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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승동의 과거, 현재, 미래! (요한복음 12:12~24)

승동의 과거, 현재, 미래! (요한복음 12:12~24)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오늘은 우리 교회가 설립된 지 109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먼저 우리 승동 교회가 어떻게 해서 설립되었는지를 잠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를 설립하신 사무엘 무어 목사님(Samuel Forman Moore, 1860∼1906)은 1892년, 사모님과 더불어 미국에서 배를 타시고 우리나라로 오셨습니다. 같은 시대 선교사들이었던 언더우드 목사님이나 아펜셀러 목사님은 그 당시 우리나라 상류층의 사람들을 주로 상대했습니다. 그러나 무어 목사님은 달랐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천대받는 사람들, 또 소외된 사람들, 다시 말해서 그 당시 우리나라의 하층 계급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쓰셨습니다. 그래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무어 목사님이 그 당시 주로 노방전도를 하던 곳은 곤당골이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지금의 롯데호텔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고운 담이 있다고 해서 곤담골 또는 곤당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는 그곳에 작은 개천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주변에 천대받는 백정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1893년, 드디어 무어 목사님은 열여섯 분의 교인들과 함께 곤당골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승동 교회의 전신입니다. 그러니까 승동 교회의 최초의 이름은 곤당골 교회였습니다. 백정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우리 교회의 전신이 곤당골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1년 뒤 1894년 봄, 어느 날이었습니다. 무어 목사님은 그날도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거리로 나가셨습니다. 거기에서 박봉출이라는 어린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박봉출은 그 당시 곤당골 교회에서 운영하는 소학교에 출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박성춘씨는 백정이었습니다. 나중에 우리 교회에 출석하면서 박성춘씨는 장로가 되었고, 또 그 아들 봉출이는 이름을 서양으로 바꾸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뜻이었습니다. 박서양은 세브란스 의전 1회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외과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봉출이가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무어 목사님은 깜짝 놀라서 봉출이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봉출이가 대답하기를 자기 아버지가 열병 곧 발진티프스에 걸려서 다 죽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어 목사님은 얼른 그 당시 제중원 의사였던 에비슨 박사(O. R. Avison, 1860∼1956)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에비슨 박사는 고종황제의 시의였습니다. 무어 목사님과 에비슨 박사는 얼른 봉출이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무어 목사님은 봉출이의 아버지 곧 박성춘씨를 위해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또 에비슨 박사는 주사를 놓고 약을 지어주어서 극적으로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박성춘씨가 얼마나 감동했겠습니까? 서양 선교사님이 자기와 같이 천대받는 백정의 집을 찾아와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같은 고종황제의 시의가 자기 같이 천한 백정을 찾아와서 주사를 놓아주고 약을 조제해서 자기의 생명을 살려주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박성춘씨와 그의 가족은 우리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그들의 권유에 의해서 백정들이 한 사람씩 두 사람씩 우리 교회를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곤당골 교회의 별명이 생겼습니다. 바로 백정교회였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먼저 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던 양반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어 목사님은 늘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복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누구나 평등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양반과 백정이 싸울 때마다 무어 목사님은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그들의 싸움을 말리곤 하셨습니다. 결국 무어 목사님의 백정들 전도에 불만을 표하듯 양반들 가운데 더러는 교회를 떨어져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어 목사님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또 소외당하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셨습니다. 무어 목사님은 그들과 똑같이 헐벗고 굶주리셨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셔서 결국은 과로로 쓰러지셨습니다. 무어 목사님은 46세의 젊은 나이에 병을 이기지 못하고 하늘 나라로 가버리셨습니다. 백정들은 목사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관을 들고서 양화전에 있는 선교사 묘역에 가서 목사님의 시신을 고이 묻었습니다.
사모님도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셔서 결국은 폐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사모님의 태중에는 아버지의 죽음도 알지 못한 채 어린 생명이 이미 자라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딸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목사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얼마나 귀여움을 받았겠습니까? 사모님은 이미 있는 어린 세 아들과 유복녀를 데리고 본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병에 걸리셨으니까 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선교부에 구제금을 요청해서 적은 구제금으로 하루하루 생활을 연명해 나갔습니다. 결국 어린 딸은 고생을 이기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일치감치 죽고 말았습니다. 무어 목사님이 계신 하늘 나라로 뒤따라가고 만 것입니다. 사모님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세 아들과 더불어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모님은 세 아들을 친척집에 맡기고서 자신은 뉴욕에 있는 폐결핵 요양소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병마와 씨름하면서 또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다가 결국은 그곳 결핵 요양소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승동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오늘 109주년을 기념하면서 우리가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무어 목사님과 그의 가족의 희생이 있었기에 승동 교회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의 무덤 위에 승동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무어 목사님과 그의 가족들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이 땅에서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이렇게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그 후손인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뜻깊은 교회설립주일 109년을 기념하면서 우리 교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나누어 간단하게 생각해 보면서 좋은 교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더욱더 사랑하는 마음을 북돋우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승동 교회의 과거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1893년, 우리 교회는 곤당골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다가 1904년 12월에 지금 이 자리로 이전했습니다. 1905년 8월 1일, 공식적으로 이전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는 인사동이나 종로거리라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인사동과 종로2가 일대를 통틀어서 "승동(承洞)"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1907년 길선주 목사님을 모시고 경기도 여러 교회들이 우리 교회에 모여서 연합 대사경회를 개최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한 33명 가운데 손병희씨 이름 다음으로 서명된 인물입니다.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 귀한 목사님이셨습니다. 아무튼 길선주 목사님이 그때 부흥회를 인도하시면서 설교 도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승동 교회는 뒤에 있는 사동(寺洞)과의 영적인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해야할 거룩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승동 교회는 앞으로 모든 면에 있어서 한국 교회에서 으뜸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처럼 이을 승(承)자를 쓰지 말고, 이길 승(勝)자를 쓰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부터 승동 교회는 이길 승(勝)자를 써서 승리하는 교회, 으뜸 되는 교회, 앞장서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승동의 선조들은 모든 면에서 한국 교회의 앞장을 서온 것이 사실입니다. 일제 치하 우리가 나라를 빼앗겼을 때는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3·1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3·1운동이 있고 난 뒤 3월 5일, 수많은 학생들이 남대문 가도와 서울역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에서 당시 학생면려회 회장이었던 김원벽 지사는 인력거 위에 올라타고서 대형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운동을 최일선에서 주도했습니다. 그러다가 일경이 휘두르는 칼에 어깨를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그 길로 체포되어 감옥에서 3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 뒤에 나오기는 했지만 너무 심한 고문으로 오래 살지 못하고 결국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3월 14일, 차상진 담임목사님과 우리 교인들은 일제의 탄압에 항의하기 위해서 보신각 앞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차상진 목사님은 이른바 "12人등의 장서"라는 항의문을 낭독했습니다. 곧 이어 우리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서 다시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물론 그 길로 차상진 목사님과 많은 교인들이 일경에 의해서 체포되었습니다. 또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승동의 선조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한 알의 밀이 되었습니다.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희생하고 헌신한 것입니다. 1945년 8월 15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광복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1993년, 우리 교회가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 서울시에서는 그때 일을 기념하여 교회 정문에 3·1운동기념표석을 세웠습니다.
또 승동 교회는 언제나 영적인 부흥운동에도 앞장을 서 왔습니다. 한국 교회에 큰 행사가 있을 때는 늘 우리 교회에 모여서 기도하고 의논하고 또 연합적인 행사를 가져왔습니다.
1919년 3·1운동이후 국민들이 상처 속에 있을 때, 그 다음 해인 1920년에 우리 교회에서 서울시내 일곱 교회가 연합해서 부흥사경회가 열렸습니다. 그 당시 총회장이셨던 김익두 목사님이 강사로 오셨습니다. 목사님은 15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으면서 부흥회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성령 충만한 가운데 부흥회를 마쳤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매 집회시 마다 일만 명 가까이 모였다고 하니까 그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우리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때 일이 계기가 되어서 김익두 목사님은 1935년, 제 8대 담임목사님으로 우리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신사참배를 반대하시다가 일경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3년 반 뒤에 사임을 하시고 목회 일선에서 은퇴를 해야만 되었습니다만, 그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설교를 통해서 깊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의 영향을 받고 우리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기로 작정하신 분도 여러분 계신 줄 압니다. 예컨대 김계원 장로님도 바로 그 분의 영향을 받고 서울에 올라오셔서 승동 교회에 교인이 되기로 작정하셨다고 합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도 김익두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서 목사가 되기로 결심을 굳혔다고 합니다.
6·25 동란시에 김익두 목사님은 어느 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시다가 퇴각하던 공산당이 휘두르는 총에 맞아서 순교했습니다. 그때까지 무려 776회의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전국 곳곳에 150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아무튼 우리 승동 교회는 영적 부흥 운동에 언제나 앞장서는 교회가 되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고 승동 교회는 언제나 진리를 사수하며 수호하는 일에도 앞장을 서 왔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에 자유주의의 물결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승동 교회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진리를 사수해 왔습니다. 1959년 WCC, 세계기독교협의회 가입문제를 놓고서 한국의 장로교가 양분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되었습니다. 그때 진리를 사수하는 교회들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WCC는 용공주의이기 때문에 가입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어야 한다."
이와 같이 주장하는 교회들이 승동 교회에 모여서 총회를 열었습니다. 또 진보적인 노선을 취하면서 WCC 가입에 찬동하는 교회들이 연동 교회에 모여서 따로 총회를 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승동측, 연동측"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 뒤에 승동측 교회들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교단이 되었습니다. 연동측 교회들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이 되었습니다. 왜 우리 교회를 어머니교회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그저 역사가 오래되었기 때문입니까? 물론 오래된 교회이기는 합니다만, 바로 우리 교회에서 언제나 진리를 사수하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교단이 태동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진리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또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으뜸 가는 교회, 앞장서는 교회, 승리하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또한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는 희생과 헌신을 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승동 교회의 현재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선교의 빚을 많이 진 것이 사실입니다. 선교사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제 2대 곽안련(Rev. C. A. Clark, 1906∼1924) 목사님도 역시 선교사였습니다. 우리 교회의 부지도 우리의 힘으로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래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속한 대지였습니다. 이러던 것을 1971년, 박일웅 원로목사님께서 곽안련 목사님의 자제인 곽안전 목사님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이 땅을 승동 교회에 기증해 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상으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기증을 받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교회는 선교의 빚을 많이 졌습니다. 이 빚을 갚기 위해서 1993년,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에 제 1호 선교사 가정을 파송했습니다. 똑같은 해 가장 먼 나라 아르헨티나 원주민들을 위해서 우리는 성경 일만 권을 기증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원주민들을 위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100년 전 미국인 선교사 사무엘 무어 목사님에 의해서 승동 교회가 세워진 것처럼 100년 뒤에 우리는 똑같은 이름의 사무엘 스와지크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교회를 세워준 것입니다. 그 뒤로 우리는 계속해서 선교의 빚을 조금씩 갚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 가정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모두 열세 가정을 지금 기도와 물질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에 두 교회를 세우고, 인도의 한 교회, 키르키즈스탄에 두 교회를 세웠습니다. 7월 둘째 주에는 키르키즈 제 2의 승동 교회가 헌당예배를 드릴 예정으로 있습니다.
사랑하는 승동의 가족 여러분! 이제는 우리 교회가 단순히 선교의 빚을 갚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선교하는 면에서도 앞장서는 교회, 으뜸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승동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해외선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국내전도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온 천하보다도 귀하지 않습니까? 지금도 인사동 거리에는 주일이 되면 수많은 인파가 배회하고 있습니다. 전도부에서는 인사동거리 복음화를 위해서 애써왔습니다. 매주일 마다 전도회별로 돌아가면서 순회적으로 거리전도에 힘쓰고 있습니다. 노방전도는 사무엘 무어 목사님이 힘썼던 것입니다. 또 본시 깡패였던 김익두가 변해서 주의 종이 되고, 부흥사요, 총회장이요, 순교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노방전도의 열매였습니다. 그가 깡패시절 시장에서 한 소년이 건네주는 전도지 한 장을 받은 것이 바로 그가 변화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서 인사동 거리의 복음화를 위해서 늘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전도부에서는 격월로 「승동의 만나」 5,000부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승동의 만나」는 여러 병원에 전해지고 있고, 또 군부대 복음화를 위해서도 귀하게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귀하게 사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국내전도와 관련해서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승동 교회는 초창기부터 소외 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왔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백정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9대 오건영 목사님과 10대 이덕홍 목사님때는 맹인전도사업에 힘썼습니다. 그때는 맹인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찾아왔습니다. 특별히 이덕홍 목사님은 "맹인의 아버지"라고 불리어질 만큼 맹인전도사역에 힘써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탑골공원에 찾아오시는 노인분들에게 전도하는 일에 힘써왔습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 승동의 가족들이 한 알의 밀이 되었습니다. 희생하고 헌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200명 이상 노인분들이 교회에 오셔서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다. 매년 그 분들 가운데 50분에 이르는 분들이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계속해서 이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해외선교와 국내전도 못지 않게 하나님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귀한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를 재건축 해야될 막중한 사명입니다. 교회의 본당 건물은 10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낡았습니다. 뿐만 아니고 식당, 전도회실, 화장실 등 얼마나 낙후해져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 마음대로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재개발구역으로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하면 본당은 헐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고층빌딩이 들어서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역사의 수레바퀴를 친히 돌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기도원을 주셨습니다. 그때 우리 모두가 기도하면서 기도원 벽돌을 쌓아올리는 일에 동참하겠다는 심정으로 전 교인이 특별헌금을 했습니다. IMF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기도원을 건축해 내고야 말았습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기도원 건축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룩했습니다.
그러더니 2000년 3월, 하나님은 교육관을 봉헌하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중ㆍ고등부가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본당이 건축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처소를 여호와이레로 미리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작년 2001년 4월 5일, 그날은 식목일이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서울시로부터 유형문화재 13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래서 헐릴 수밖에 없었던 우리 교회의 본당 건물이 이제는 정반대로 영구토록 보존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 건물이 낡았기 때문에 우리는 본당을 완전히 허물고 똑같은 모양으로 복원 공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지하에 여러 층을 파서 교육관, 식당, 여러 전도회의 사무실 등이 들어가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대로 응답해 주실 때 우리는 본당 이외에 모든 건물들은 허물고 기도원처럼 조경을 잘해서 아름다운 공원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앞뜰은 예수님의 가슴, 예수님의 품이 되어서 누가 교회를 찾아오든지 간에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함, 쉼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교회로 우리가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그 옛날 에스골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시니까 그들이 살아서 큰 군대를 이룩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른 뼈와 같은 우리 교회의 본당건물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큰 군대처럼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친히 모든 일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이 친히 이 일을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될 일은 우리 모두 각자가 한 알의 밀이 되어서 땅에 떨어져 죽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생과 헌신이 있을 때 우리를 통해서 아름다운 열매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승동 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우리 교회의 미래는 누구의 손에 달려있겠습니까? 바로 우리들의 손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한 알의 밀알과 같습니다. 그대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알 그대로 있으면 결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자신들을 희생하고 헌신할 때 놀라운 열매들이 맺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각자가 한 알의 밀이 되어서 열매를 맺는다는 심정으로 교회의 장막터를 넓혀 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54:2의 말씀처럼 믿음의 장막터, 소망의 장막터, 사랑의 장막터를 넓혀 나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곳의 본당건축에만 힘쓸 것이 아니고, 제 2의, 제 3의, 제 4의, 제 5의 승동 교회를 계속해서 세워 나감으로서 전국 곳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한 번 승동은 영원한 승동"이 되어서 어디를 가든지 똑같은 보수적인 신앙 노선에서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그날이 오도록 교회의 장막터를 계속해서 넓혀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교회 「100주년사」를 발간했습니다. 내년에 110주년을 맞이하면서 「110주년사」 집필을 이미 의뢰했습니다. 아울러 긴 역사에 걸맞도록 숨겨진 뒷이야기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가슴 뭉클한 이야기, 감격스러운 이야기, 정말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잊혀지기 전에 그러한 이야기들을 모아서 책으로 발간할 수 있도록 전문가에게 이미 집필을 의뢰했습니다. 「110주년사」가 나오면서 「승동 교회의 야사」가 동시에 더불어서 발간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교회 150주년사, 200주년사도 쓰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승동의 후사들이 2000년대를 시작하는 우리들을 생각할 때 무엇이라고 평가를 하겠습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2000년대를 시작하는 우리 승동의 선조들은 말씀 그대로 한 알의 밀이 되어서 기꺼이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장막터를 넓히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자신들을 희생하고 헌신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들은 이처럼 풍성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승동의 가족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과 같이, 땅의 티끌처럼 창대 해졌습니다. 지금도 승동의 가족들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2000년대를 시작하는 승동의 선조들이 한 알의 밀이 되어서 기꺼이 자신들을 희생하며 헌신하면서 교회의 장막터를 넓혀 나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대전에서 어떤 교회가 새롭게 신축을 하기로 작정하고 헌금을 했습니다. 예산을 60억을 세웠는데 그 교회 한 성도분이 자기의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50억을 한 분이 헌금했습니다. 제가 그 소식을 듣고서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우리도 곧 교회 건축을 해야될텐데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이런 헌금을 드릴 수 있는 분이 누구일까?" 이 분의 얼굴도 떠올랐고, 저 분의 얼굴도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그 분은 50억을 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50억이 아니라 60억, 70억, 100억이라도 얼마든지 드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교회는 한 분이 그렇게 헌금을 했지만 우리 교회는 한 분이 아니라 다섯 분, 열 분이라도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교회는 승동 교회, 앞장서는 교회, 으뜸 가는 교회, 모든 면에서 한국교회의 모범이 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재물을 주신 것은 바로 이러한 때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실 때 우리의 모든 것을 기꺼이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뜨거움, 감격, 열심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먼 훗날 승동의 후손들이 우리를 평가할 때 "정말 그 분들은 교회를 위해서 기꺼이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으면서 헌신했다!"라는 아름다운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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