 더 크게 쓰시기 위해서 단련시켜 나가시는 과정입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시 그는 요즘 말로 하면 마마보이였습니다. 그저 아버지 야곱의 사랑 밑에 파묻혀서 살아가던 나약한 어린 소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요셉을 하나님은 애굽의 총리라고 하는 큰 그릇으로 쓰시기 위해서 이런저런 시련으로 연단을 시키신 것입니다. 때로는 종살이를 시키시기도 하고, 또 때로는 옥살이를 시키게도 하시면서 하나님은 그를 귀하게 쓰시기 위해서 훈련시켜 나가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치 않는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까?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것 같습니까? 그래도 불평하지 마십시다. 원망하지 마십시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8절 말씀입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넘어가서 10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길이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오래 참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길이 참지를 못합니다. 본문에 보면 얼마나 오래 참으라고 했습니까?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리 횟수를 정해놓고 참지 않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세 번까지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도 이제 더 이상은 못 참아! 참을 만큼 참았어!”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면서 대듭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위해서 길이 참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끝까지 참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이와 같은 생각을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나도 인간인데 어떻게 죽을 때까지 참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가까이에 계십니다. 곧 오셔서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흘린 눈물을 아름다운 진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심지어 9절 끝 부분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주께서 곧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우리의 땀과 눈물을 모두 닦아주시고, 우리를 모든 고난에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인내하고 참으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멀지 않습니다.
성지 이스라엘에 가면 목자가 자기의 양무리를 이따금씩 깊은 골짜기로 인도할 때가 있습니다. 양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곳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여러분, 왜 목자가 자기의 사랑하는 양들을 깊은 골짜기로 인도합니까? 죽이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그 앞에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가 있으니까 자기의 양무리를 깊은 골짜기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깊은 골짜기에 처해 있는 것 같습니까?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 그렇게 생각할 만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놓여 있습니까? 그렇더라도 조금만 더 참으시기 바랍니다. 골짜기에 가려져서 앞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맡기고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참고 인내하면서 앞에 놓여있는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엄청난 축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이 왜 나를 깊은 골짜기로 인도하셨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라도 왜 조금 더 참고 인내해야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떠한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원치 않는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까? 그래도 길이 참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시면서 길이 참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길이 참으라고 권면하면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세 가지 종류의 모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7절에 나오는 농부입니다. 둘째는 10절에 나오는 선지자입니다. 셋째는 11절에 나오는 욥입니다. 갈수록 인내의 깊이가 점점 더 깊어지는 것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농부의 인내에 대해서 생각을 해봅니다.

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여러분, 우리가 농부에게서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야고보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입니다. 농부는 참을 줄 압니다. 둘째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입니다. 농부는 또한 기다릴 줄도 압니다.
먼저 농부의 참을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열매가 하룻밤 사이에 쉽게 맺혀지는 것은 아니지요? 농부가 귀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많은 땀을 흘리면서 수고해야 합니다. 쌀 한 톨이 우리 입으로 들어오기까지 농부는 엄청난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한자로 쌀 미(米)자를 생각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가운데 열 십(十)자가 있습니다. 그 위에 여덟 팔(八)자를 거꾸로 표기하고, 아래는 여덟 팔자(八)를 바르게 표기해서 포개 놓은 형상이 바로 쌀 미(米)자입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농부가 쌀 한 톨을 만들기 위해서는 팔십 여덟 번의 수고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농부는 쌀 한 톨을 만들기 위해 울며 씨를 뿌려야 됩니다. 그리고 모진 비바람도 참아야 됩니다. 아울러서 뜨거운 땡볕도 참아야 됩니다. 최선을 다해 땀흘리고 모든 수고를 인내하면서 일하는 것입니다.
또 농부는 참을 줄도 알지만 아울러서 기다릴 줄도 압니다. 여러분, 빨리 싹이 트지 않는다고 해서 덮어놓은 흙을 헤적거리는 농부를 보셨습니까? 줄기가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해서 서둘러 줄기를 땅위로 뽑아올리는 농부를 보셨습니까? 극성 피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는 땀흘리면서 최선을 다해서 수고하지만 그 결과를 모두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맡기는 것입니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적절하게 내려주시는 하나님께 맡길 줄을 압니다. 기다릴 줄을 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농부처럼 최선을 다하되 “때가 되면 반드시 귀한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맡기면서 조바심을 느끼지 말고, 기다릴 줄 아는 농부의 인내를 배워야 할 줄 압니다. 여기서 제가 시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쓴 시입니다.

「서두르지도 마오 쉬지도 마오」

서두르지도 마오
쉬지도 마오
이 말씀을 가슴에 깊이 지니고
비바람속에서도
꽃피는 길에서도
한결같이 한생을 살아보구려

‘서두르지 마오’
이 한 말씀을
마음을 바로잡는 고삐로 삼아
깊은 사려 올바른 판단
한번만 결심이 끝난 다음엔
온 힘을 기우려 앞으로만 나가보오
먼훗날에도 뉘우침없이 걸어가보오

‘쉬지 말아요’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가오
반짝이는 인생이 덧없이 가기전에
영원히 기리 남을 보람있는 업적을
이 세상의 유물로 남겨 놓구려

‘서두르지도 마오’
운명의 폭풍우에 꾸준히 견디면서
나침처럼 한결같이 의무에만 살아보오
무엇에도 굽히지 않는 정의에만 살아보오
투쟁의 모든날이 지나간 훗날에는
그대의 면류관이 역사에 찬란하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농부적 인내를 우리가 본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농부는 모진 비바람도 참습니다. 뜨거운 땡볕도 참습니다. 허리 아픈 것도 참습니다. 그리고 귀한 열매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울러 농부는 최선을 다하되 서두르지 않습니다. 기다릴 줄 압니다. 조바심을 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적당한 때에 가장 적절한 열매를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선지자의 인내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바로 선지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굉장히 좋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 신학교에 가면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학생들이 너무 많이 몰려오니까 정원초과가 되어서 신학교에 들어가려고 재수하고 삼수하는 학생들까지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러한 학생들을 위해서 신학교 입시를 위한 학원까지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한결같이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모세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위대한 종이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말로 다 할 수 없는 불평과 원망을 들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모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도 똑같이 엄청난 고난을 받았습니다. 매맞음을 받기도 했습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돌에 맞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목베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모든 고난을 참고 또 참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위해서 모든 시련을 참고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선지자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 무엇입니까? 선지자적 인내와 농부적 인내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농부는 무엇을 위해서 인내하는 것입니까? 귀한 열매를 위해서 인내합니다.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참는 것입니다. 예컨대 학생이 조금 더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밤에 잠이 오는 것을 참고서 공부합니다. 또 사업가는 돈을 벌기 위해서 땀흘리며 일을 합니다. 이러한 인내는 누구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적인 인내는 다릅니다. 선지자는 누구를 위해서 참는 것입니까? 나를 위해서 참는 것이 아니고, 남을 위해서 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위해서 참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참는 농부적 인내에서 우리가 한 걸음 더 올라가 다른 사람 때문에 참는 선지자적인 인내를 배워야 될 것입니다.
“야! 믿기 싫으면 관둬라. 관둬!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이 짓을 하니? 네가 믿고 천국에 가라고 하는 것이지 나 잘 되라고 이러는 것이냐?” 이와 같은 마음을 갖지 말자는 것입니다. 내 가족 가운데 아직도 믿지 아니하는 자가 있습니까? 내 이웃 가운데 아직도 복음이 필요한 자가 있습니까? “내가 너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도 견디면서 끝까지 복음을 전하겠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모든 시련을 이겨내면서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지자적인 인내입니다.

셋째로, 욥의 인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욥의 인내를 본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농부는 자기 때문에 인내합니다. 선지자는 다른 사람 때문에 인내합니다. 그러나 욥은 달랐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끝까지 참고 또 참았습니다. 욥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지 아니하도록 그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참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욥에게 엄청난 시련이 임했습니다. 본시 그는 동방의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많던 재물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욥은 이제 더 이상 농부처럼 자기 때문에 참고 견뎌야할 필요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욥은 농부적 인내의 한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욥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 일곱이 있었습니다. 또 딸 셋이 있었습니다. 사고로 인해서 한꺼번에 모두 죽었습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아내마저도 그를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욥은 선지자처럼 다른 사람 때문에 참아야 할 이유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욥이 선지자적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욥의 몸에 심한 악창이 솟아났습니다. 살이 썩어 들어갑니다. 욥은 그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입술로 범죄치 아니했습니다. 입을 열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거나 원망치 아니했습니다.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욥은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찬송했습니다. 욥 1:21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은 하나님 때문에 참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참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왜 지금 여러분이 교회에 다니고 계십니까?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 입니까? 건강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 입니까? 여러분의 가정이 평안하기 위해서 입니까? 물론 이것이 우리의 시작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끝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의 고백이 생각나시지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참고 견디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잔인하신 하나님이십니까? 냉혹하신 하나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1절 끝 부분 말씀입니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하나님은 가장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모든 고난에서 건져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 34:19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하나님은 욥의 모든 곤경을 돌이켜 주셨습니다. 욥이 당하고 있는 엄청난 시련에서도 욥을 건져 주셨습니다. 욥은 하나님께로부터 갑절의 복을 받았습니다.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물질의 복도 배로 받았습니다. 가정도 회복되었습니다. 장수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면서 오랫동안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통은 악이 아닙니다. 시련은 저주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진주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무슨 단점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그것을 장점으로 바꾸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약점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그것을 강점으로 바꾸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일에 실패하셨습니까? 믿음으로 그 실패를 오히려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흘리는 오늘의 눈물이 내일이면 아름다운 진주가 될 수 있습니다.
농부의 인내를 본받게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참고 기다리면서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나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선지자의 인내를 본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나 때문에 참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을 위해서도 참을 수 있는 선지자적 인내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욥의 인내를 본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모든 시련을 이기고 참았던 욥의 인내를 본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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