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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는 행복합니다(2) (마태복음 5:6~8)

우리는 행복합니다(2) (마태복음 5:6~8)
   
마5:6∼8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어느 여대생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쪽 다리가 다른 쪽 다리보다 좀 짧았습니다. 그래서 먼 거리를 걸어가기 위해서는 목발을 짚어야하는 장애자였습니다. 그가 다니는 학교는 산중턱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가파른 계단이 유난히도 많았습니다. 그러니 한 계단 한 계단 목발을 짚고 올라가기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언제나 밝았습니다. 늘 행복한 표정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곁에서 함께 계단을 올라가던 같은 과 여학생이 그를 바라보면서 안쓰러운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하나님이 너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셔서 너의 그 짧은 한쪽 다리를 길게 늘려주셨으면 좋겠다."
그러자 그 여대생은 미소를 지으면서 "아멘!"이라고 화답을 했습니다. 친구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 어떻게 하다가 그런 장애를 가지게 되었니?"
그 여대생은 서슴없이 대답했습니다.
"응, 어릴 때 소아마비를 심하게 앓았어."
그 말을 들은 친구는 궁금한 점이 있다는 듯이 또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도 너는 어떻게 그렇게 늘 행복해 보일 수가 있니?"
그러자 그 여대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야 내 마음이 건강하니까 그렇지. 내 몸에 장애가 있다고 해서 내 마음마저 병드는 것은 아니지 않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은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려있습니다. 행복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기쁘고 즐거우면 우리는 언제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행복은 전적으로 마음가짐의 문제입니다.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천사를 시켜서 사람에게 필요한 행복을 갖다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천사의 마음 속에 질투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사람에게 행복을 갖다주기는 하되, 좀 찾기 힘든 곳에 감추어 놓고자 했습니다. 천사는 다른 동료들과 상의를 했습니다. 한 천사가 이러한 제안을 했습니다.
"사람의 손이 쉽게 미치지 않는 깊은 바다 속에 행복을 감추어 놓으면 어떨까?"
그러자 다른 천사가 고개를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야, 사람은 재주가 많아서 그 정도는 쉽게 찾아내고야 말걸."
또 한 천사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면 높은 산꼭대기에 사람이 원하는 행복을 올려놓으면 어떨까?"
그 의견에 대해서도 반대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좋지 않아. 사람은 모험심이 많아서 오히려 쉽게 찾아낼거야."
천사들은 이 궁리 저 궁리하던 끝에 드디어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람은 그저 자기의 머리와 재주만 믿고 설치기를 좋아한다. 그러니 그에게서 가장 가까운 자신의 마음 속에 행복을 묻어두자. 그러면 오히려 쉽게 찾아내지를 못할 것이다."
그래서 천사는 행복을 사람의 마음 속에 묻어 두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가 주변의 여건에 따라서 행복이 좌우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환경을 더 낫게 개선하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은 전적으로 마음가짐의 문제입니다.
극단적인 예로 스데반 집사를 생각해 봅시다. 그가 돌에 맞아 순교할 때였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도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환하게 빛났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하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의 모습이 어떻게 그처럼 평온할 수 있었겠습니까? 비록 육체는 고통스러웠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행복이 넘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들이 바로 복 있는 자요, 행복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된 우리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매 순간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8복 가운데 4, 5, 6번째 복을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만족케 하십니다.

6절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시23:1∼2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 되셔서,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또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십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길이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족함이 없는 삶, 만족한 삶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들이 주릴 때 하나님은 하늘의 만나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들이 목말라할 때는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셔서 그들의 갈한 목을 축여주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가 주릴 때 먹게 하시고 또 우리가 목마를 때 마시게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욕구를 하나님은 다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행복한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가리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저 세상적인 것에만 주리고 목말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입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몸은 죽지 않고 살아있기에, 병들지 않고 건강하기에, 주리고 목마르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은 거듭난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 되셨습니다. 생명수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영은 결코 주리지도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과 육이 아울러 풍성한 삶을 살기에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는 바리새인들이 내세우기 좋아했던 인간적인 의, 자기 의를 가리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원문 성경에는 의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the righteousness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실 때의 그 의입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기를 영접해 주시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저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그러나 그 말에 대해서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을 불러서 이렇게 명했습니다.
"여봐라. 내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혀라. 손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는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자. 그리고 우리가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자."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에 아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아버지,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제 마음이 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품군과 똑같이 대해주십시오."
그러면서 누더기 옷을 그대로 입고서, 잠도 외양간에 가서 자는 것이 옳겠습니까? 그것은 아직도 자기 의가 살아있는 교만스러운 태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체면이 서지 않지만, 형님의 눈치는 따갑지만 아버지의 뜻에 겸손히 따르는 것이 아들의 마땅한 태도일 것입니다.
"아버지, 그 동안 너무나도 죄송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아버지의 속을 썩이지 않고 한번 아들 노릇을 제대로 잘해 보겠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의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능동적인 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수동적인 의를 요구하신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인간적인 의, 자기의 의, 능동적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어느 부자 청년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에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인간의 의는 아무리 쌓고 또 쌓아도 언제나 부족함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만이 우리의 영을 만족케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과 허물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결코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 영혼의 잔을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자들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7절 말씀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는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허물이 많습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 너무나도 형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겨주셔서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늘 따뜻하게 받아주시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너무나도 감사하고 또한 행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날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려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은 그를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문둥병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서 더러운 문둥병자의 몸에 대시면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의 몸을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또 다른 날 예수님이 길을 걸어가실 때였습니다. 두 소경이 뒤를 따라오면서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그들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긍휼에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시 문둥병자처럼 죄로 얼룩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영적인 소경이 되어 흑암 속에서 헤매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사하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도 긍휼히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긍휼히 여기는 자들입니다. 예컨대 형제가 우리 앞에서 잘못을 범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강퍅한 마음으로 비판하고 정죄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긍휼히 여기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죄는 밉지만 형제를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불쌍한 사람, 어쩌다가 저런 실수를 다 했을까? 하나님, 그가 속히 바른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도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붙들어주지 않으시면 저도 똑같은 실수를 범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그릇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붙들어 주시옵소서."
우리는 온유한 심령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형제를 이해해주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줍니다. 우리는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그러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줄을 몰랐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의에 가득 차서, 그들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에만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비판하고 정죄하는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자리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어찌 감히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불행한 자들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살아가는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형제가 잘못을 범했다 할지라도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해주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면서 그대로 우리를 영접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밤하늘에 둥글게 떠 있는 달은 태양 빛을 받아서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들이기에 사랑이 메마른 이 세상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형제가 잘못을 범하면 우리는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시간 마더 테레사가 한 말을 조용히 음미해봅니다.
"우리가 지금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기가 어렵습니까? 사랑의 첫걸음은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만 있으면 사랑이 그에게 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신 것처럼 우리는 늘 긍휼히 여기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긍휼히 여기면서 도와주면서 아껴주면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형제 자매된 자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8절 말씀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해바라기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늘 환하게 웃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은 의의 태양되신 하나님을 날마다 매 순간마다 바라보면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 옛날 에스더는 바사나라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였습니다. 그는 왕비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임의대로 왕에게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왕이 그를 부를 때에만 왕에게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왕을 꼭 뵈어야만 할 일이 생겼습니다. 하만의 계교로 자기의 동족 유다인들이 다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에스더는 왕을 뵙기 위해서 사흘을 금식했습니다. 그리고는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한 구석을 잠시 다스리다가 사라지고 말 세상의 왕을 보고자 할 때도 사흘을 금식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나아가서 만났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 온 우주 만물을 영원토록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날마다 매순간마다 뵈오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행복한 일입니까?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은 공중을 나는 새를 보시면서도, 들에 핀 백합화를 보시면서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시고 따스하신 손길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울려 퍼지는 뇌성을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권능을 생각합니다. 숲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구름 타시고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시는 그 날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을 늘 뵈오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마음이 청결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바리새인들도 청결에 무척이나 힘썼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손을 씻지 않으면 먹지를 않았습니다. 음식 먹을 때 사용하는 그릇들, 예컨대 잔과 주발과 놋그릇까지도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들 바로 눈앞에 만왕의 왕이시며, 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시건만 그들은 전연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눈이 가려졌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들은 회칠한 무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겉만 깨끗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시고 영광스럽게 오시는 그 날,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자들은 감히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소리칠 것입니다.
"산아! 나를 덮어라. 골짜기야! 나를 메워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은 우리들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말하면서, 기쁨과 감격 속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세 무궁토록 기쁨으로 새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 우리에게는 거듭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긍휼히 여기는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이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배부르게 하십니다. 우리의 영육을 만족케 해주십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행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된 우리들이 날마다 매 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기쁘게 삽시다. 즐겁게 삽시다. 감사한 마음으로 삽시다. 평안한 마음으로 삽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매 순간마다 행복한 표정 잃지 않고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이 행복이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행복이요, 우리 모든 교우들의 행복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민족 전체의 행복이 되게 하십시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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