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9∼12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성탄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늘 영광을 내어놓으시고, 이 낮고 낮은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탄생하셨습니까?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우리에게 하나의 동화를 들려줍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왕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자는 신하들과 함께 왕궁 밖 사냥터에서 사냥을 즐겼습니다. 왕자는 왕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아리따운 시골처녀를 보게 되었습니다. 왕자는 그 시골처녀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왕궁에 돌아와서도 그 시골처녀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왕궁 안에도 많은 처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골처녀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왕자는 그 시골처녀를 너무나도 그리워하던 나머지 그 처녀를 자기의 신부로 삼아야 되겠다고 결심을 굳혔습니다. 왕자는 그 시골처녀를 어떤 식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 좋을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에게 세 가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첫째 방법은 자기의 권위를 이용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왕자는 수많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그 시골처녀에게 가서 왕자로서의 위엄있는 모습으로 구혼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자는 그 방법을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는 그 시골처녀가 왕자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왕자의 권위에 억눌려서 어쩔 수 없이 왕자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방법은 자기의 찬란한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왕자는 그 시골처녀를 왕궁으로 초대해서 왕궁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또 왕비로서의 화려한 삶을 약속하면서 그에게 청혼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자는 이 방법도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사랑이 수반되지 않는 부귀와 영화라는 조건에 따른 결혼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방법은 시골처녀와 눈높이 사랑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황자는 시골 목동의 모습으로 그 시골처녀가 사는 동네로 이사를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동네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면서, 기회 있는 대로 그 시골처녀에게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왕자는 이 방법만이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그 시골처녀에게 보여주고, 또 자신도 그 시골처녀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지의 여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왕자는 이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 이 세상으로 내려오신 이유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왕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왕자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시골처녀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늘 나라의 왕자이신 우리 예수님은 시골처녀처럼 미천한 신분인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자신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시면서, 우리에게서도 순수한 사랑을 확인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만 가지시고 이 땅에 오셨다면, 모두가 그를 두려워해서라도 믿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천국의 영화를 다 보여주고 난 뒤에 그를 믿으라고 하셨더라면, 천국의 영화로움에 반해서라도 모두가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들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의 권세 때문에, 또는 예수님을 믿으면 얻게 될 그 어떤 조건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오늘도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우리는 너무나도 행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시골처녀가 왕자의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듯이, 우리도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뒤에 있을 모든 영광은 그저 은혜로 우리에게 다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8복 가운데 7번째와 8번째, 그리고 마지막 8번째 복에 대해서 예수님이 덧붙여서 말씀하신 내용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만 왕의 왕 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너무나도 가슴 벅차고 또 행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기독교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우찌무라 간쪼입니다. 그는 위대한 성경학자였습니다. 또 한 사람은 가가와 도요히꼬였습니다. 그는 빈민운동등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데 앞장 섰던 목사님이었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는 일본의 성자라고도 불려지고 또 일본의 사도 바울이라고도 불려졌던 분입니다.
가가와 도요히꼬의 어머니는 술집의 기생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고오베 시장이었습니다. 고오베 시장이 기생을 첩으로 들여서 나온 아들이 바로 가가와 도요히꼬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릴 때 아버지도 여의고, 어머니도 여의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는 아버지의 본처 집에 가서 얹혀 살았습니다. 그러니 어릴 때부터 얼마나 많은 구박을 받았겠습니까?
그가 12살 때였습니다. 마땅히 갈 때가 없었던 그는 담장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홀로 따스한 햇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앞을 북을 치며 나팔을 불고서 지나가는 행렬이 있었습니다. 예수 전도단이었습니다. 그 행렬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참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는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소리치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정말입니까? 나 같은 기생의 자식도, 첩의 아들도 예수님만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있습니까?"
그 전도대원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물론입니다! 요1:12에 말씀하기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당신도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길로 자기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누가 물으면 그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는 기생의 자식도 아니고, 첩의 아들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자기처럼 불쌍한 자들을 위해서 일생토록 많은 봉사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평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우리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우리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갑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우리가 잘 아는 성 프랜시스의 기도문처럼 우리는 평화의 도구로서, 화평케하는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은 너무나도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화평케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있는 곳에는 미움과 분열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로마인들을 미워했고, 사마리아인들도 미워했고, 세리와 창기들도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화평케 하는 자" 곧 peace∼maker가 아니라, trouble∼maker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를 못했습니다. 도리어 마귀의 자식이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서,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낫게 여깁니다. 또 우리 자신이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살아가기에 우리가 가는 곳에는 사랑이 싹트고 언제나 평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둘째로, 천국이 우리의 것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우리는 이 땅에서도 천국을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육신의 장막을 벗는 날, 영화로운 하늘나라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롬8:17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후사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나라의 모든 것을 이어받게 될 상속자들입니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는 모든 영광을 똑같이 누릴 것입니다. 그 사실만 생각하면 우리는 너무나도 마음이 설렙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영원한 행복이 보장되어 있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잠시 잠깐 동안 의를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핍박을 오히려 기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어느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해서 아버지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샀습니다. 아버지는 선물을 한 보따리나 가슴에 안고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기쁜 마음으로 준비해 온 선물을 가족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준비해 온 선물을 다 나누어주고 보니까, 아버지의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 순간 막내 딸 아이가 재치 있게도 멋진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는아버지가 자기에게 준 선물 꾸러미에 달린 예쁜 리본을 조심스럽게 떼어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리본을 자기 머리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더니 딸 아이는 아버지의 품에 안기면서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고마워요. 아빠에게는 아빠가 사랑하는 딸인 저 자신이 바로 성탄절 선물이예요. 아빠, 사랑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는 그 자녀인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귀한 선물들을 주셨습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영원한 천국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이 몸 바칩니다"하면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헌신한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의를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기꺼이 핍박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의는 윤리나 도덕에서 말하는 인간적인 의, 능동적인 의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수동적인 의 곧 하나님의 의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다음절인 11절에서 "나를 인하여"라고 좀 더 분명하게 그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밤중에 주의 사자, 곧 천사가 와서는 옥문을 열어 그들을 풀어주셨습니다. 옥에서 나온 사도들은 그 뒤에 어떻게 했습니까? 바로 그날 새벽부터 그들은 성전에 들어가 백성들에게 부지런히 생명의 말씀을 전하며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또다시 관속들에 의해서 붙잡혔습니다. 그들은 공회 앞에 끌려가서 채찍으로 많이도 맞았습니다. 실컷 채찍질 당한 뒤에 공회 앞을 떠나오면서 그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행5:41에 보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의를 위하여, 곧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 받은 것을 오히려 기쁘게 여겼습니다.
사도들을 핍박했던 공회원들은 사도들에게 더 이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못하도록 금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5:42에 보면,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님은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칼로 목베임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머리에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쓰고서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영한 불, 곧 지옥불에 떨어져 고통을 당해야 하는 불행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의를 위하여 언제라도 기꺼이 핍박을 받을 준비가 된 자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이기에, 우리가 영화로운 천국으로 들어가는 날 우리의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씌워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세 무궁토록 왕 노릇할 것입니다. 영화롭고 영원한 하늘 나라 천국을 생각할 때 우리는 또한 행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셋째로, 하늘에서 우리의 상이 클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 가운데 살기에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11∼12절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어떤 분은 11절에 복이라는 단어가 또 사용되었기 때문에 11∼12절을 독립시켜 9번째 복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8복이 아니라 9복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11절과 12절은 10절과 마찬가지로 그 내용이 핍박에 관한 것이며, 핍박을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도 천국에서 받을 상에 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10절에 기록된 마지막 8번째 복을 11절과 12절에서 좀 더 자세하게 풀어서 다시 설명해 주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우리 예수님은 11절에 언급된 핍박들을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예수님을 거스려 온갖 악한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히12:2의 말씀처럼, 그 모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똑같은 핍박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인하여 우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우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합니까?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미워할 필요도 없고, 그들과 대항해서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그 핍박 속에서도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핍박이 우리에게 주는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핍박은 너희에게 복된 것이다. 그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로,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은 우리가 받을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상은 하늘에서 받을 상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상입니다. 아울러 큰 상입니다. 예수님은 그 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받을 상은 우리의 말로는 표현할 수도 없고, 우리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크고도 영화로운 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고후12장에서 자신이 셋째 하늘, 곧 천국에 이끌려 올라갔던 체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천국의 영화로운 광경에 완전히 압도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곳의 아름다움을 도무지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하늘에서 우리가 받게 될 상이 너무나도 영화롭고 엄청난 것이기에, 우리는 핍박 속에서도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더없이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인하여 핍박을 받았던 것처럼, 신약시대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은 예수님을 인하여 핍박을 받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천국에서 선지자의 반열에 서서, 선지자들이 받는 상을 그대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땅엣 것만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도 같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들은 위엣 것, 영원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우리가 잠시 잠깐 동안 핍박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하늘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상이 큼을 알기에, 우리는 그 어떠한 핍박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소망 가운데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마음 뿌듯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자들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반열에 서서, 하늘에서 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나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뜻깊은 성탄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십시다.
"기쁘다 구주오셨네 만백성 맞아라
구세주 탄생했으니 다 찬양하여라."
성탄의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 기쁨은 나 혼자 만의 기쁨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의 기쁨이요, 우리 교회 전체의 기쁨이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민족, 온 세계 인류 전체의 기쁨과 행복이 되게 하십시다. 아울러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화평케 하는 자로서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더 나누고 실천할 수 있는 이 성탄의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섬기다보면 때로는 섭섭하여 울 때도 있고 마음에 상처를 받고 속상한 일을 당할 때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마십시다. 천국이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괴로운 인생 길을 걸어가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기뻐하십시다. 즐거워하십시다. 평안한 마음으로 살아가십시다. 감사하면서 사십시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내일도 늘 행복한 표정을 잃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